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8일 주일예배 - 나의 믿음의 여정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딤후 4:9~22)
나의 믿음의 여정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딤후 4:9~22)
https://youtu.be/TWzszhz5lk4?si=VSbw0Sy-GAPHzQF-
겨자 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이 들려 저 바다에 던지리라. 굉장히 작지만 그러나 생명력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다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말씀이거든요. 정말 여러분이 소중한 사람이고 여러분, 수로 보지 말고 어떻게 제자로 세워지고 있느냐를 보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규가 중학교에 들어갔어요. 지난주 중에 수업이 진행된 줄로 알고 있어요. 반 편성이 기도 제목이었거든요. 누구 만나느냐가 중요하니까. 근데 너무 잘 됐대요. 아마 마음에 드는 친구들이랑 만난 것 같아요. 민규가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인생은 여정과 시간표가 있습니다. 이번 주가 19차 집중 훈련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자기의 여정과 여러분의 시간표를 확인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해서 지금까지 인도하셨는가? 이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해요. 그 사람이 계속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되고 있으니까 그게 보이는 거거든요. 영적 교제가 끊어진 사람은 여정이 끊어져요. 해석이 안 돼요. 하나님 관점으로 내 인생을 못 보는 거예요. 나를 어떻게 하나님이 당시의 문제를 선용하셨고, 또 나를 어떻게 단련하셨고, 또 내가 안 보였던 부분이 어떻게 보였고, 어떻게 치유하셨고, 어떻게 세우셨고 이게 계속되는 거거든요.
그게 보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해요. 그 성도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 소원을 이루게 되신다는 거예요. 언약의 여정이 보이는 사람이 그게 언약의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승리하게 되고 언약을 이루시는 주님의 통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자기 여정과 시간표가 보이게 되면 지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가 보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좀 빠른 사람도 있고 늦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하나님이 각각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렇기에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건 불신앙이에요.
모든 사람은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거든요. 어떤 배경을 갖고 있죠? 첫째 근원적인 배경을 갖고 있어요. 근원적인 배경이 뭐죠? 창세기 3장 배경 그렇죠. 두 번째는 가문적 배경을 갖고 있어요. 좀 더 넓게 생각한다면 국가적 배경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거든요. 우리가 만약에 지금 이란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국가적 배경을 무시 못 하는 겁니다. 지역적 배경은 무시 못 하는 겁니다. 그 속에 나의 가문 배경이 있는 거예요. 그 속에서 나의 가문이 하나님을 만났냐? 못 만났냐? 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가정, 부모 속에서 내가 성장해 온 성장 배경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세 가지 배경이 나의 기질과 합쳐지면서 나의 인격이나 나의 체질을 형성하게 됩니다. 나의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예전에는 이걸 해석하는 눈이 없었어요. 이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보는 눈을 자꾸 열어주신단 말이에요. 그게 보여야 치유가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마치면서 자기 사정을 알리는 내용이죠. 바울은 배신과 떠남, 외로움, 죽음 앞에 있었어요. 육신적으로 바라보면 가장 암울한 상황 속에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바울이 이것도 극복이 되는 거예요.
1. 여러분은 믿음의 여정을 가고 있는데 지금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1) 여러분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가 보인다는 거는 앞으로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가 보이는 거예요.
여정이 안 보인다면 영적인 눈을 못 뜨고 있는 게 되는 거죠. 본인의 여정을 영적인 눈으로 봐야지 문제 사건도 올바르게 해석이 됩니다. 예전에는 문제, 사건을 육신의 관점으로 바라봤단 말이에요. 어떤 상처를 받았으면 그 상처받게 만든 사람이 밉고, 그 상처 속에서 내 인생이 잘못된 처세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근데 내가 이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게 잘못됐다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게 사단의 통로로 빠진 거네. 사단이 그렇게 속였네,” 이렇게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과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형성된 것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첫째가 발견하는 거고요. 또 한 가지는 창 3장 6장 11장의 나를 부인하는 거에요. 어떻게 부인해야 합니까? “그런 내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다” 이런 부인이 안 되면 계속 자기의 관점으로, 자기 주장으로 살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주인 됨을 인정하고 모든 문제, 사건은 그에게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기회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형성된 것에서부터 빠져나와요. 치유가 돼요. 그게 온전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누림이 돼요. 예수님 때문에 행복이 와요. 이때부터 어떻게 됩니까? 이때부터 나에게 묶여 있는 인생을 안 사는 거예요. 정말 자기한테 묶여 있는 사람은 굉장히 눈도 좁고 모든 생각이 나 중심으로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 때문에 치유되고 회복되고 행복해지고 누림이 되면 이제 복음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보게 된다 이 말이에요. 복음의 관점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거를 통찰하는 눈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옛날에 이거 이해 안 될 때는 항상 딴 사람 말할 때 판단하고 비판하는 말을 주로 했어요. 만약에 여러분 그런 상태에 빠져 있다면 저도 상당히 비판 당하게 되어요. “내 마음에 안 들어!” “왜 목사님 저래, 왜 우리 교회는 이래” 근데 여러분이 복음의 눈으로 뜨면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구나” 관점이 달라지는 거예요.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는 눈이 열려요. 안 그러면 내 기준으로 봐요. 누구는 “참 답답해” 맨날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 이해가 안 돼! 왜 저래” 맨날 그 소리 한다니까요. 이해를 할 수 없으면 바른말만 하지 상대를 살릴 수 없어요. 이해 못 하면 바른말만 하고 평가는 잘해요. 그러나 공감은 안 돼요.
구원받은 사람은 죄의 본성이 없어진 거 아니거든요. 성령도 계시고 죄의 본성도 남아 있어요. 죄의 본성을 타고 육신의 생각도 올라오고 우리의 영을 통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도 올라옵니다. 이걸 이제 분별할 수 있게 된단 말이에요. 이 분별이 용이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누리는 신앙생활의 시작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항상 “내가 지금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제 내가 영의 생각을 하고 있구나,”이 두 가지가 분별이 돼야 해요. 이게 분별이 더 되면 내 본성에서부터 올라오는 동기까지도 분별이 되거든요. 여러분 말로는 동기라는 말이 이해가 되잖아요. 우리 동기가 창세기 3장에서부터 시작됐어요. 근데 어릴 때 상처와 함께 이 동기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이해는 해도 안 내려놔져요. 뭔가 염려하고, 불안이 있고, 자존심에 잡혀 있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해는 해요. 그러나 거기서부터 사로잡힌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게 안 내려놔져요. 성령님이 그것까지도 건드리셔요. 그래서 여러분의 정말로 자존심과 안전 때문에 갖고 있는 뿌리가 있을 수 있어요. 성령님은 그것까지도 보이게 하시면서 그걸 내려놓게 만들어요. 이게 더 이상 나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만들어요. 사로잡히려고 하다가도 분별이 되니까 그게 꺾여진다고요. 그게 갈 2장 20절이 되는 겁니다.
2) 여러분은 성령님의 통치 받는 것이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합니다.
우리가 서로 포럼을 하잖아요. 오늘도 포럼 시간이 있는데 서로 형성된 것들이 발견되고 그것이 어떻게 말씀으로 치유됐는지 주로 토론해야 합니다. 그게 치유가 가장 빠릅니다. 그렇게 되면 진지한 포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을 평가하는 부정적인 눈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저런 포럼 못하는데 어떻게 저런 포럼을 하지?”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용기를 얻어서 자기 부끄러운 부분을 포럼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이런 관계가 되면 하나 됩니다. 성도라도 사실 정말 친한 친구 아니면 마음 안 열잖아요. 교인들이 10년을 믿어도 안 열 수 있어요. 그럼 껍데기로만 서로 교제하는 거죠. 장로님이 이제 부끄러운 부분을 얘기하는 거예요. 저도 부끄러운 부분이 있거든요. 근데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왜? 이제는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그리스도가 주인이니까,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게 나의 부끄러움을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죠. 그렇게 될 때 강단의 말씀도 더 여러분에게 와닿게 됩니다. 실질적인 답으로 와닿게 되고요. 끊임없이 성령님이 말씀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돼요.
이해로만 이런 게 되지 않아요. 성령님의 말씀이 영에 감동되고, 영에 깨달아지고, 영에 와닿고, 믿음으로 화합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진짜 내면이 바뀌는 거예요. 화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안 내려가거든요. 불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없어지지 않아요. 성령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자기를 보여주시면 그게 내려가요. 사람 의식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것도 사실은 사단이 형성시켜 놓은 거예요. 그게 기질이 아니에요.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비교 의식하고, 사람 의식하고, “저 사람이 나를 뭐라고 할까?” 그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니거든요. 원래 우리는 자유하도록 지음을 받았고 서로에 대해서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오픈하고 원래 이렇게 할 수 있는 형상이죠.
여러분이, 죄의 본성과 형성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치유되고 갱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것은 갈보리산 십자가의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상속자이기 때문에 신실하신 주님은 끝까지 여러분을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 회복되도록 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관점,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생각을 품을 수 있도록 그렇게 바꾸시는 거예요. 우리를 포럼 시간은 남 가르치는 시간은 아니에요. 정말 자기가 체험한 거를 얘기하는 거예요. 자기 고백 시간이 포럼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여정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느냐를 보시라는 거예요. 그 시간표를 보라는 거예요. 그 시간표가 보여야지 주님이 이제 또 어떻게 인도 하실지가 말씀을 들으면서 보인다니까요.
2. 여러분은 인간관계에 승리하고 있습니까?
사실 인간관계에 승리 못 하는 이유는 나 때문이에요. 저놈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이에요.
오늘 바울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장 암울한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많은 사람이 그를 떠났어요. 동역자들이 떠났어요.
1) 9절에 보면 디모데에게 얘기합니다. - “너는 어디서 속히 내게로 오라 디모데 보고 지금 속히 오라고 말씀하고 있죠. 왜 그렇죠? 지금 쓸쓸해요. 지금 굉장히 외로운 상황이에요. 죽음을 앞두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들 같은 디모데가 보고 싶지않겠습니까? 디모데만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영적 아들이 없거든요. 빨리 와라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2)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렇게 돼 있어요. - 이 데마는 다른 서신서에 보면 바울의 동역자예요. 골로새서에도 데마가 나와요. 빌레몬서에도 나와요. 바울의 동역자로 세상을 사랑하여 사명에서 이탈한 거예요.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표현보다는 사명을 이탈했다고 하는 해석이 더 맞아요. 아마도 바울의 상황을 보면서 박해와 고난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현실 안전을 택한 거죠.
3)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이렇게 돼 있죠. - 그레스게는 동역자인데 정확히 이게 배신인지, 사역 이동인지 불분명합니다.
4) 디도는 다이마디아로 갔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 디도는 바울의 신실한 제자입니까? 여기 달마디아로 갔다는 거는 사역상 떠나갔다는 얘기예요.
5) 11절에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 누가는 원래 직업이 뭐였죠? 의사 그러면서 평생 바울의 동역자였어요. 그는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사도행전도 집필하고 누가 복음도 집필한 거 아니겠습니까? 누가만 남아있다는 말속에는 그가 얼마나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 말이에요. 단 한 명의 신실한 동역자가 큰 위로가 될 수 있어요. 동역자가 정말 중요해요. 그러니까 교회 생활을 하는데 진짜 동역자 관계로 해야 해요. 동역자 관계를 가지려면 내면의 포럼을 해야 해요.
6) 마가 얘기가 나오죠. - 여기 보면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돼 있죠.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러분 마가는 행 13장에 보면 1차 선교 여행 중에 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2차 선교 여행 때 바울이 바나바와 갈라서게 된 이유가 된 사람이에요.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 바울은 못 데려간다. 그것 때문에 심히 다투고 갈라섰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유익하다고 돼 있어요. 다시 말해서 떠나간 사람도 주님은 다시 세우신다는 말이에요. 우리 교회에서 떠났다고 해서 지금 믿음을 저버린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그분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하셔요. 하나님 관점이지 사람 관점이 아니에요.
7)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이렇게 돼 있죠. - 두기고는 바울의 동역자고 비서 역할을 한 사람이에요. 1차 투옥 때는 두기고에게 옥중 서신을 맡겨서 그 지역에 보내도록 하지 하니했습니까? 두기고가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가지고 갔던 제자예요. 그 후에 돌아온 거예요. 돌아온 다음에 다시 에베소에 파송하고 있는 거예요. 에베소에는 디모데가 있었어요. 아마도 “니가 가서 디모데를 보내라.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니가 사역하고 있어라” 아마 그런 뜻이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8) 13절에 보면 니가 올 때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그러니까 춥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러니까 지금 겉옷 가져오라 이건 현실 문제죠.
그러면서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얘기했습니다. 가죽 종이에 쓴 것은 보통 구약 성경 사본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바울은 지금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성경이 필요한 거예요. 말씀을 더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리고 깊은 기도 시간을 갖고 싶은 거예요.
9) 14절에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나옵니다. -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음에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딱 한 사람 나쁜 사람 나오네요. 알렉산더가 내게 많은 해를 끼쳤대요. 그러니까 아무리 바울 같은 위대한 사역자에게도 항상 적은 있어요. 같이 있는 사람 중에서 배신 때리고 또 바울의 말을 꼬투리 잡고 공격하고 이런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심이 우리의 말을 대적했다는 거예요. 근데 바울은 개인적인 미움을 갖고 이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 행위대로 갚으시리라.” 심판권은 주님께 있어요. 여러분이 복수코자 “두고 보자, 가만 안 두겠다.”이건 전부 다 창 3장 표현들이에요. 참 희한한 게 성도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를 못 본다는 거예요. 계속 어떤 사람에 대해서 싫은 생각, 마음 다 갖고 있는 게 육신의 본성이고 성령과 분리가 안 되는 거예요. 분리가 돼야 해요. 아직 성령의 통치받는 게 잘 안되니까 이게 분리가 잘 안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집중훈련합니까? 여러분 항상 기도가 되는 사람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럼 항상 분리가 돼요.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올라와요. 그러나 통찰이 되고 구분이 되고 안 잡혀요. 심판권은 주님께 있다는 거 기억하기 바라고 여러분 인간관계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부분 내 형편이 어려우면 뭐라고 얘기합니까? 자기 형편이 어려우면 “내 이 어려운 거 왜 안 알아주는데? 이렇게 나와요” “내가 지금 가정이 어떤데, 지금 내가 이 정도 교회 나오는 것만 해도 크지” 이래 얘기한다니까요. 꿀꿀한 상태에서 교회에 왔어요. 그럼 막 교회에서 표현을 해요.“ 내가 꿀꿀하다. 니네들 오늘 조심해라.” 그 참 어린애 신앙이에요. 여러분 안에 보배 되신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진정한 배경이고 진정한 보장이에요. 그분이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상태로 내 인생을 바꾸는 게 신앙생활 아니겠습니까?
3. 바울의 마지막 고백
1) 바울이 심정
16~17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하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내가 변명할 때 나와 함께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그랬잖아요. 이 변명은 법정에서1차 공판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잖아요. 그때 함께했던 동역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이제 최종 공판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의 사형의 가능성은 99%예요. 그는 인간적으로 배신과 외로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 지금 놓여있는 거예요. 이 상황이 여러분이 돈 떨어지고 빚지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에요. 그러나 그는 사람에게 섭섭함이나 허물을 돌리지 아니하고 있어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이 고백이 중요한 거죠. “주께서 내 곁에 서서 힘을 주셔서” 이게 여러 권사님들에게 필요한 거예요.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사도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이 정말로 뚜렷하게 온전하게 전파되기를 지금 바란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이방인이 이 복음을 정확히 정확히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그의 평생의 완전한 배경과 보장과 능력의 근원이 되어 주신 거예요. 이게 사람 100명보다 낫단 말이에요. 이게 죽음을 능가한다는 말이에요. 이게 머리 신앙이 아니란 말이에요. 성령님이 기도로 이끌어주면서 자기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이 나게 하시면서 말씀이 확신으로 임한 거예요. 말씀의 주인공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거, 믿는 것이 더 깊게 와닿는 거예요. 그리스도 아는 거 믿는 게 더 깊게 와닿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을 본받게 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이게 그의 신앙 고백의 핵심이에요. 사람도 떠날 수 있어요. 동역자도 떠날 수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그의 곁에 항상 계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김추자 권사님이 떠날 수 있어요. 오 권사님도 떠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제가 김상권 집사님을 너무 애지중지하는 거예요. 그럴 수 있잖아요. 근데 김상권 집사님이 내 생각과 상관없이 이사를 가버렸어요. “아이고 우리 교회 일꾼이 없어졌네.” 굉장히 목회자한테 타격이 오겠죠. 제가 그런 생각을 한 번씩 해봐요. 하나님 누가 정말 사역 때문에 떠난다면 그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 정말 저는 그분을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들을 한다니까요. “아니 교인 수가 많지 않은데” 그래도 이게 주님의 목회라니까요.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에요. 진짜 사람은 떠날 수 있어요. 동역자도 떠날 수 있어요. 하나님 보내시면 가야죠. 그러나 주님은 안 떠나셔요. “사자 입에서 건짐을 받았다” 하는 말을 하고 있어요. 그거는 그가 겪은 숱한 어려움을 말하는 거예요. 가는 곳곳마다 유대인들이 핍박했잖아요. 살해 위협도 했잖아요. 실제 죽을 뻔도 했잖아요. 그리고 로마 제국이 정치적으로 위협하고 있잖아요. 그 배후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을 어떻게 하든지 죽였으면 좋겠다 소원이잖아요.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 건짐 받았다는 거예요.
2) 마지막 소망을 얘기합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거는 여러분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건짐 받는 것도 구원이지만 여러분이 진짜 핍박과 순교를 하는데도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도 구원이에요. 사실 초대교회는. 그걸 오히려 더 구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바울 죽을 상황인데 여기서 살려달라는 얘기입니까? 아니거든요. 그걸 능가하는 믿음을 주셔서 감당하는 구원이에요. 바울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환경에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믿음의 주소 거의 환경에 있어요. 바울의 믿음의 현주소 사람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의 믿음의 현주소가 사람에게 있어요. 남편,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남편, 인간적으로 좋아하셔야죠. 근데 남편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의 대상인 사람은 좀 곤란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현주소가 삼위 하나님께 있어야 돼요. 여러분의 믿음의 현주소는 주님과 그 언약의 말씀에 있어야 돼요.
바울의 믿음은 사명 감당 중심의 믿음이었어요. 바울의 믿음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자 했던 믿음이에요.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서고자 하는 믿음이에요. 사람 평가나 세상 평가 기준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믿음이 없을수록 사람 평가와 세상 평가에 좌우됩니다. 그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결론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삶의 여정이 있어요. 구원받는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여정이에요. 여러분의 여정을 돌아보세요. 내가 딴 사람보다 돈이 많고 딴 사람보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그런 건 세상 평가 기준이고요.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교제해 주시고, 어떻게 성령 통치해 주셔서, 여러분 인생이 치유되고 회복되고 말씀 따라가는 인생으로 주객과 체질이 180도 바뀌고, 믿음의 인생으로 바뀌고, 거기에 문제 사건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이런 거를 고백할 수 있는 여정이 되셔야 해요. 그러면 앞으로 가야 될 여정이 보인다니까요. 시간표가 보여요. 그게 믿음의 사람이에요. 그게 언약의 사람이에요. 문제 앞에서, 사람 앞에서, 돈 앞에서 예전의 수준과 똑같다. 그럼 안 바뀐 거죠. 머리 신앙이죠. 사람마다 약점이 달라요. 강점이 달라요. 강점은 잘 사용되도록 만드시고 약점은 치유되어서 발판되게 만드시는 거예요. 시간표가 있어요. 어떤 시간표가 있어요? 구원의 시간표가 있어요. 치유 갱신 회복의 시간표가 있어요. 전도자로 쓰이는 시간표가 있어요. 사명 종료하는 시간표가 있어요.
모두 질문하셔야 돼요. 나는 주님께 잡혔는가? 나는 주객이 바뀌었는가? 나의 믿음의 여정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질문하셔야 돼요. 여러분이 언약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것은 부르심에 따른 여러분 인생의 소명에 대한 천명 사명이 다 있어요. 그걸 이루는 시간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말이에요. 이번 화요일부터 19차 집중 훈련이에요. 나의 믿음의 여정을 위한 목표와 실천 사항을 정하시기 바래요. 사람마다 좀 다를 수 있잖아요. “이번에 나의 방향, 목표, 훈련 내용 주님이 정해주세요. 제가 어떻게 바뀌기를 원하십니까? 제 실천 사항을 가르쳐 주세요.” 요런 기도를 오늘 좀 해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