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3일 주일예배 - 그리스도인의 부부 관계(엡 5:19~33)
그리스도인의 부부 관계(엡 5:19~33)
오늘은 부부 관계에 관한 원론적인 말씀을 좀 드리고자 합니다. 대학에 제가 많이 가잖아요. 대학에 가면 커플이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종종 봐요. 거리에서도 애인끼리 걸어가는 모습을 보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 연애하는 처녀, 총각 모습은 결혼한 부부와 달라요. 연애하는 처녀, 총각들은 서로 호기심을 가지고 굉장히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줘요. 조심도 하고 설레기도 하죠. 반면에 중년 부부들은 긴장과 조심스러움이 싹 없어지죠. 편한 대로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부냐, 부부가 아니냐는 그냥 아무런 긴장도 안 하고 대화하는 사이는 부부고, 중년이라도 뭔가 조심하고 있고 눈치 보고 있는 건 부부가 아니에요. 불륜이에요. 사실 보면 남자들이 결혼해서 집에서는 마음대로 행하는데 밖에서는 그렇게 안 해요. 밖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있기 때문에 조심해요. 조심하고 에티켓도 지키고 그렇게 하는데, 집에 와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거든요. 그게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더라는 말을 오히려 악용하는 거예요. 왜 그래요? 너는 이제 내 거니까, 너는 내 아내니까 함부로 하는 거에요.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다. 라는 말은 진짜 좋은 말이거든요. 진짜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해 줄 수 있는 관계를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죄성을 가지고 이용한다니까요. 내가 함부로 하는데도 부끄럽지 않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부 간에 갈등과 고통을 겪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함부로 해서 그래요.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부부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하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 받으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술 취하는 것은 육체화되는 전형적인 모습인데 술 취하면 되게 함부로 해요. 완전히 자기중심적으로 들어가는 게 술 취하는 사람의 특징 아닙니까? 자기 기분대로 막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성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그냥 술기운으로 막 함부로 해버리잖아요. 반면에 성령 충만은 영적 생활에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에요. 19절에 또 이런 말씀이 연결돼 있어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거는 성령 충만해서 나오는 영적인 노래와 진정한 찬송을 부르라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20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래요. 우리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신분과 권세를 얻었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 그리스도를 경외하면서 피차 복종하라 이게 이제 대원리예요. 그것을 적용해야 할 첫 번째 관계가 부부 관계라는 거예요.
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여러분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건 그분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이런 걸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 가지고 피차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돼요. 무조건 아내가 남편한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한테 복종하라 그런 의미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남편과 아내에게 주신 도리의 말씀이 있거든요. 그거를 복종하라는 거예요. 그게 피차 복종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계명을 주님께로 받았잖아요. 그래서 관계할 때 상대방의 조건에 따라 인간관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세상에서는 어떻게 관계합니까?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면 나도 좋게 대하고, 저 사람이 싫은 사람, 해를 주는 사람 같으면 나도 그 사람한테 그가 한 것만큼 해줄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그런 원리가 아닌 거예요. 철저히 그리스도가 주인 되어서 살라는 거예요. 우리를 피로 사신 주님이 지금 내 안에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경외해서, 공경하므로 그 말씀을 따라 서로 상대에게 대하라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행한 행위에 대해서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주님께 상벌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남편이 악했기 때문에 나도 악했다. 이렇게 들어가면 틀린 거예요. 이것은 상대의 신분이나 지위나 계급에 따라서 처신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좀 높은 사람 같으면 조심하고 잘 보이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상대방이 좀 무시되고 좀 천한 사람 같으면 함부로 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불신자는 100% 자기가 주인이고 나 중심으로 행동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신자한테는 오늘 말씀이 전혀 해당하지 않는 말씀이에요. 이거는 신자한테만 해당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부부 관계만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도 주종 관계에서도 다 적용돼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또는 공경함으로 서로 해야 할 도리를 행하라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이제 놓치고 있는 것이 뭡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만 의식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의식 못 하고 그냥 본성대로 행할 때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저 사람이 그랬기 때문에 나도 그랬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고요. 우리는 내 본성대로 행하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지 않는 거예요. 주님은 상대가 그럴지라도 너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주께 하듯 하라 하는 말씀도 굉장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남편이 기분 나쁘다고 우리 본성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할 것은 각자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행한 대로 보상을 받기 때문에, 우리를 주님이 피로 사셔서 주인이고 내 안에 지금 주인 되어서 그 뜻을 행하도록 하기에, 주께 하듯 행하라는 거예요.
2. 아내에게 주는 권면(22~24)
1)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 시대 상황을 좀 이해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지금 남편의 권위보다는 훨씬 권위가 센 시대였어요. 이때가 주후 60년대 에요.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잖아요. 사도바울이 몇 년도에 죽었는지 아십니까? 주후 67년경에 죽었다는 게 많은 학설이에요. 그런 시대에 바울이 현장 메시지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로마 사회에서 남편은 아내, 자녀, 노예에 대해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어요. 여자는 자주권이 없었던 시대예요. 이때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에게 예속됩니까? 여자들은 아버지한테 예속이 돼요. 자기 권한이 없고 아버지가 중요한 결정을 해요. 결혼한 다음에는 그 권한이 누구한테 있을까요? 남편한테 있었던 시대예요. 그러니까 아내들이 참 불쌍했던 시대죠. 자주권을 가지지 못했던 시대다 이 말이에요. 이런 시대에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예요.
이런 시대에 바울은 23~24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23~24절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이것은 질서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여기서 왜 갑자기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가지고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설명하는 걸까요? 유일하게 완전 연합의 관계가 부부 관계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예요. 근데 지금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모델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주께 하듯이 하라는 거예요. 아내들이 좀 불만스러울 수도 있죠. 근데 남편들한테는 다음에 훨씬 더 강력하게 얘기합니다. 로마 시대에는 남편의 권위 때문에 자의든 억지로 복종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어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뭐예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그리스도께 행하듯이 하라는 것이에요. 경외함으로 그분의 말씀에 복종해서 남편에게 행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남편 이전에 누구에게 복종하라는 거예요? 그리스도께 복종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상이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진짜 보상이 되고 배경이 되어 주겠다는 겁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모델로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부부 관계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래요.
2) 근데 문제는 남편이 그리스도가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남편이 죄성을 가지고 결격 사유가 많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의 본성은 복종할 마음이 없어요. 정말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남편들 많거든요. 문제 있는 남편들 많거든요. 그러면 우리 본성은 복종할 마음이 전혀 없어져요. 저거 딱 갖다 버려! 이런 생각이 우리 속에서 들죠. 특히 요즘 같은 남녀 평등 시대에는 복종하라는 말 자체가 거부됩니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지금 우리보고 복종하라고? 평등하지, 무슨 복종이야” 이런 시대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사실 상호 존중하면 제일 좋아요. 상호 존중하면 제일 좋은데 그게 안 돼서 문제예요. 만약에 상대방이 나에게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못 하고 있을 때라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 답이 아까 말한 것처럼 22절에 주께 하듯 하라는 거예요. 주께 한다면 우리는 악한 의도나 거짓이나 내 본성의 욕구대로 못해요. 선을 행하고 진실을 따라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게 되는 거예요. 주께 하듯 하려면 믿는 아내가 창 3장 보는 눈을 가지고 남편을 봐야 해요. 그리고 복음의 관점으로 남편을 봐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 사람이 죄성에 잡혀 있을 수밖에 없고 저런 나쁜 습관과 체질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영적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죠. 이게 안 되면 여러분이 승리 못 하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요. 나도 똑같은 인생인데 나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구나.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의 진정한 위로자요. 상담자요.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요. 그리스도십니다. 이 고백이 아내에게 돼야 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야 해요. “내가 너를 이 가정에 세웠다. 너는 혹 니가 결혼 실수해서 불신 남편을 만났을지라도 너에 대한 절대 계획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거예요. 너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가정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이게 복음의 눈이죠. 그러면서 오늘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남편에게 내게 하듯이 해라. 사실 본성은 너무 싫은 거예요. 저렇게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내 본성 같으면 절대로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 못 하잖아요. 그런데 성령님이 주시는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갖게 만드십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오늘 이 말씀의 의도는 상대의 됨됨이와 상관없이 말씀 따라 하라는 거예요. 이게 사실 포인트입니다. 그러면 각 사람이 그 행위에 따라 하나님이 상급을 주셔요. 그래서 사실은 우리를 세상에 하나님 배경 가진 빛으로, 소금으로 세우신 거예요.
벧전 3장 1~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으로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에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기서 이제 아내가 해야 할 내용의 핵심은 남편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4절에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 했는데 숨은 사람은 뭐예요? 영의 사람이에요. 우리의 영적 상태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에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그랬는데 여러분 심령이 언제 안정이 돼요? 기도할 때 안정이 되잖아요. 영적 생활이 잘될 때 여러분 심령이 안정감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때는 짜증이나 답답함이나 이런 게 없어지잖아요.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잖아요. 그 심령으로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7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오.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가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하니라.”왜 기도가 막혀요? 아내한테 함부로 하면 왜 기도가 막힐까요? 성령님이 근심하고 소멸되고 성령님과 안 맞기 때문에 그런 거죠. 여기서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랬는데 지식은 무슨 지식일까요? 영적인 지식, 구원의 지식, 여자인 아내에 대한 지식도 포함되는 거예요. 지식을 따라 행하라는 거예요.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래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라는 거예요. 연약한데 같이 생명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예요. 놀랍게 이 연합의 비밀 가운데로 맺어준 사람이 아내에요. 지금 남편한테 하는 얘기죠.
3. 남편에게 주는 권면(25~29)
1) 첫째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하라”고 한다.
26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흥미 없게 하려 하심이라”주님이 교회에 자기 생명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보다 이건 더 센 것을 요구하고 있거든요. 아내는 그냥 복종하라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생명을 주신 것처럼 하라는 거예요. 남편이 훨씬 더 무거운 거예요. 그리고 26절에 “그리스도가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하라” 그랬는데 물로 씻는다는 건 뭐예요? 십자가로 죗값을 씻기신 거죠. 그리고 말씀으로 깨끗이 하사 거룩하게 하심처럼 그랬는데 이거는 예수님이 대속 사업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셔서 말씀이 믿어지게 하고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역함으로 거룩하게 되는 거잖아요. 성화 되잖아요. 이게 예수님 사역인데 남편들이 아내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27절에 보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신다는 말씀이 있잖아요. 이게 목적인데 마찬가지로 아내가 정말로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이 거룩하게 세워지는 그 일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이런 삶을 살아라 는 거예요. 사실은 최고의 희생과 사랑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남편들은 본받으라는 거예요. 사실 세상에 이런 남편은 있을 수가 없죠. 예수님은 죄성이 없는데 남편들은 죄성이 충만해 갖고 사실 이거 할 사람은 없어요. 없는데 구원받았으면 남편 속에 성령님이 이 삶의 원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2) 그리고 남편이 해야 할 것 둘째가 28절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알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두 번째 남편이 해야 할 일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거예요.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라”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사실은 원리상으로는 부부가 자기죠. 그래서 서로 자기라고 그러잖아요. 이게 연합 관계죠. 한 몸이죠.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몸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두 번째 명령입니다. 이거는 당시 남편이 군림하고 있었던 로마 시대 상황에서 가히 혁명적인 사상이에요. 맞죠? 기독교 혁명이에요. 혁명! 이게 하나님이 주신 원래 원리예요. 에덴동산에서 주신 원리예요. 여러분 만약에 남편도 말씀대로 살고, 아내도 말씀대로 살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천국같이 돼요. 원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이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 나라 세우게 만드신 거예요. 그 하나님 나라 세우는 가장 최초 기본 단위가 부부 관계예요. 가정이에요. 그리고 사회에요. 그런데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가 들어오면서 부부 관계도 깨지고 가정도 깨지고 사회관계도 깨지고 하나님 나라가 몽땅 깨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남편들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첫째 영적 생활 돼야 해요. 영적 생활을 할 때 아내와 트러블이 있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거든요. 너 때문에 저 아내가 저렇게 고통당한다. 남편한테 주는 메시지를 성령께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주신다고요. 그거 깨닫게 하시는 기회예요. 사실 부부 관계만큼 나 중심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방법이 없어요. 남 같은 경우는 떨어지면 돼요. 안 붙어살거든요. 안 보면 돼요. 근데 부부 관계는 미우나 고우나 봐야 되잖아요. 한 이불 덮고 자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우리를 깎아내고 고치는 가장 하나님의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그게 부부 관계입니다. 근데 깎여야 하는데 안 깎이고, 서로 치고받고 계속 찌르고 있으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단이 승리하는 거죠. 남편이 절대적으로 영적 생활에 깊게 들어가야 해요.
그리고 남편에게 제가 드리는 두 번째 권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그 핵심 내용을 암송하기 바래요. 까먹고 있으면 안 되고 이거 한 번씩 기도해서 리마인드 시켜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이 여기에 부합되는 삶을 살지, 안 그러면 여태까지 살아온 관습이 이미 체질이 돼서 부부 관계가 발전이 없어요. 사실 말씀에 인도받지 못하는 불신자 쪽에서는 안 바뀌어요. 만약에 아내가 신자라면 아내를 계속 바꿔요. 남편이 신자라면 남편을 계속 건드린다고요. 그런데 말씀이 성령으로 심령에 부닥쳐질 때 작업이 돼요. 머리로 알고 있는 것 가지고는 안 돼요. 그래서 나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드셔요. “저 남편 때문에 나는 평생 조졌어. 난 저 남편 때문에 나는 완전히 망했어. 저 남편이 원수야.” 그건 틀린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그리스도 앞에서 오늘 상급이 있어요. 여러분이 악인을 만났어도 마찬가지예요. 이거는 부부 관계만 아니에요. 악인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같이 악해졌다. 이거는 세상 원리예요. 여러분 안에 지금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고 여러분을 성전 삼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기본 원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듯이 피차 복종하라는 겁니다. 피차 말씀의 도리대로 살라는 겁니다. “저 사람이 그렇게 안 사는데 내가 왜 살아”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그렇지만 그건 불신자 논리예요. 저 사람이 나한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복수하리라. 진짜 불신자 논리예요. 여러분 빨리 여러분 상처받은 거 있으면 치유 받아야 해요. 여러분 그 상처는 마귀가 집 짓는 상처예요. 주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였는지 정말 자기를 알고, 주님이 나 같은 자를 구원하셔서 영벌에서 영생으로 바꾸시고 나를 생명처럼 사랑하셔서 지금도 세밀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여러분 마음에 와닿으면서 내가 원수 갚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녹여버리신다고요.
결론
오늘 이게 원론적인 말씀이에요. 수요 예배 때 좀 실제적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수요 예배 때 제가 얼마만큼 결혼 생활에서 하나님이 만지시는지 그런 얘기도 좀 할 거예요. 6장 31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한 몸이 된다는 거죠. 32~33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알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에베소서의 이 부부 메시지가 제대로 먹혀들어가는 적이 별로 없어요. 항상 이 메시지 듣고 왜 당신은 이대로 안 해, 항상 그래요. 이 메시지를 자기에게 적용 안 하고 항상 반대쪽을 지적해요. 이거 지금 피차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는 거거든요. 상대방이 안 했으면 그렇다고 여러분이 안 할 권리가 없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창조 시 부부 관계는 완전한 연합 관계고 사랑의 관계였고 질서의 관계였어요. 질서는 있어요.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거는 질서상의 말씀으로 하는 거죠. 지금 이 관계가 무너졌는데 하나님은 다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가지고 재설명하는 거예요.
이 연합 관계가 창세기 3장 때문에 완전히 깨졌거든요. 나 중심의 두 남녀가 만나게 되는데 결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갈등과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많이 벌어져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가 주인 된 인생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이 사단의 함정에 빠져서 내 욕구대로 살아왔고 3, 6, 11장의 본성대로 살아왔고, 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사랑이 안 되는구나 이런 걸 발견하게 되어요. 자신을 재발견해야 할 관계가 부부 관계예요. 그래서 가장 치유 받아야 할 하나님의 조합이 부부 관계예요.
고대에서는 남편이 절대 권위를 가지고 지배했고 아내들은 종속된 삶을 살았어요. 근데 근대에 와서 서구에서 기독교 부부 윤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개혁주의자들이 한 거거든요. 그리고 이 불신자 사회도 시민사회가 발전함으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이루어지게 되고 사회 참여가 늘어나게 돼요. 제도적 발전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남녀 평등 사회가 된 거거든요. 만약에 옛날에 태어났으면 여자들은 진짜 힘든 시대를 사는 거죠. 그런데 이게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지금 남녀 평등 사회가 되어졌어요. 제도는 지금 많이 발전했잖아요. 법적으로 지금 상당히 기본권과 평등권 이런 것들이 보장받잖아요. 그러나 영적 문제와 죄의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왜 오늘 바울이 제도를 고치라 는 메시지는 하나도 없거든요. 왜 그럴까요?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도를 바꾸어도 영적인 문제와 죄의 문제는 해결 안 되거든요. 영적인 문제와 죄의 문제가 문제이기 때문에 제도는 발전되어도 사단의 나라가 된 거잖아요. 온 세상이 지금 흑암에 잡힌 거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도를 고치기 위해서 온 게 아니고 사람을 바꾸면 제도가 고쳐져 요. 순서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전 세계 불륜률이 있어요. 미국 7위 39%, 결혼한 상태에서 불륜을 39%를 저지른다는 거예요. 벨기에 6위 40%로, 노르웨이 41%, 프랑스 43%, 독일 이탈리아 45%, 덴마크 2위 46%, 덴마크가 행복지수 1, 2위 되는 나라거든요. 근데 저렇게 자유롭게 살기 때문에 행복한가 봐요. 태국은 1위 51%인데 이 나라 연구 대상입니다. 이 나라가 불교 나라에요. 완전 불교 나라거든요. 평생 스님 한 번 돼야 하는 나라예요. 그런데 완전 도덕적 타락한 나라에요. 에이즈 제일 많은 나라거든요. 사단이 이 짓을 하는 거예요. 지금 결혼해 놓고도 마음대로 사는 판이 된 거예요. 한국과 일본도 불륜률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와 하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고 깨진 거는 오래전이에요. 근데 우리는 전혀 거기에 대한 의식을 별로 안 하고 살거든요. 현실 감각으로 살죠. 유행 따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감각, 말씀 감각이 싹 회복이 돼야 해요. 여러분이 구원받은 이 은혜가 얼마나 크고, 주님은 끝까지 언약으로 여러분을 최고 자녀의 형상으로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면 문제를 다 선용해 버려요. 굉장히 상처 있었던 사람이 상처가 치유되고 깊은 사랑, 깊은 은혜의 사람으로 바뀌게 만들어요. 상처를 치유 받고 상처 있는 사람을 도울 만한 사람으로 바뀌게 만들어요. 그게 그리스도의 능력이에요.
오늘 말씀은 결혼 전 청년들에게도 필요한 말씀입니다. 정말 청년들 성경적 부부 원리를 배우고요. 믿음의 배필을 놓고 반드시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짝이 있어요. 분명히요. 그 짝을 만나서 결혼하는 청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혼자 되신 분도 계시고 그런데 여러분의 자녀들한테 이 원리 가르쳐야 해요. 자녀들한테 여러분이 승리하는 모델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