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일 주일예배 - 승리자의 마지막 고백(딤후 4:6~8)
승리자의 마지막 고백(딤후 4:6~8)
낙심되거나 염려되는 것이 실제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내 영적 상태 때문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적 상태를 회복시키는 언약 안에서 기도가 중요한 겁니다. 다니엘 같은 경우에는 “30일 동안 아무 신에게도 절하지 말라.” 절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 하는 왕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편안하게 기도하는 거예요. 이거는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건 다니엘의 영적 상태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영적 상태에 따라서 환경이 문제가 안 될 수 있고 영적 상태에 따라서 조그만 문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답답하고 짜증 나는 상태에 있잖아요. “내가 답답한데 왜 네가 날 답답하게 하냐?” 이렇게 우리가 얘기하잖아요. 근데 하나님은 상대를 고치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너를 고치라고 네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네 안에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떤 원망이나 짜증날 때 빨리 영적 상태부터 바꾸면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문제 올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더 의지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의 한계에 빠지지 않고 “주님은 이 문제의 주인이고 해결자시고 이 문제를 해결할 모든 능력이 있습니다” 라고 고백할 기회입니다. 그게 그리스도께 뿌리내리는 거죠. 결국 어떤 싸움이냐 하면 내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하냐, 아니면 내 안에 성령님으로 반응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돈에 대해서, 문제에 대해서 내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하느냐 아니면 내 안에 성령으로 또는 그리스도로 반응하느냐 이 싸움입니다. 어제 다락방 하면서 처음으로 직장 취업된 친구인데 20명이라는 조직 생활에 부담이 탁 오더래요. “내가 여기에 잘 적응해서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래요. 그런데 주님의 그 마음을 건드시기를 “이게 왜 니 일이냐? 니가 이 회사에 적응하고 이 회사에서 승리하도록 하는 일이 내 관심이고 내 일이 아니냐” 이런 마음이 들더래요. 이 친구가 기도하기 전까지는 내가 회사를 잘 다닐까 고민했는데 기도가 딱 되니까 마음이 풀리는 겁니다. 편안해지는 겁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소원의 방향을 맞추고 이 회사에 들어갔는데 그렇다면 주님이 인간관계 잘 감당하고, 문제 잘 감당하고, 이 현장에서 승리하고 빛을 비추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거 아니냐?”처음 직장 들어갈 때부터 이렇게 믿음의 시작을 하게 되면 이런 친구는 계속 믿음이 자라납니다.
우리가 사람을 육신의 관점이 아닌 성령의 관점으로 봐야 해요. 교인을 볼 때도 숫자로 보지 말고 각 사람의 영적 상태가 세워져 있는지를 보라 이 말이에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만큼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그래서 그 인생이 어떻게 전환되고 있는지, 어떻게 치유 회복되고 승리하는지, 어떻게 증인 되는지 그런 관점으로 보라. 이 말입니다. 숫자로 보는 것은 사람의 관점이고 각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회복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주님의 관점입니다. 인간은 환경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에요. 그게 맞다면 믿음의 사람들도 다 무너졌었어야 해요.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안 좋은데 환경이 맞물렸기 때문에 그래요. 그럴 때 무너지고 밀리는 거거든요. 그리고 상처받았다고 얘기하거든. 여러분이 이런 사실을 보는 눈이 바로 열리게 되면 믿음이 성장하게 되고 참된 전도자로, 제자로 세워지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1. 참된 전도자의 눈과 자세가 뭐겠습니까?
1) 우리는 남을 고쳐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무슨 잘못한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냐면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저 말을 해서, 저거 고쳐줘야 하는데... 내가 세게 얘기하면 고쳐질 거야. 정말 알아듣게 내가 확실하게 가르쳐 줘야 해.” 우리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을 책망하면 고쳐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영적 문제가 본성화, 체질화, 습관화돼 있어요. 사고가 이미 뇌에 각인 뿌리 체질 됐다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설명하면 알아듣기는 하지만 깊게 내재화돼 있고 이미 습성화돼 있고 체질화된 게 안 고쳐지는 거예요. 그 체질을 고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합니까? 그 사람의 영부터 살아나야 돼요. 그리고 영적 상태가 회복되면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와닿고 역사하게 돼요. 그럴 때 마음의 상태, 생각 상태, 행동 상태 다 바꾸게 돼요. 그게 우리가 사람을 도와주는 방법이에요.
내가 상대의 영적인 상태를 보는 안목이 없고 내가 답답해서 막 소리 질러버리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게 전혀 아닙니다. 오늘 점검을 좀 해보기 바랍니다. 사람의 영과 혼의 말씀이 들어가고 부닥치면 어떻게 됩니까? 인생이 바뀌어요. 사역자가 할 일은 초신자는 지금 말씀에 서 있지 않잖아요? 초신자나 연약한 신자들이 많단 말이에요. 아직 기도가 잘 안 되고 육신의 본성대로, 체질대로 살잖아요? 그런 신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도록 도와주는 게 사역자가 해야 할 일이에요. 주님은 “너 왜 그래? 너 그것도 못 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니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해라.”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율법은 인간의 행위를 요구해요. 책임을 요구해요. “니가 왜 안 고치냐? 안 고치면 니가 거기에 응당한 벌을 받게 돼” 그게 율법입니다. 겁주는 거죠. 근데 율법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안 바뀌어요. 율법은 오히려 죄가 드러나도록 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건 “니가 바르게 행하면 바르게 고치면 너를 축복해 줄게” 이게 율법이에요.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아요. 복음은 인간이 지금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너의 영적 문제와 죄의 문제와 습관성의 문제를 니가 스스로 해결 못 한다. 그래서 내가 죽어주었다.” 예수님이 이 얘기를 하시면서 “니가 결코 의인이 될 수 없고 네 행위 조건으로 네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서 대속물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너는 내가 너에게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과 보혜사 성령의 약속을 붙잡고, 그 언약을 붙잡고 기도해라.” 여러분이 이 구절 아시죠? 겔 36:26~27,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에게 주어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앞 절의 말씀은 “너희가 고토에서 돌아오게 만들고 너의 모든 더러운 것, 우상숭배의 죄를 내가 정결하게 할 거다.” 죄 사함에 대한 약속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새 영 너희에게 주고 새 마음을 주겠는데 내 영을 주어서 그 일을 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율례를 지키게 된다. 이게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새 언약이죠. 사단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양심을 이용해서 공격합니다. 오히려 정직한 사람들은 양심의 정죄를 더 많이 당해요. 사단은 그걸 이용해요. “하나님의 자녀인 네가 그렇게 살아서 돼? 너 계속 습관적인 죄를 짓잖아. 그렇게 교회 다닐 바에는 그만 다녀.” 이게 사단의 음성입니다. 이 사단은 하늘에서 성도를 참소하던 놈이었는데 하늘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왜요?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성됐으므로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가 없다는 얘기 아니죠.
우리가 사람들이 어떤 영적 문제에 빠졌는지를 바르게 알면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어요. 내가 어떤 영적 문제에 빠져서 이런 습관이 나오고 이런 행동이 나오는지를 내가 잘 모르면 나는 계속 거기에 빠져요. 이게 진짜 영적 문제가 뿌리가 되고 내가 창 3, 6, 11장에 빠졌고 그 속에서 계속 인본주의 체질로 살다 보니까 내 생각과 마음에 잘못된 각인, 뿌리, 체질이 형성됐구나! 이런 걸 알아야 해요. 이걸 알게 되면 사단을 꺾을 수 있고 우리의 영적 상태부터 회복시켜서 우리 인생을 뒤집으시는 그리스도만이 답이 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을 돕는 사역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계속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도록 도와주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그리스도께 뿌리내리도록 도와줘야 해요. 그냥 지적한다고 해서 고쳐지나요? 관계만 더 어려워져요. 그렇다고 뭐 무조건 “오냐, 오냐”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알아야 할 거는 한 사람의 드러난 문제는 배경을 갖고 있어요. 첫째가 창 3장의 근원적 배경이 있잖아요. 그리고 가문적 배경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그 가정 속에서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문제, 현실 문제를 겪으면서 형성되잖아요. 그게 성장 배경이에요. 이 세 가지 배경을 바르게 알고 사람 이해하는 것부터 우리가 바르게 해야 해요. 근데 전도 안 하고 다락방 안 하면 이런 관점을 못 배워요. 사역자의 관점을 가지고 사는 일이 별로 없어요. 솔직히 전부 나 중심의 관점을 갖는 거죠. 항상 내 기준, 내 동기에 잡혀있으니 다른 사람 볼 때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판단만 자꾸 하는 겁니다. “쟤는 참 못됐어.”“쟤는 안 되겠어!” 이게 복음의 관점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 가지 배경을 알고 그 사람이 영적 문제로부터 어떻게 그 가정이 형성됐고 그 사람이 어떤 성장 배경을 가지고 컸는지 알아야 해요. 그러면서 어떻게 생각이 묶이게 되었고 어떻게 인본주의 체질이 됐는지 이런 거를 우리는 통찰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끝까지 그리스도가 답이에요. 해답이고 해결책이에요. 그리스도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줘야 하는 겁니다. 그 인생을 뒤집을 수가 있고 치유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복음밖에 없어요. 복음만이 사람을 본질적으로 회복시키고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킨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네 힘으로 하지 말고 내게 의탁해라.” 사단은 그리스도만 의탁 못 하게 만드는 겁니다. 신자 한 사람이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고 의탁하는 언약 신앙이 되면 어떤 영적 문제도 체질도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그거 하는 아침, 낮, 밤 시간을 가지라는 거예요. 영적 상태 바꾸는 아침, 낮, 밤 시간을 가지라는 겁니다. 은혜가 있으면 사람을 받아내요. 훨씬 잘 받아내요. 은혜가 없으면 그냥 공격 들어오면 자기도 즉각적으로 공격 나가요.
그래서 사역자는 이걸 도와줘야 하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지, 왜 그리스도 아니면 안 되는지, 그리스도가 왜 완전한 해답인지를 알려주고, 그 사람이 자기 문제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그리스도께 뿌리내리는 체질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일이 사역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근데 사역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뭘까요? 자기 이해, 남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뿐만아니라 사역자가 자기 동기를 갖고 있어요. 돼야 한다는 동기를 갖고 있어요. 잘 안 되면 답답하죠. 좀 양육시키려고 그러는데 양육이 잘 안 돼. 그러면 답답해지잖아요. 동기 충돌이 일어나잖아요. 그럼 사역자가 힘을 잃어버려요.
2) 지금 모든 사람은 사단의 속임수와 욕심에 빠져서 선악의 기준이 왜곡되었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역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어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바르게 살아서 인정받는 사람들은 다 자기 의를 세우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의가 있어요. 내가 다른 사람 앞에 바르게 산다고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자기 의가 있어요. 자신이 하나님을 반역한 사단의 운명 속에 있다는 거는 모르고 있어요. 기준 자체가 인간 기준으로 바뀌어서 이성으로 다 판단하고 자기가 선악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판단자 자리에 다 앉아 있잖아요. 자기 의를 세우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치 않습니다. 자기 바벨탑을 쌓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있죠. 삶이 무너진 사람들이 있죠. 무너지면 직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인간 관계적으로 다 무너지게 돼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힘든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무너진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관리가 안 돼요. 일반적인 관리조차 잘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중독이나 타락이나 범죄에 빠질 가능성은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어요. 엘리트나 성공한 사람도 중독에 빠지거든요. 그러나 무너진 사람들이나 실패한 사람들은 여기에 더 빠질 확률이 많아요. 왜요? 자포자기하니까 그래요. 그래도 성공한 사람은 자기 관리가 잘 되고 있으니 잘 안 빠져요. 그러나 무너진 사람들은 세상 원망하고 가정 원망하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건강한 정체성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타락, 중독, 사회 범죄에 빠지기 쉬워요. “에이 망하면 망해버려라” 이런 식이니까요. 그래서 범죄를 저지르면 교도소 가야 하는 거죠. 사회 범죄를 일으키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 된다고 절망하면 자살하게 돼요.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도둑이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왔다고 돼 있어요. 한쪽은 무너질 바벨탑을 쌓으면서 자기 의를 치켜 세우는 거예요. 한쪽은 무너지고 실패하고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자기 관리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를 사랑치 않는데 남 사랑하겠어요? 딴 사람을 귀하게 여기겠어요? 살리겠어요? 근데 그 배후에 누가 있어요? 사단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 떠나게 해놓고 사탄은 속이고 도둑질하고 있는 거예요. 죽이고 멸망시키기를 원하는 거예요. 롬 3:10~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이게 지금 도덕 윤리적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고 영적으로 봐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선악의 기준점이 왜곡되어 지금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대적하는 그 관점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러면 의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 사람도 없어요. 세상은 나는 도덕가요 윤리가요, 나는 엘리트고 성공자라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 다 삐뚤어져 있어요. 의인이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 없어요. 지금 영적인 진리를 못 깨달아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위해서 찾는 자는 없어요. 하나님을 찾는다면 자기 필요를 위해서 찾는 거예요. 다 치우쳐서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여기서 선이란 하나님 기준의 선을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에 입각한 선을 얘기하는 거지, 하나님 떠나서 행하는 선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모든 사람이 창 3장의 운명 속에서 속고 도적질 당하고 파괴당하고 죽어 지옥 가는 운명 속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래서 전도가 뭐예요? “눈을 뜨게 하며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도록 하려 함이라” 그랬어요. 저와 여러분을 왜 부르셨어요? 우리를 치유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 되어서 주님의 손발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 거예요.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신 거예요. 주님은 세상을 보면서 탄식하시는 거예요.
우리 교회도 앞으로 중독자가 올 수 있어요. 중독자를 볼 때 영적으로 보는 눈이 없다면 못 감당해요. 그 사람이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하게 될 텐데 인간은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그걸 용납하고 사랑해 줄 수 있겠어요. 주님은 세상을 탄식한다고 그랬어요.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왔노라.”(막 1:38)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어요? 전도하러 오셨어요. “내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오. 구원하러 왔다” 이렇게 얘기하고 계셔요. 우리가 영적 사실을 실제로 안다면 우리도 주의 눈과 마음과 생각을 가질 수 있어요. 주님의 눈과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을 보면 전도자의 마인드를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중보 기도하며 개인 전도해서 그 사람을 키우고 재생산하는 제자로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의 선악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경우가 참 많았어요. 교회에서도 성도를 판단하며 때론 목사님을 판단하며 장로님을 판단하며 또 “권사님이 왜 그래”“렘넌트가 왜 저래” 이러기가 참 쉬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게 다 자기 동기 때문이고 자기 기준 때문이에요. 주님의 눈과 마음을 갖게 되고 살리는 능력이 있게 되면 바뀌게 돼요. 우리는 전도자로 살리는 자가 돼야지, 판단자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돼요.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하셔요. 우리도 심판당해야 하거든요. 우리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배경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삼위 하나님이 철저히 배경과 보장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너는 니 동기에 잡히지 말아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뒤를 봐주시니까 우리가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성령님이 믿어지게 하시니까 평안이 오는 거예요. 인생 회복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복음을 주셨어요.
지금 제가 3명의 학생 다락방을 지속하고 있어요. 한동대 1학년 이제 2학년 올라갔는데 이 친구가 말씀을 잘 이해하고 참 성실해요. 한 번도 다락방 안 빠지고 집에 가서도 줌으로 다락방하고 이러고 있어요. 근데 기도가 약하니까 레마의 말씀으로 받는게 약해요. 계속 기도를 강조하고 있어요. 나머지 두 친구는 하나는 한동대 졸업해서 취업해서 고백했다는 학생 있잖아요. 그 친구가 선교사님 아들이고, 또 하나는 공대 박사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이고 이 둘은 성숙했어요. 제가 이들에게 제자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애들한테 얘기하기를 “내가 너와 만나는 이유는 딴 거 없다. 네가 재생산하는 제자로 세워지는 게 목적이다.”그래서 이 친구들한테도 인간이 빠져 있는 영적 문제가 뭔지 알려주는 거예요. 왜 오직 그리스도 아니면 안 되는지 계속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체질을 바꿔야 하고 그러면서 자꾸 현장 보는 눈을 열어주는 그런 메시지를 하는 거예요. 현장 보는 눈이 열려 사명감이 딱 들어와야 제자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이 친구들은 자기 속에 있는 것들을 얘기해요. 저를 치유자고 훈련자로 여기고 있어요. 마음이 오픈돼서 자기 안 되는 부분도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제자 훈련이죠. 여러분, 제가 강단 메시지만 하고 여러분 내면 사정을 모르고 그 부분이 소통이 안 되면 제자 훈련 안 돼요. 못 만져줘요. 사실은 제자 훈련은 그런 소통의 관계가 돼야 한다는 거거든요. 참 어른들이 그게 안 돼요. 일단 목사님을 경계하고 부담을 가져요. 청년들은 자기 오픈을 하거든요. 잘못된 부분을 고백하고 고쳐나가면 그게 상당히 빠른 거거든요. 여러분은 진정한 전도 훈련과 제자 훈련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김수경 권사님 속에 있는 얘기 나한테 많이 하셔야 해요. “한 주간 이렇게 살았는데 내가 육신의 본성에서 이런 생각이 나왔고 근데 성령님이 그 부분을 이렇게 바꿔 주셨어요.”이런 부분이 나눠지면 진짜 소통되는 거죠.
2. 오늘 본문은 전도자의 마지막 고백이에요.
1) 6절에 보면 “떠날 시각이 가까이 왔다” 이렇게 얘기해요.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 이건 무슨 말이에요? 그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마치 제물처럼 드려지기를 사도 바울은 원했어요. 전제가 제사 마지막에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이제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1차 투옥 때와 상황이 다르다고 그랬어요. 중죄인 취급받는 상황이었어요. 학자들은 말하기를 네로 황제가 이때 통치했고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질렀어요. 그리고 그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뒤집어 씌웠어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수없이 잡혀 죽게 된 겁니다. 기독교회 수장인 바울은 당연히 처단받을 상황이죠.
7절 그런 상황에 바울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과거 그의 고백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행 20장 24절, 3차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했던 고백이에요.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이제는 마쳤다고 얘기합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대요.
2) 8절에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무엇이 예비 되어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이 말이죠. 이제는 이 상 받기를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고후 5장 8절에 이런 말씀도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로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선악과는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게 그의 믿음이잖아요. 자기가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선다는 걸 사도 바울은 확실히 알고 있었거든요. 이제 그분 앞에 곧 나가게 될 상황을 알고 고백하는 말이에요. 의로운 재판장은 그리스도예요.
결론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스도와 같은 눈과 마음과 삶으로 살았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눈을 열어주신 거예요. 그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랐어요. 사도 바울은 마지막 발자취를 지금 따르는 과정에 있는 거예요. 자기 동기 때문에 살지 않잖아요. 사도 바울을 그렇게 살게 하신 주님이 여러분 안에 주님이십니다. 동질의 주님이 지금 여러분 안에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교인을 수로 보지 말고 그 상태를 보면서 사람 살리고 세우는 제자로 살기 바랍니다. 요새 계속 전도 메시지, 제자 메시지 나오죠. 지금 시간표예요. 아까 말한 것처럼 본성으로 반응하지 말고 성령으로 반응하기 바랍니다. 기도 체질이 되면 여러분이 한 건 한 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처리하며 인생 승리하면서 응답받는 거를 체험하게 돼요. 뭐 어떤 큰일을 한다는 게 아니라 남편 관계에서 본성으로 반응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녀와의 관계에서 본성으로 반응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 처리할 때 본성으로 반응하면서 자기 이성적 계산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성령이 주시는 생각으로,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소원으로 들어가라는 거예요.
매일매일 이 삶이 가능해요. 우리는 삶이 똑같이 반복되지만 주님은 그게 창 3장 체질로 굳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사단에게 속아 그 통로로 살았구나! 발견하면서 그걸 뒤집으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인생 전환이 된다니까요. 하루 세 번 기도하고 일하기 전에 매번 기도하면 내면에서 인도받고 보좌에서 응답하는 삶을 계속 체험하게 돼요. 문제도 하나님이 해결하시고 예전에는 승리 못 한 걸 승리하게 만드시네. 저 남편이 알고 보니 하나님이 나를 인간관계 훈련하도록 저 남편을 옆에 붙이신 것이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니까요. 그렇게 생각 안 들어가면 저 웬수 남편 이렇게 들어간다니까요.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주인이시잖아요. 지금 실제 성령으로 임재 통치하시잖아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한 걸 기억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