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30일 주일오전예배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7~2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7~21)
매주 삶의 루틴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적 삶을 사는 틀로 바꾸셔야 해요. 틀이 참 안 바뀌어요. 이미 살아왔던 틀이 있잖아요. 저녁에 8시부터 9시까지는 TV 보고 9시부터 10시까지는 뭐 하고 이런 자기 삶의 틀이 있어요. 그 틀에 매여 있기 때문에 사실 말씀을 받아도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더 받는 삶을 확장시킬 수가 없게 되는 경우들이 참 많아요. 그 틀을 바꾸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통해서 계속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10절, 11절이 그 핵심적인 사랑의 내용이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만 사랑하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내 자식, 내 가족, 내 남편만 사랑하는 말이 절대 아니에요. 이 말씀은 우리 교회 안에서만 그렇게 하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건 어떤 말씀입니까? 우리 교단이 아닌 다른 교단까지도, 한국 교회까지도, 북한 교회까지도, 전 세계 교회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에요. 그 속에 온갖 사람이 다 있겠죠. 믿음 있는 사람, 믿음 약한 사람, 낙심한 사람, 구원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무너진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이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는 말씀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사랑이 내게 있는가?’오늘 그런 말씀을 좀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은 우리 본성은 혈연관계나, 나랑 잘 통하는 사람 거기에 사랑이 한정돼 있죠. 근데 이 명령은 이제는 ‘주님의 관점으로 주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라’ 이 말이에요.
한 예로, 지금 이란이 미국 이스라엘과 싸우고 있죠. 지금 이란 사람들은 지옥 경험을 하고 있잖아요. 근데 우리랑 아무 상관 없어요. 우리가 언제 거기까지 생각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주님의 관점으로 보면 달라져요. 이란이 이슬람 혁명이 1979년에 일어났어요. 그전에는 자유주의 체제였어요. 1979년에 누가 정권 잡았어요? 얼마 전에 미국에 의해서 죽은 호메이니 이 사람이 이슬람 정권을 잡고 혁명을 일으켰어요. 그때부터 완전히 자유주의 체제가 다 없어지고 이슬람 정권 체제로 바뀌게 된 거거든요. 그래서 좋았어요? 나빴어요? 지금까지 한 47년 됐는데 완전히 억압과 자유가 상실되고 여자들은 다 히잡을 써야 하고 굉장히 고통당하는 사회가 됐던 거예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데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정권이 무너져야 하고 지옥 같은 생활을 하기에 그래서 지금 오히려 전쟁을 반기는 사람들이 많대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전에는 기독교인들이 소수였어요. 무슬림 중에서 기독교인인 사람은 1979년 당시에는 불과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었대요. 지금 47년 정도 지났는데 이슬람 국가에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어요. 어느 정도로 부응하고 있냐 하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었는데 지금은 100만에서 300만까지 잡고 있어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 이유는 한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아까 말한 이슬람 통치가 오히려 국민의 마음을 기독교 쪽으로 향하게 만든 거예요. 원래 기독교가 있었거든요. 또 한 가지는 미디어 선교가 활발히 되고 있어요. 선교사들이 들어가서는 전도 선교 못 해요. 근데 미디어 선교가 굉장히 활발하게 되고 있고 또 한 가지는 성령의 역사예요. 성령께서 꿈이나 환상이나 치유 같은 기적 체험을 많이 일으키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얘기하는데 별 관심 없는 사람도 있죠? 육신의 생각으로 하면 저 아프리카 사람들도 별 관심 없어요. 아프리카에 우리 교단에서도 선교 나가 있는 분들이 계시는데 우린 별 관심 없거든요. 지금 내가 밥 먹고 살기 힘든데 하는 생각 있잖아요. 그게 육신의 본성이에요. 근데 이제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성령님은 아버지 생각, 주님의 생각을 자꾸 하도록 만드시는 거예요. 이런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이 말이에요. 주님은 지금 이란에 일하고 계셔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가 저 북한에 기독교인이 있을까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잖아요. 지금 한류가 계속 들어가고 있고 한국 영상 안 본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북한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고난의 행군을 통해서 오히려 기독교가 아주 급속도로 들어가게 된 거거든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예요. 또 거기에 하나님의 종들을 쓰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의 관점으로 봐야 해요? 하나님의 관점, 주님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이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랬어요. “그렇기 때문에 너희도 사랑해라.” 구체적인 실례로 하나님의 아들을 주신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너희도 그 사랑을 본받아서 그 사랑해라’ 이게 가능합니까? 저희 집사람은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살아보니까 가능하지 않아요. 첫째 이게 가능하려면 사랑할 수 없는 나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1. 사랑할 수 없는 나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1) 사단이 인간에게 거짓으로 속이고 욕심을 넣었잖아요.
“너 잘났다,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 이 욕심을 넣었잖아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빠진 자는 전부 다 ‘내가 체질’이에요. 전부 다 인본주의 자아를 가지고 인본주의 체질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랑이 불가능해요. 물론 애정 있는 사람과 그 애정도 별로 없는 사람 즉 성향적인 면은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 배경 못 누리고 임마누엘 못 누리면 한계를 면치 못해요. 이 사랑의 근거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거든요. 독생자를 주신 사랑인데요. 우리 본성은 이 사랑이 절대 안 됩니다. 사실 돈이 있어도 돈 남 주나요? 돈 잘 안 줘요. 절대 꽉 잡고 있어요. 헌금할 때도 늘 갈등해요. 내가 없는데 어떻게 헌금하나 이 생각해요. 근데 보세요. 이게 전부 다 내 본성, 내 이성에서 올라오는 생각이지, 성령이 주신 생각 아니거든요. 이 사랑하려면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해야 가능해요. 이 사랑을 하려면 일단은 이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나부터 인정하셔야 해요. 그래야 누구를 의지하겠어요? 성령님을 의지할 거 아니겠습니까? ‘내 생각이 올라왔다. 이거 아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거부할 수 있잖아요. 굉장히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한테 묶여 있는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안 바뀌어요. 심지어 목사님이 얘기해도 귓등으로 들어요. 듣긴 들어도 다 카트예요. 순종 안 해요. 왜 심령에 말씀이 안 부닥치니까, 그냥 머리로 받으니까 그래요. 주님은 우리 보고 우리의 이해력, 정신력, 우리의 수준으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방어적이고, 얼마나 나를 합리화합니까? 이게 창세기 3장의 본성이 이에요. 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대합니까? 딴 사람에 대해서는요? 성민 형제, 딴 사람에 대해서는 어때요? 관대해요? 우리는 딴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비판 잘하고 정죄 잘하는지 몰라요. 거기에 대해서 전문가들이에요. 항상 자기 동기 갖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깊게 보는 은혜가 필요해요. 성령님이 기도할 때마다 내가 보여야지 바꿀 수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내가 보여야 바뀔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나부터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2) 그뿐만 아니라 또 상처받은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이 사람들은 남 사랑하기가 더 어렵죠. 상처 많으면 오히려 어떤 생각을 가져요? 비판심 이 더 세져요. 노조에 빠져있는 사람은 정의감 있는 사람하고, 상처 많은 사람들이 많아요. 특별히 정의감 강한 사람들이 노조에 아주 앞장서요. 그리고 상처 있는 사람들이 붙으면 끝까지 붙거든요. 인간이 하나님의 배경과 임마누엘을 잃어버린 상태로 상처받을 수밖에 없도록 지금 되어져 있어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떠나서 믿음의 자존심이 아니잖아요. 전부 다 인본주의 자존심을 갖고 있어요. 나 방어하는 자존심, 내 인격을 무시당할 수 없고 나는 딴 사람보다 더 나아. 이 자존심을 다 갖고 있어요. 거기에 손해 보고, 무시당하면 발끈하면서 못 견디죠.
요셉이 상처 안 받은 건 기적입니다. 왜 이 요셉이 상처를 안 받았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임마누엘을 누릴 수 있었어요. 요셉 속에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영이 요셉 속에 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어릴 때 주신 언약을 생각나게 하셨고 그 언약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언약 여정을 주님이 이끄신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상처를 안 받았다는 거예요. 우리도 똑같아요. 그러면 상처 안 받아요. 내 인생이 지금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다 이렇게 믿어지면 감옥 가도 그 속에서 하나님 개혁을 발견할 수 있잖아요.
일반 상담학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상담학에서는 가정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따라서 건강한 자아도 될 수 있고 건강치 못한 자아도 될 수 있다. 상식으로도 맞아요.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자아가 형성돼요. 그러니까 부모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부모가 무기력해요. 그럼 자식들도 그 무기력에 영향을 받아요. 부부 간의 관계가 안 좋아. 안 좋으니까 자녀에 대해서도 종종 그래요. 아내가 남편에게 늘 구박받고 남편이 원수라면 그 답답함을 누구한테 풀겠어요? 보통 딸한테 풀어요. 딸한테 하소연하면서 풀어요. 그러면 딸은 맨날 그 말에 눌려요. 거기에 완전히 각인돼 버려요. 대한민국에 이런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요. 만약에 부부가 싸우고 파국적 상황이 벌어진다고 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식들한테 넘어가는 거예요. 부모로부터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못 배웠어요, 그래서 자기도 그 사랑을 못 배웠기 때문에 그 사랑을 실천 못 해요. 그리고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면 100% 상처받아요. 물론 이런 케이스도 있어요. 부모한테 사랑을 잘 받았어요. 근데 인간 속에 죄의 본성이 있잖아요. 사랑받았는데 자기밖에 몰라요. 사랑 많이 받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유형도 또 있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압니다. 이게 가정사의 문제만 아니라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내면적인 조건을 우리는 갖고 태어난다는 거예요. 창세기 3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고 우리는 그냥 내가 주인 되어서 사는 존재로 난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임마누엘 통치를 거듭나기 전까지 못 누려요. 모든 것을 능가하며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고통당하고 눌림 당하고 이상한 일 당하고 이러면 상처가 꽂히는 거죠. 그게 하루 이틀에 그냥 사라집니까? 일평생 가죠. 창세기 3장의 인간은 내재 돼 있는 불안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본성적인 욕심이 있다고 그랬어요. 불안 욕심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내면적인 조건을 다 갖고 있어요. 모든 아담의 자손들은 불안과 욕심이 있는데 굉장히 자기 자존감을 또 강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를 살리고 성공하기 위해서 자기 자존감을 강하게 해요. 아주 긍정적인 생각을 해요. 이 사람은 ‘난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요. 적극적인 생각을 해요. 근데 안 되는 게 있어요. 이 사람은 굉장히 나 중심이에요. 가만 보세요. 하나님 마음 없어요. 이거 교만이거든요. 이거 깨져야 해요.
여러분 속에 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터치가 돼야 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상처에 꽉 묶여 있어서 일평생 빠져나오지 못하면 또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만이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거예요. “네 인생이 어떠하든지 간에 너는 내 계획 속에 있었고 내가 너를 예정했고, 지명했고, 너를 구원하기 위하여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했다. 너는 이제 불안할 이유 없다. 염려할 필요 없다. 내가 너의 인생에 진정한 배경이요. 보호자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 사람 마음에 감동이 오고 울림이 오고 움직임이 올 때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은 그 상처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깨닫게 만들어줘요. 근본적으로 창세기 3장에서 이게 시작이 됐는데 나의 가문 배경, 나의 가정 배경 속에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해되는 겁니다. 이해 안 되면 못 빠져나와요. 이런 나에게 영적 문제를 알게 하시고 내 죗값을 담당해 주시고 내 안에 주님이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을 깨달을 때 이 사람 치유되거든요. 내가 가정에서 받은 사랑이 없을 수 있어요. 근데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큰 사랑이 깨달아지게 되고 나를 향한 목적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건강한 자아로 바뀌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말씀과 사랑을 통해서 영적 치유, 정신 치유, 마음 치유하시는 거예요.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하시는 거예요. 사랑할 수 없는 나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2. 환경을 바꾸기 전에, 상대를 바꾸기 전에 내가 먼저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들어가면 돼요.
1)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도 갈라디아서 2장 10절이 죽어도 잘 안돼요.
권사, 장로, 목사 돼도 안 될 수 있어요. 왜 그래요? 이게 빙산의 밑부분까지 안 보이니까 못 바꾸는 거예요. 이게 성령님이 터치하면서 보이게 하시고 나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이게 안 되니까 자기는 못 내려놔요. 자기 기준 못 내려놔요. 자기 동기, 자기 고집 못 내려놔요. 자기 자존심 못 내려놔요. 그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안 되는 거지. 안 되면 어떻게 돼요? 그만큼 사단의 종노릇 하는 거예요. 사실 최고의 축복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인생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게 최고의 축복이에요. 이렇게 되면 과거에서 빠져나올 뿐만 아니라 현재 승리하게 됩니다.
저는 집사람과 같은 교회에서 만났어요. 제가 중등부 교육 전도사일 때 집사람이 중등부 교사를 했어요. 그래서 집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됐고 기도 중에 집사람이 내 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결혼했어요. 그런데도 성장 배경은 다르죠. 저는 5형제, 저쪽은 5남매, 저쪽은 전라도, 우리는 경상도 물론 다 서울에 와서 살았지만, 아무튼 성장 배경이 달랐어요. 그리고 또 성향이 반대예요. 보통 그렇죠. 그래서 혼자 살 때는 문제가 안 돼요. 혼자 살 때는 자기가 성실하게 살면 돼요. 근데 혼자 살 때는 문제가 안 되는 사람들이 같이 살면 문제가 일어나요. 그게 부부입니다. 부부는 아내 말 들으면 다 이해가 돼요. 공감이 돼요. 근데 또 상대방 남편 얘기 들으면 또 공감이 돼요. 각자 편에서 얘기하니까 그래요.
제가 여러분 대화할 때도 아직 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지금 몇십 년을 살았는데 왜 편하지가 않아요. 왜 그럴까요? 말도 조심스러워요, 왜 그래요? 제가 못나서 그렇지요. 너무 자기를 경계하고 있고, 자기 지키느라고 자유롭지 못한 내가 주인이 돼서 그래요. 그런 사람한테는 다 맞춰 줘야 하거든. 그렇죠? 말 조금 잘못해도 삐지고 권사님이 그러면 되겠어요. 예를 들어서 권사님한테 뭐 한마디 했어요. 금방 탁 걸려버렸어요. 수십 년 같이 복음, 복음 하면서 지금도 그러고 있다면 그게 진짜 복음화된 겁니까?
2) 저는 오랫동안 종교 신앙이었지 영적 문제 뭔지 몰랐어요.
내가 주인이 되어 주님을 잘 믿으려고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왕 믿으려면 완전히 믿자’ 이런 주의였어요. 이건 사실 저의 성향이거든요. 주일 일을 한다고 꽂혀 있었어요. 전도사 때 그러니까 집사람은 항상 돕는 배필로만 보는 겁니다. “당신은 나를 도와야 해. 내가 주의 종 아니야?”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집사람의 필요와 요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겁니다. 제가 일주일 내내 대학원 시절에 저 경기도 양지에 있는 학교 기숙사 생활했어요. 결혼하고도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거리가 머니까, 그리고 토요일 오면 또 그때 섬기는 교회에 가서 자요. 집사람하고 생활하는 거 거의 없잖아요. 근데 나는 주의 일을 하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잡혀 있는 거예요. ‘내가 주의 일을 좀 못하면 안 된다’ 이 생각에 잡혀 있는 거예요. 이게 사실 복음 누리는 거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집사람이 하는 말이 있었어요. “혼자 살지, 왜 결혼했는데? 당신은 혼자 살아야 할 체질이야” 이런 말을 자주 들었거든요. 그럴 때 어떻습니까? 제 속이 쓰려요. 그러니까 저는 그때 늘 그랬어요. 나를 방어하고 아내를 설득시키려고 설득하는 말을 많이 하는 거예요. 근데 부부 관계는 이해관계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설득 안 당해요. 문제는 제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안 돼 있는 거예요. 진짜 내가 주인 된 것이 영적 문제인 줄 깨닫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돼야 해요. 내가 살면 여유 없어요. 내가 잘하려고 할수록 더 긴장해야 돼요. 그러니까 여유가 없죠. “설교를 잘해야 돼”. 내가 만약에 설교 준비하려고 그러면 저는 긴장해야 되잖아요. 내가 잘하려니까 “설교를 잘 못해서 죽 쑤면 어떡하나?” 그럼 긴장해야 되잖아요. 설교 준비할 때 만약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돼서 모든 계시와 영감과 감동의 원천이 되시는 주와 그의 성령님을 의지해서 그 성령의 감동, 계시, 영감을 받는 게 기도로 훈련돼 있으면 내가 긴장 안 해도 돼요. 여러분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되면 매주 바뀌어요. 진짜 내가 주인 된 것이 영적 문제인 줄 깨닫고 “이것 때문에 주님이 죽어주셨구나. 나도 십자가에 같이 죽었구나. 그래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하면 믿음의 인생으로 바뀌는 거예요. 내가 체질에서 믿음의 체질이 되고 실제 성령의 임재 통치를 날마다 체험하는 인생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상이가 이걸 빨리 배워야 하거든요. 형상이 일할 때 막 쪼이거든요. 그거 아빠 체질이에요. 체질 쪼이는 거 아빠 체질이거든요. 긴장하고 그러면 굉장히 스트레스 받죠. 그래 집에 와서 아내가 요구하면 짜증 내죠. 이런 남편들 많아요. 안 많아요. 많죠? 사실은 하나님이 내면을 건드리시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이 종교적인 열심으로 사랑하라는 게 아니에요. 내면에서부터 주인이 바뀌어져서 실제 성령님이 모든 능력과 사랑의 근원이 되셔서 여러분의 영과 마음과 생각을 잡고 통치하시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되면 주객과 체질이 바뀝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염려도 없으시고 긴장도 안 하시고 모든 능력과 모든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성령님이 그 마음을 주신다고요. 그러니까 계속 나도 발견되고 뒤집기도 되고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강건케 되고 이렇게 바뀌는 거예요. 오늘, 이 사랑을 하려면 뭐가 돼야 한다고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돼야 한다. 내 능력으로 이 사랑하라는 게 아니거든요. 똑같아요. 전도도 내 능력으로 하라는 게 아니에요.
3.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되면서 하나님의 배경과 임마누엘을 누려야 합니다.
1) 그럴 때 두 가지 욕구를 위해서 살지 않고 두 가지 명령을 위해서 삽니다.
여러분이 많이 헌신도 하고 또 계명도 지키고 하잖아요. 근데 더 질적으로 더 깊이가 있게 됩니다. 주님이 무한하니까 우리가 주님을 계속 닮아가도록 만들어요. 어디까지 자라나게 한다고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한다는 말씀을 아주 강조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죠지 뮬러 얘기도 하고 스텔리 템 얘기도 했어요. 사단이 인간을 어떻게 욕심과 거짓으로 범죄했는지 그 죄의 성격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아담의 모든 후손은 지금 사단의 욕심과 거짓에 빠져있어요. 철저히 지금 하나님 아는 거, 하나님 믿는 거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영적 눈이 감겨졌어요. 육신적인 지식만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 영적 문제를 모르고 자기 기준의 의는 또 얼마나 세요? 사회적 성공한 사람 자기 기준의 의가 세요. 그러면 실패한 사람은 자존심 세요. 안 세요? 실패한 사람은 열등감의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몰라요. 또 이성이 판단의 기준이 돼 갖고 하나님도 판단하고 성경도 판단한다니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게 잘 안 와닿아요. 십자가에서 널 위해서 죽었는데 그게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죽을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하지만 자기가 잘 이해해서 이걸 받아들이려고 하니까 이성으로 가슴에까지 안 와닿아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어요. 자기 이성 때문에 신앙생활 많이 손해 봅니다. 여러분 뭘 회개해야 합니까? 내가 주인으로 살아온 그 체제 전체를 보면서 회개하셔야 해요. 내가 주인으로 살아온 그 체제 근본 뿌리 본질을 보시면서 회개하셔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사랑을 성령께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2) 주님은 세상에 극악무도한 죄인도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상식과 다르죠. “어떻게 저렇게 극악무도한 사람은 지옥 가야 되지, 어떻게 저들을 구원해” 우리가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근데 우리가 이미 봤던 박효진 장로님 간증을 보면 진짜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살인자들, 인신매매범, 가정 파괴범, 성폭력범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일생을 진짜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거든요. 다수를 죽인 사람들도 있어요. 근데 그 사람들도 성령님이 구원시키는 걸 우리가 봤잖아요. 이게 도대체 웬일입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 근접하는 것도 싫은데. 그런데 그 극악무도한 죄인까지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은 최고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셨어요. 그게 십자가 자리예요. 정말로 최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 자리까지 내려오셨어요. 그게 사실 세상에서 최고 낮은 자리 아닙니까? 더 낮은 자리 있어요? 그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최고의 조롱과 멸시와 침 뱉음을 받았어요. 여러분 저한테 침 뱉어 봐요. 여러분이 다 신 목사 그러면서 막 지탄해 봐요. “내가 목사인데 저 성도들이 왜 저래”, 집에 가서 드러눕는 목사님도 계실 걸요. 지금 여러분을 책망하려고 하는 얘기 아니에요. 지금 왜 이렇게 우울하게 들어요? 여러분 이게 정말 은혜로운 말씀들이에요. “나를 정확하게 보게 하시고 하나님은 나의 근본 뿌리부터 뒤집으려고 지금 말씀을 주고 계시고 있구나”. 이렇게 여러분 심령에 부닥치면 기쁘죠. 예수님이 최고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 가장 참혹하고 가장 비참하고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형 제도에 죽었어요.
사형수들한테 “너 왜 그런 죄를 지었냐?” 이렇게 물으면 의도적으로 살인 계획해서 죽인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완전히 잡히고 인격화된 거죠. 근데 대다수는 살인할 때 “왜 그렇게 죽였는지 모르겠어. 순간적으로, 나 그럴 마음 없었는데 죽였어” 그런 경우들이 많아요. 여러분, 사람에게 환경만 마음과 생각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 공격을 받아내는 내면의 상태, 영적 상태를 사단 귀신이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문의 흑암 세력이 심한 집안이 더 이런 죄를 많이 짓게 돼요.
마지막으로 12절,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아느니라”. 어떻게 하나님 사랑이 가능하게 해요? 하나님이 실제 우리에게 그 사랑의 모범을 보이셨는데, 그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와닿게 하시고 그 사랑에 감동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그 사랑을 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16절~ 18절도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 두려움은 뭘까요? 일반적인 두려움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심판대 앞에서 섰을 때 두려움이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는데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는데 그런 느낌이 들면 그 심판대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되겠죠. 근데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깨달아지고 그것이 실천이 된다면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는 거예요. 믿고 내가 순종하니까 그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이 심판의 두려움을 내쫓는다는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온전하게 실천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내 영이 자유로울 거 아니에요? 거리낌 없잖아요. “하나님, 제가 그 사랑을 받고 내가 말씀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내 힘도 아닙니다. 주의 은혜로, 성령의 은혜로 내가 그래 살았습니다”. 그때 영의 기쁨이 있잖아요. 심판대 앞에서 주님 빨리 만나보고 싶지, 두려워하겠어요? 그런 얘기예요.
결론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다고요?
1. 먼저 사랑할 수 없는 나부터 인정해라.
2.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돼라. 이거는 매주마다 발전해야 해요.
여러분이 남편하고 관계에서 또 직장 사람하고 관계에서 여러분의 본성으로 반응하느냐, 성령으로 반응하냐? 이걸 통해서 여러분이 매주 향상될 수 있어요. “내가 이번 주간도 하나님을 별로 생각 안 하고 내 본성대로 살았네”, 이런 게 발견되는 사람은 전환이 되잖아요. “이번에는 되게 센 사람 만났는데, 이 센 사람도 감당이 되네” 이런 것들이 확인되잖아요. 그냥은 안 되잖아요? 아침, 낮, 밤이 있어야 이게 되잖아요. 점점 더 센 대상을 붙이는 건 우리로 하여금 더 그리스도께 깊게 뿌리내리도록 붙이는 거예요.
3.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되면서 하나님의 배경과 성령의 임마누엘을 누려라 이 말이에요.
사실 배경 못 누르면 우리 이게 잡혀버려요. 우리 염려에 잡혀요. 그래서 두 가지 욕구에 의해서 다 살지, 두 가지 명령을 수행하는 인생을 못 살아요. 뒤집기를 바랍니다. 정말 여러분 속에서부터 뒤집는 그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