2025년 1월 26일 주일예배 - 둘 사이에 낀 바울 사도 (빌1:19 ~ 26)
두 사이에 낀 바울 사도(빌 1:19~26)
여러분이 계속 사단의 함정과 체질 속에 빠지지 않고 거기서 빠져나와서 승리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그런 말씀을 드렸죠? 사단의 함정과 체질 속에 내가 어떻게 빠져있었는지를 알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현장이 보인다는 말씀을 드렸어요. 수많은 사람이 지금도 사단의 운명 속에 살다가 죽어 지옥 가고 있다는 게 보인다. 이 말이에요. 사단의 함정과 체질이 뭐라고 그랬어요? 3,6,11장의 본성과 우상숭배와 인본주의 이성으로 살아가는 게 체질이 된 거죠. 그래서 분명히 자신이 이 영적 문제에서 빠져나오게 되면 영적 현장 보는 눈이 열리고 그 결과 전도 마인드가 생깁니다. 맞습니까? 지금 이 사단은 이론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이론과 지식으로 믿는 것 가지고는 져요. 사단은 실제 능력과 세력을 가지고 지금 역사하고 있어요.
사탄은 이미 지배하고 있는 인생을 뺏기지 아니하기를 원해요. 누가 전도하는 것을 사단은 대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뺏기지 아니하고 자기 영역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이론과 지식으로 전달하는 것 가지고는 이 사단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는 우리가 전도 운동에 승리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뭐가 필요해요? 확실한 메시지와 함께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잡히는 게 필요해요. 성령님 우리를 잡고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내가 사단의 함정과 체질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와서 이제는 충만한 삶을 살아야 된다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번 구정 기간에도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거 확실히 붙잡아야 되고 지금 성령으로 24시 통치 인도 역사하시는 것을 누려야 돼요. 이거 누리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에요.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지금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누리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 말이에요. 오늘 제목이 두 사이에 낀 바울입니다. 두 사이가 뭘까요? 죽음과 삶 사이에 끼었다 이 말이에요.
1. 오늘 본문에 바울은 세 가지 핵심적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가 21절인데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세 가지 핵심 고백 중에서 첫 번째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지금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이게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이에요. 그렇죠? 갈라디아 2장 20절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진짜 체험하는 사람은 달라져요. 사도 바울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자기 깊은 체험 속에서 21절에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렇게 돼 있잖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은 이제 죽어서 천국 가기 때문에 유익하다 이런 말도 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유익하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사실 빌립보서 전체를 보면 바울이 굉장히 바라고 있고 사모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는 중심으로 그리스도가 살고 죽으셨던 그 모범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주시는 삶이 얼마나 귀했으면은 그랬을까 이렇게 여겨집니다.
여러분이 20절의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지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거에요. 보통은 갇힌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그게 아니에요. 지금 아무 일이든지... 이 말은 내가 지금 갇혀 있는 몸이 되었어도 그런 말이에요. 이런 일이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렇게 고백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의 핵심 고백 첫 번째가 사는 것입니다.
2) 그의 고백 둘째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게 그의 삶의 목적이에요.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수단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수단 삼지도 않는 사람도 많죠. 내가 지금 진짜 어렵고 힘든데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구하는 거 그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죠. 근데 바울은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당기는 그런 삶에 머무르는 신앙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분이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이제 자기를 수단으로 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리스도가 목적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거예요.
왜 그래요? 그리스도 때문에 생명 얻었잖아요. 또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인생이 변화되고 승리하는 체험을 하고 있잖아요. 많은 열매를 맺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는 자신이 도구가 되어져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자기 뜻을 이루기를 원했던 거예요. 여기서 존귀케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케 될까요? 이런 거예요. 내가 지금 원망해야 되는데 원망 안 하는 거예요. 정말 예수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고 그분이 모든 능력이 있고 또 그분이 가장 최고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걸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주인으로 인정되고 또 최고의 높임을 받으시고 내 인생이 내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내가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가 존귀케 돼요. 맞아요? 여러분이, 주님이 주인인데 주님을 종처럼 부리는 거면 존귀케 되는 거 아니잖아요. 이건 여러분이 그냥 종교 생활을 하는 거예요. 평상시에 내가 주인으로 살고 어려우면 “아이고 하나님” 그러면서 찾는 거예요. 이거는 존귀케 되는 게 아니잖아요. 바울은 그분의 뜻을 추구하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삶을 처리해 주시는 삶을 맛봤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꾸 응답받은 사람이 또 높아질 수 있거든요. 사도 바울은 진짜 그 은혜 받은 걸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낮아지기를 원했던 거예요. 진짜 은혜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도 본받기를 원했던 거예요. 자기가 전도하다가 지금 죽을 수 있는 상황인데 그렇게 죽으면 영광으로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였어요. 자신의 안전의 동기나 자신의 세상적인 명예의 동기를 초월하는 거예요. 가능한가요? 이게 성령님이 영적 상태를 정말 세게 붙잡으면 가능해져요.
만약에 이때 사도 바울이 창세기 3,6,11장의 본성으로 반응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만약 종교인처럼 반응했다면은 지금 이 갇혀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우리 본성에서 원망 나와요. 내가 이렇게 주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내 말년에 이게 뭡니까? 보상을 원할 거에요. 그래서 원망하다 보면 이제 불평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거죠. 이 바울은 지금 어떤 상태고 어떤 영적인 상태냐 하면 지난주에 두 종류의 일꾼에 대한 말씀을 드렸잖아요. 한 종류는 착한 뜻으로 사도 바울을 존경해서 믿음의 도전을 받아서 전도한 사람들이 한 일꾼이고 또 한 종류는 바울을 투기하고 분쟁을 일으키면서 전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은 이 투기와 분쟁으로 전도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도 바울은 용납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지금 진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데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으신다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으며 그리스도처럼 죽기를 원하고 생명까지도 드리기를 원하는 영적 상태예요. 지금 이 사도 바울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메섹에서 강력한 체험을 했잖아요. 그 이후에 다소로 내려가서 한 몇 년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수년을 거기서 있다가 이제 안디옥으로 올라오게 되거든요.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와서 같이 사역을 하자고 바울을 찾아가서 데리고 오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그 안디옥 교회를 축복하잖아요. 안디옥 교회에서의 사역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걸 체험했단 말이에요. 근데 거기서 선교사로, 성령께서 두 사람을 따로 세우게 만들어서 보내시잖아요. 그래서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하는데 가는 곳곳에서 핍박도 받았지만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았잖아요. 많은 전도의 문과 제자 문이 열렸잖아요. 그러다가 이제 3차 여행 마쳐서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거기서 체포돼서 지금 로마까지 왔잖아요. 로마에 오기까지도 모든 삶에 주님이 함께하셨고 역사해 주시는 체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바울의 사역을 아주 핵심 있게 고백하는 내용이 로마서에 나오거든요. 로마서 15장 17절부터 19절까지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여기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기 위해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거 외에는 감히 내가 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이며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다 붙잡아주시는 걸 체험한 거예요. 그러면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 이렇게 고백하거든요. 일루리곤이 어디냐 하면 여기가 지금 마게도냐 지역이잖아요? 이 지역 위로 올라가면 일루리곤으로 넓은 지역이에요. 바울이 이 마케도니아만 아니라 그 윗 지역까지 복음을 전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한 것 외에는 감히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중한지 몰라요. 이렇게 귀중해지면 주님을 수단 삼는 인생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나를 수단으로 드린다니까요. 내 돈도 드릴 수 있는 거고 나의 건강도 들릴 수 있는 거고 내 생명도 들릴 수 있는 자리까지 간다 이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했는데 하나님이 돈도 주시고 명예도 주시고 또 내가 크게 부흥도 하고 그랬을 때 다시 육신의 본성에 빠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 참 그렇게 되기 쉽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그 은혜를 가지고 더 그리스도처럼 낮아져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 최후의 모범이 그리스도처럼 자기도 죽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기를 위한 죽음이 아니잖아요. 대속의 죽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전도하다가 자기도 그렇게 죽고 싶은 거예요. 이게 빌립보 전체에서 나오는 사상이에요. 20절을 다시 보시면은 지금도 전과 같이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삶도 이렇게 될 수 있어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고백이 뭐였다고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였어요. 그러면 이런 삶이 가능하게 되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고백이 뭐냐 하면 22절을 보겠습니다.
3) 그의 세 번째 고백이 22절, 그는 두 사이에 끼어 있는데 어느 것을 택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22~2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데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랬어요. 여기서 둘 사이란 아까 말한 것처럼 죽고 사는 것 사이를 말하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몸을 떠나서 죽게 되어져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또 한편으로는 죽지 않고 석방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23절에 보니까 몸을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훨씬 좋대요. 힘들어서 염세주의에 빠져서 이런 고백을 하는 걸까요? 사역하니까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 고생하고 빨리 저기 천국이나 갔으면 좋겠다는 고백입니까? 그런 고백이 아니에요. 엘리야처럼 사역하다 낙심해 갖고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하니까 낙심하잖아요. 도망가잖아요. 그 낙심해서 나는 열조보다 못하오니 하나님 나를 데려가 주옵소서 이런 고백입니까? 이런 고백이 아니에요. 그는 임마누엘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리고 성령님이 강력히 자기를 붙잡고 역사하는 걸 체험한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들어갈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다가 차라리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훨씬 좋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자기가 죽지 않고 석방된다면 그 석방되는 것은 너희를 위해서 유익하다는 거야. 왜 유익해요? 사도 바울이 석방되면 사역을 할 거 아니겠습니까? 빌립보 성도를 위해서 사역하고 더 많은 사역을 또 감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는 것의 유익은 그것 때문에 유익하다는 거예요.
우리 24절에서 2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의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라.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 사도 바울은 지금 내가 살면 성도들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걸 더 원하지만 이런 유익이 있기 때문에 내가 둘 사이에 끼어서 지금 어느 것을 택할런지 모르겠다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창세기 3, 6, 11장의 본성으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전혀 불가능하죠. 그렇죠? 지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열망했기 때문에 그 성령께서 그런 감동과 영감과 충만함을 주신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죽음이라는 부분이 사실 육신의 본성으로 본성에는 가장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여러분, 죽음의 영이 확 잡히면 굉장히 두렵습니다. 근데 지금 바울은 그게 극복되고 초월되고 있는 겁니다. 빌립보 교인의 유익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JOY의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고 있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고 있고 그리고 다음이 자기예요. 이 빌립보서에서는 몇 번의 최고의 고백이 나와요. 죽음과 상관해서 최고의 고백이 나오는데 전부 다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말로 말을 맺고 있어요. 여러분 앞으로 이 빌립보서에서 어떤 최고의 고백을 하는지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오늘 본문의 내용이에요.
2. 여러분은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1) 바울처럼 매사에 그리스도로 사는 법을 배우면 가능하다.
종교인은 사단의 함정에 빠졌고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이 영적 문제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사실 종교인들이 원죄를 모르잖아요. 하나님 떠나서 영이 죽어서 지금 우리가 이성은 멀쩡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늘의 계시를 못 받는 이성이에요. 영이 살아서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를 못 받는 이성이란 말이에요. 영이 죽은 이성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종교인으로 만약에 우리가 행세를 하게 된다면 사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전혀 이런 삶이 불가능해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게 아니고 종교인들은 3,6,11장의 본성과 체질을 가지고 종교적인 규례와 그 윤리와 의식을 지키려고 자기가 애쓰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려고 애쓰고 절제하려고 애쓰는 그런 거 할 수 있잖아요. 종교인이 자기 본성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처럼 성령님을 힘 있는 삶이 아니고, 자기가 그 종교에 헌신하기 위해서 애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진짜 무거운 짐을, 종교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거죠. 지금 말하는 것은 그런 삶이 아니라는 거예요. 신앙생활은요.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전에는 극복 안 되던 수많은 삶이 극복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이 과거에 얼마나 많이 눌려 있었고 얼마나 많이 불안했었고 얼마나 그러니까 자기 동기에 잡혔고 그러니까 자기가 얼마나 안간힘 쓰던 그런 인생의 체질들이었어요. 근데 그게요. 뿌리부터 치유 회복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인간관계 하는데 참아야지, 이해해야지, 노력해야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요. 성령님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게 만들고 주님의 마음을, 마음에서 느끼게 만드시는 거예요. 내가 사랑이 안 되는데 주님은 내 육신의 본성으로는 사랑이 안 된다는 걸 인정하고 고백하게 만들고 성령님이 임재 통치하니까 이제 주님의 눈으로 봐지고 주님의 마음으로 느껴지게 만드시는 거예요. 예전에 한 번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쉽고 편안한 삶이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무겁다고 말하지 아니하시거든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율법 자체는 무거워요.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하는 삶은 쉬운 삶이에요. 내 힘으로 사는 삶이 아니에요. 이 삶을 누리게 되면 관점이 바뀌어진다니까요. 여러분이 어떤 어떻게 이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바울처럼 매사에 그리스도로 사는 법을 배우면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사단의 함정과 체질에서 계속 빠져나오는 것과 일치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려면 목사님처럼 살아야 되는데 내가 세상에서 일도 해야 되고 내가 얼마나 바쁜데 내가 맨날 그리스도께만 집중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근데 그게 놀라운 게 그리스도가 내 몸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성령으로 임재해 계셔요. 그래서 일상 생활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일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직장 일하지 말고 돈 벌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재 통치하는 법을 배우라는 거예요. 기도로 모든 삶을 처리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삶을 날마다 발전시킬 수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여기 예배 시간에 여러분이 깨닫는 건 깨닫는 은혜고요. 실제 문제가 딱 들어왔을 때 성령님이 임재에 통치하시는 역량이 어떤가가 그게 이제 중요한 거예요. 그게 발전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문제가 딱 오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깊은 통치를 더 배울 수 있는 기회예요.
그동안 16차 집중 훈련을 그냥 한 게 아닙니다. 매번 성령님의 통치 인도 역사를 받는 체질을 기르기 위한 16차 집중 훈련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10일 기도회를 했던 거예요. 이 체질이 되면은요. 그리스도께 너무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고백이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나니 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통치인 성령으로 사는 법을 배우면 정말로 결국 주객과 체질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이 된다니까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나를 붙잡고 사시는 삶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영의 생각으로 살아요. 이제 그래서 JOY의 삶이 가능해진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777의 삶과 분리되는 삶이에요. 동떨어지는 삶이에요. 아니요. 777의 삶의 첫째가 뭐예요? 성삼위 하나님이 아닙니까? 보좌의 축복 아닙니까? 그렇죠? 7 여정에서도 첫 번째가 성삼위 하나님이에요. 성삼위 하나님을 진짜로 누리는 법을 지금 내가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이론이 되지 말고 지식이 돼서는 안 돼요.
2)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인 성령으로 사는 법을 배우면 드디어 주객과 체질이 180도 전환된다.
여러분이 실제 성령으로 통치하셔서 영적 상태가 바뀌는 삶을 날마다 누리셔야 돼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 정말 일에 승리해요. 경제에 인간관계의 문제에 승리합니다. 그래서 전도의 증인이 됩니다. 내가 못 누리는 상태에서 못 빠져나온 상태에서 전도는 어렵습니다. 근데 내가 분명히 지금 경험을 한 거예요. 저 사람이 지금 환경 보고 낙심하고 있고 자기 수준 보고 낙심하고 있고 자기 과거에 묶여 있고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가 주인 되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통치하면 다 치유 회복돼 버려요. 맞아요 안 맞아요?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돼 있어요? 자기 경험한 거에 딱 묶여 있거든요.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 싫어서 상처받아서 계속 그 상처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항상 과거에 내가 자신 없이 살았어. 눌려 살았어. 불안했어. 그럼 내 경험 속에서 남는 건 내 인생은 항상 불안했어 그게 믿음이 돼버려요. 근데 여러분이 실제 성령님으로 통치하는 삶을 살게 되면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로 치유되고 회복되고 뒤집어진다니까요. 예수 믿는다는 건 이 삶을 우리가 맛보는 거예요.
3. 여러분이 하는 일에 승리하며 경제에, 인간관계에, 문제에, 전도에 증인 됩니다.
1) 오늘 바울의 고백이 너무 거리감이 있어 공감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 지금 영적 생활 안 되고 있고 여러분 육신 생활하고 있으면 오늘 이 말씀은 진짜로 너무너무 고단수라서 이거 너무 거리감이 있는 얘기예요. 저도 예전에 그랬어요. 이 빌립보서를 많이 읽었거든요. 근데 이 말씀이 진짜 해석이 되거나 공감이 안 되는 거예요. 저한테 저 신학교 때 이거 공감 안 됐어요. 무슨 말이지 이게 알 듯 말 듯한데 내가 체험이 안 되다 보니까 어려운 말이에요. 저는 사실 예전에 영적 상태가 자주 눌렸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 형상이가 봐라. 아빠가 그랬으니까 내가 그렇지. 이런 얘기하거든요. 아빠도 염려 체질이었다며? 그래 나 염려 체질이었어. 저는 기도가 잘 안 될 때가 참 많았어요. 솔직히 그 기도가 안 됐는데 사실은 힘 빼고 내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님은 모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임재 통치할 수 있습니다 고백하였으면 됩니다. 그냥 믿으면 되는데 기도 잘 되기 위해서 힘을 팍 쓰는 거예요. 온갖 힘을 다 쓰는 거예요. 기도 잘 되기 위해서 아직 터득을 못했기 때문에 내 힘을 넣었던 거에요. 지금 기도 잘 되기 위해서 저는 힘을 넣지 않아요. 내 문제가 영적 문제라는 것을 다락방 들어와서 알게 된 겁니다. 그전까지는 열심히 신앙이었어요. 근데 영적 문제는 열심으로 해결이 안 돼요. 사단이 이미 빠뜨려 놓은 함정과 그 체질 속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하기를 원해요. 그리고 자꾸 사단은요. 우리를요. 눌러서 우리가 영적으로 기도 못하게 만들어서 예전에 빠져있었던 그 육신의 체질로 자꾸 빠지게 만들길 원해요.
영적 문제가 심한 집안의 사람은요. 더 눌려요. 여러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눌려요. 영적 문제가 심한 가문은요. 이해하셔야 돼요. 저는 이런 영적 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고 그 다 이루신 분이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셨구나 이게 이제 확실히 믿어졌어요. 그렇다면은 이 싸움은 내 싸움이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기도가 “사단아 고맙다” 하는 기도를 배우게 됐어요. 사실 그런 영적인 고민과 실랑이를 하다가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거죠. 그냥 제가 이렇게 설명한다고 이게 그대로 적용되지도 않아요. 여러분에게도 성령님이 그게 딱 와닿게 만들어야 되거든요. “사단아 니가 나를 기도가 안 되게 만들고 나를 누르는데 좋다. 누를수록 고맙다. 누를수록 내 힘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옛날에 내 힘으로 기도하려고 그랬거든요. “내 힘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니가 누를수록 너의 머리를 깨뜨리신 그리스도를 나는 믿고 의지한다. 너는 그리스도 앞에 절대로 패배하고 절대로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내 안에 지금 주인이시다. 나는 니가 그럴수록 나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내 힘으로 신앙 생활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요. 이 시간 성령으로 임재 통치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 기도를 다섯 번도 하고 6번도 하고 7번도 하는 거예요. 근데 그러는데 놀랍게 기도가 탁 뚫리는 거야. 그 고백을 사단도 듣고 있고 예수님도 듣고 있어요. 예수님이 듣고 성령으로 내게 임재하는 순간에 기도가 딱 풀리는 거에요.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다 그 자리로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속는 게 뭐냐 하면 내 느낌이에요. 눌리니까 느낌이안 좋아요. 압박감을 느끼면서 무기력도 오고 연약함도 막 오잖아요. 불안도 막 와요. 그러니까 나는 너무 믿음이 없다는 느낌이 또 와 내가 이거 해도 기도가 안 될 거라는 느낌이 와. 이게 다 속는 거예요. 이때 느낌을 의지하지 말라고 그랬죠. 나는 얼마든지 그런 느낌이 올 수 있어요. 복음의 진리의 사실을 고백해야 돼요.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무기력하더라도 복음의 진리의 사실을 바로 고백하면은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어요. 여러분이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기도의 삶이 아침 점심 밤으로 되는 이 삶이 되셔야지 여러분이 신앙생활의 맛을 느끼게 돼요. 리듬을 타게 돼요. 안 그러면 여러분의 생각은 전부 다 인본주의 이성에 의한 계산으로 들어가요.
2) 내 문제가 영적 문제라는 것을 진짜 안다면 그리스도가 오직이 되면 돼요.
성령님이 오직이 되면 돼요. 기도가 오직이 되면 돼요. 주님이 성령으로 행하신다는 것이 믿어질수록 어떻게 됩니까? 내 힘은 빼게 돼요. 믿어지면 힘 빼요. 여러분이 안 믿으니까 여러분이 직장 생활하려고 힘 넣어서 하고 있어요. 지금 직장생활에서 잘리면 안 되니까, 성과 못 내면 안 되니까, 그 성과 내기 위해서 얼마나 여러분이 애를 쓰고 있는지 몰라요. 그 삶이 아니라니까요. 그건 인본주의 체질이에요. 그렇게 힘드니까 그렇게 애쓰는 인생을 살면 힘들잖아요. 그 집에 와서는 쉬어야 돼. 기도가 뭐고 없이 쉬어야 돼. 쉬는 게 이제 여러분이 좋아하는 프로를 봐야 돼. 더 먹는 걸 추구하고 여행을 추구해야 돼요. 그게 쉬는 거예요. 근데 그것 가지고 영적인 힘을 얻지는 못해요. 제가 옛날에 많이 그랬어요. 옛날에 열심 체질로 막 밖에서 사역하잖아요. 집에 와서는 내가 오늘 이만큼 애쓰고 노력했으니까 오늘 저녁에는 쉬어야 돼. 내가 이 정도 TV 보고 이 정도 내가 눈 요기하고 이 정도 재미 보는 거는 보상이야 이런 생각들을 했었어요. 근데 또 보고 있으면 또 영적으로 흐려지고 컬컬해져요. 근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바뀌었냐 하면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게 최고의 행복이야. 계속 그렇게 살고 싶은 거에요.
왜 오늘 이런 얘기를 합니까? 이렇게 사는 삶이 이 정도가 아니라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와 성령의 계시와 영광과 체험이 있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에요. 사도 바울이 현장이 영적인 눈으로 보이는 거예요. 우리 육신의 본성으로 힘들고 고되고 죽는 거 누가 좋아합니까? 죽으면 완전히 공포가 있는데 근데 성령님이 계시와 감동과 충만함을 주셔서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 내가 이 전도하다가 나도 고난 당하다가 죽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모범을 나는 따르고 싶다 이런 마음을 성령님이 주시는 거에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그냥 하지 마시고 진짜 이런 삶을 체험하는지를 점검하시고요. 그래서 여러분의 주인이 갈라디아 2장 20절로 바뀌는지를 점검하시기를 바래요. 갈라디아 2장 20절이 안 되는 대부분 사람은 자기가 너무 세서 항상 자기에 걸려요. 내가 제가 그 말 많이 하잖아요. 기분 나빠 걸리고, 누가 무슨 말했기 때문에 걸리고, 내가 돈 손실 봤기 때문에 걸리고 그렇게 되면은요. 두 종류의 일꾼이 있는데 투기와 분쟁으로 자기 험담하고 그러는 사람들을 용납 못하죠. 내가 참아도 속에서 “에이 씨~” 하지요. 근데 지금 사도 바울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니까요. 성령님이 이걸 완전히 극복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결론
오늘 결론입니다. 두 사이에 낀 바울 사도입니다. 왜 이런 고백을 했는지 오늘 잘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잡을 말씀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게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고백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믿음과 의탁과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해마다 달라집니다. 왜 이게 안 달라지냐 하면 현실의 삶이 이제 녹록지 못하니까 현실 문제와 현실의 삶에서 좀 더 내가 편안해지고 내가 좀 더 성공하고 이 현실에 목적을 두고 있으면은요. 현실에 의한 신앙생활이 돼요.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너무너무 편하잖아요. 그러면 더 열심히 하나님 찾을 이유가 없어져요. 이해되십니까? 광야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매달려야 되잖아요. 근데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니가 짓지 않은 집을 주시며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어. 그러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려요. 정말 여러분이 영적인 문제에 빠져있는 세상을 보게 되고, 여기서 빠져나와서 사명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이 육신에 안주하는 삶을 사는 게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100% 주인 되어져서 주객과 체질이 바뀌어져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인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쪼록 아멘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