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9일 주일예배 - 복음의 눈으로 보며 차별하지 말라(약 2:1~13)
복음의 눈으로 보며 차별하지 말라(약 2:1~13)
https://youtu.be/bHnjKzcI1hs?si=zcl2nwweD09-g75o
우리가 남을 살리려면 사람을 복음의 눈으로 보며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 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성은 일단 사람을 외모로 보게 됩니다. 또 사람을 가진 소유나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로 평가할 때가 참 많죠. 그게 우리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육신의 본성이죠. 근데 이 육신의 본성을 보면서 왜 내가 이럴까? 생각지 말고 “이거는 평생 나에게 있는 죄의 본성이구나” 생각하기 바랍니다. 본성은 성화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가 바뀌므로 본성대로 안 살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본성에서 한 번씩 올라올 때 오히려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런 나를 바로 알고 오히려 나를 인정하기 바랍니다. 이 육신에서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을 계속 구분하라고 그랬죠.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생각과 지금 육신의 본성의 것들을 구분해야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본성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먼저 인정하고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내 안에는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렇지 아니함을 믿습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살리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이 주된 내용입니다.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을 경계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차별하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복음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본래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소중한 거예요. 심지어 불신자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가치 있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복음을 안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가 중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병든 사람도 소중하고요. 장애자도 소중합니다. 민주주의가 좋은 점이 뭡니까?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겁니다. 선거할 때 지위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소유와 상관없이 전부 한 표의 투표권을 줍니다. 참 공평한 거죠. 이 민주주의의 법을 세우게 된 그 기초가 성경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 가르침을 토대로 세운 게 미국 초창기 헌법이에요. 물론 인본주의자들은 그런 차원은 아니죠. 그렇지만 미국 헌법을 처음에 시작했던 분들이 거의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이 법을 세웠던 겁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하고 평등하다 얘기하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얼마나 계급과 사회 구조적으로 차별이 많습니까? 이거는 사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간이 타락한 죄의 본성이죠. 사람을 우리는 자꾸 판단하고 평가하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고보서를 전도자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겁니다.
그냥 단순히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죄 짓지 말라 그런 차원으로 보지 마시고 내가 진짜 사람을 살리는 입장에서 본다면 관점이 달라지잖아요. 주님은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세워 가는 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장 28절에서 29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 하노라” 여기에 각 사람이란 말이 세 번 나오죠. 왜 이렇게 각 사람을 강조해요? 무더기로 얘기 안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회복돼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워지는 게 주님의 최고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마인드를 품도록 기도하기 바래요. 사실 저도 한 번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세워지는 과정이 있었고 또 지금도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1. 나의 간증
지난번에 대구에 집사람과 병원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어요. 고속도로를 타면서 제가 집사람한테 한 얘기가 있어요. 2017년도에 최 장로님 내외분이 우리 교회를 나갔어요. 벌써 9년 됐네요. 그때 그분들 나가시면서 저는 진정으로 기도해 주는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썼거든요. 정말 내 관점과 내 본성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관점으로 기도하고자 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런 기도가 잘 안되는 겁니다. 그때 생겼던 갈등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왜 나는 주님과 같은 마음이 없지? 왜 나는 주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면서 저분들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서 팍 뚫리는 기도가 안 되지? 이런 갈등이 사실 있었어요. 성령님은 사실 이런 기도를 저에게 하도록 하기를 원하신 거죠. 그런데 제 본성은 내 자존심과 내 안전 중심인 것이 많이 와닿았어요. 내가 하는 사랑의 수준과 성경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과 너무 갭이 큰 거예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깊게 묵상하면서 주님이 나를 위해서 어떻게 고난 당하고 희생하셨는지 그걸 생각하면서 기도하게 하셨어요.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그 참혹하고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십자가를 감내하셨지? 사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잖아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또 십자가상에서 아들이 절규하는데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외면하신 것이 묵상 되었어요. “그거는 우리의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아들에게 내리신 것이다.”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고 또 그것은 “아들을 희생해서라도 너희를 살리시려는 내 사랑이다.” 라고 깨달아지게 하셨어요. 사실 그게 깨달아지면서 제게는 그런 사랑이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 보고 그 사랑을 하라고 한다면 할 수 있나요? 제가 그 사랑을 할 수 없는데 그 사랑을 읂로 받은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랑을 너도 하라고 주님의 영인 성령을 주신 거예요. 이 사랑은 성령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이지, 종교인처럼 우리가 참고 노력해서 이 사랑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아요.
아무튼 그때부터 저를 더 보게 하시면서 나의 모든 행동 속에 깔린 나의 깊은 동기가 얼마나 나 중심인지 더 보게 해주셨어요. 나의 안전의 동기, 나의 자존심의 동기가 나의 중심이었어요. 이 자존심이 믿음의 자존심이나 이타적 자존심이 아니라 철저히 나부터 늘 챙기는 자존심이잖아요? 저는 이런 내 속에 동기를 보면서 이제까지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려고 했던 건 뭐지? 생각했어요. 내 내면의 본성을 충분히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저는 주님의 사랑을 행하며 그 계명대로 살고자 애썼던 거예요. 근데 한계가 오죠. 사실 전도하러 나가려고 해도 주님의 진짜 눈을 뜨고 주님의 마음이 있어야 나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서 저를 보여주신 거예요. 사실 우리가 그냥 자기 성찰한다고 해서는 이런 영적인 부분이 성찰되지 않아요. 주님은 이런 동기 하나가 보이니까 그때부터 내 모든 삶의 체제가 다 인본주의 체제인 것이 깨달아졌어요. 인본주의 체제가 뭔지 아세요? 보이는 것만 믿고 내 능력만 믿고 내가 모든 만물의 중심이 되는 게 인본주의 체제예요. 다시 말해서 창세기 3장에 나 중심, 6장의 육신 중심, 11장에 보이는 세상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걸 저는 인본주의 삶의 체제 라고 생각이 들어요. 이게 보이는 거예요. 보이면서 나의 믿음의 현주소가 진짜 환경에 있고 눈에 보이는 물질과 내 능력에 있지, 하나님께 믿음의 현주소가 없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 육신의 본성에는 믿음이 없구나.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그게 그냥 생깁니까?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 속에서 생기는 거예요. 이것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살아온 방법이 인본주의 체질이에요. 내가 염려하면서 항상 내가 긴장하면서 내가 애쓰는 스타일이에요.
어젯밤에 예은이랑 카톡을 좀 했는데 “예은아, 인본주의 체질을 너는 어떠냐?” 목사님은 굉장히 염려 체질이고 뭘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더 긴장하는 체질이라는 얘기를 많이 했죠. 근데 이게 그냥 만들어진 체질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끊어지면서 하나님 안 믿어지니까 염려가 왔고 불안이 왔고 그때부터 내가 주체가 돼서 무조건 애쓰는 삶을 사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회복되면 이게 풀려요. 이제는 제 안에 성령님이 뭐라고 얘기하시냐 하면 염려가 아니라 “주님을 기뻐해라” 이런 생각을 주셔요. “주님을 기뻐해라. 주님께 모든 능력이 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삶의 체질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냐 하면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신뢰하고 의탁하고 주님 때문에 행복한 체질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이 영적으로 회복된 거예요. 한번 점검해 보세요. 주님이 보좌에 계시면서 여러분 안에 와 계신 거예요. 그분이 성령으로 믿음의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성도님 중에서 보면 너무 불안이 심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할까? 이거 지금 누구한테 잡혀 있는 거예요? 사탄에게 주는 생각에 잡혀있는 거예요. 그게 원래 성격이 아니잖아요. 믿는다고 그러는데, 삶을 보면 너무 불안이 심해요. “이것도 하면 안 돼! 저것도 하면 안 돼!” 주님이 여러분을 자유케 하기를 원하셔요.
주님이 최 장로님 내외 나가는 건을 통해서 제 동기부터 보면서 총체적인 내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인본주의 기준, 인본주의 믿음의 잘못된 현주소, 인본주의 방법 그리고 인본주의 목적... 사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내 자아의 실현도 많이 깔려 있어요. 이거 자체가 분리도 잘 안돼요. 제가 이게 비로소 보이면서 깨달아지는 게 “더 이상 내가 살면 안 되겠구나. 주님이 사셔야 하는구나.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인정해야 되는구나. 진짜로 주인을 바꿔야 되는구나.”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수진 권사님, “좀 잘 되고 있습니까? 이게 잘 되시면 굉장한 파워 풀한 삶을 사실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저는 갈라디아 2장 2절이 새롭게 와닿아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인본주의 내가 되면 안 되고 염려의 내가 되면 안 되고 믿음의 내가 돼야 해요. 감사하고 기뻐하는 내가 돼야 해요. 살리는 내가 돼야 해요. 맞습니까? 그래서 기도라는 게 뭐예요? 주인을 바꾸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게 기도입니다. 우리의 체질은 어릴 때부터 인본주의가 각인 뿌리 된 체질이에요. 절대 한 번에 안 바뀌어요.
지금 공대생들이 와 있거든요. 공대생들은 머리가 좋잖아요. 한 번 들으면 참 잘 알아들어요. 근데 오래된 습관, 오래된 각인 뿌리 체절 된 거는 절대로 머리로 아는 것으로 안 바뀌어요. 담배 피우는 사람 담배 끊는 게 그렇게 어렵잖아요. 습관화돼 있으니까, 머리로는 몸에 해롭고 이거 피면 돈 나가고 백해무익이다! 아는 데도 못 끊잖아요. 이때까지 여러분이 자기 욕구와 자기 본성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얼마나 추구하면서 살아왔는지 아세요? 거기에 대한 문제점을 전혀 인식 못 하고 갈구했고 차지하려고만 애쓰는 인생을 살았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해력보다 더 센 게 본성이고 욕구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이해되는 대로 살지 않아요. 본성과 욕구대로 살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는 주인을 바꾸는 거예요. 내 안에 실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삶을 맛보고 체험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은 발견되도록 하시는 거예요. 문제를 만났을 때, 진짜 내가 믿음으로 행하는지 아니면 내 본성으로 반응하는지 보게 하시는 겁니다. 보여야지 바꾸게 됩니다. 절대 안 보이면 절대 안 바뀌어요. 여러분 안에 주님이 안 계시면 바뀌는 게 절대 불가능한 거죠. 근데 여러분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이 삶을 계속 체험하게 되면 결국은 갈라디아 1장 20절이 됩니다. 주격과 체질이 바뀌게 됩니다.
제가 대구에서 내려오면서 아내한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여보, 나는 지금도 계속 영적 성장이 돼요. 주님이 주시는 눈과 마음과 생각을 더 갖게 하시는 것 같아요.” 현장 들어가면 제가 그걸 느끼거든요. 진정한 전환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냥 머리로 하나님 소원을 위해서 살겠다 이래서 안 살아져요. 여러분의 영이 살아나야 하고 마음과 생각이 건들어져야 해요. 그럴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거기서 말씀 실천의 삶이 나오는 거예요.
2. 진정한 전환 속에서는 나오는 말씀 실천
1) 주객도 안 바뀌고 영적 상태도 안 바뀐 채 오늘 본문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하면 안 돼요.
야고보서는 사실은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한테 쓴 편지예요. 이들은 아직 과도기적 상황 속에 있었어요. 이들은 아직 회당을 다녔어요. AD 70년이 되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잖아요. 그전까지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확실히 분리가 안 됐던 시대예요. 그러니까 크리스천이 됐는데도 회당도 나가고 주일에 주일 예배도 드리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율법을 근거로 해서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메시지를 주고 있는 거예요. 야고보서는 상당히 세밀하게 실천 사항을 얘기하고 있거든요. 근데 사실은 이것이 실천되는 원리는 뭐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삶이에요.
오늘 본문의 말씀 실천은 진정한 전환 속에서 나오는 실천이 돼야 맞는 겁니다. 사람의 지위나 소유 여부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해요. 야고보서가 주후 45년에서 48년에 기록된 성경 문서예요.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쓴 서신을 여러분이 보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 시대 상황을 우리가 모르잖아요. 스데반의 순교 직후에 박해를 직면해서 로마 전국 전역에 흩어진 성도에게 야고보서를 쓴 겁니다. 아직 그들이 토요일 안식일에 회당에 가거든요. 율법도 배우는 거예요. 회당에 신분 높은 사람, 경제력 있는 불신자 유대인들도 오는 거예요. 그리고 가난한 크리스천 신자도 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안 믿지만 부자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한테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겁니다. “여기 와서 앉으라”고, 근데 같은 크리스천인데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오면 “아무 데나 앉아” 이런 식으로 했다는 거예요. 이게 2절에서 4절의 말씀이예요.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올 때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희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이건 누가 누구한테 하는 얘기예요? 야고보가 지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얘기예요.
2) 여러분은 성령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5절을 읽어보세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왜 하나님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더 잘 믿도록 해 주셨을까요? 당시에도 굉장히 신분이 낮은 종들부터 구원을 받았거든요. 왜 하나님은 이 가난한 사람의 편입니까? 왜 가난한 사람들이 이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렇게 물어보고 있거든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의로워서 그런 거는 절대로 아니에요. 똑같은 죄인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회적 학대를 당하고 정말 생활 속에서 고통당하고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이에요. 그게 첫 번째 이유고, 또 한 가지는 이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면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집중하게 됩니다. 세상에 잘 나가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집중 안 하는 수가 참 많아요. 이분들은 세상의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인데 이런 나를 주님이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거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더 셉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6절 보세요.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지위 높고 상류층이 오면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대접을 잘했는데 왜 이 사람들이 대접한 자들을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까?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그리스도인을 못마땅히 여기는 겁니다. “저것들이 지금 기독교인이네, 저것들은 지금 율법에 안 맞아” 그러면서 이 사람들을 고소해서 법정으로 끌고 갔다는 말이에요.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나오는 말씀이에요.
8절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율법에서도 최고의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죠? 신약 성경에서는 똑같죠.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거죠.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게 첫 계명이고 그다음에 수평 관계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특별히 성도는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에는 여러 조항이 많잖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아니했다 해도 살인하면 율법 전체를 범한 게 되는 거거든요. 마찬가지로 너희가 다른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형제 사랑 안 했으면 너희는 범법자라고 말하는 겁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해요? 이들은 아직 율법 교육을 듣고 있는 시대였어요. 아직 회당에 나가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율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12~13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계명을 성으로 지키게 될 때 여러분이 자유해요. 주님 때문에 기뻐하게 돼요. 12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는데 자유의 율법이 뭘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진노와 심판하에 있지 않아요. 이제 성령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상태가 된 거예요. 이게 자유의 율법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정죄와 심판의 율법을 받는 게 아니고 자유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율법을 받은 거예요. 이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것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그 앞에 우리가 서게 되거든요. 그때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상급을 준다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이 있기 때문에 지옥은 안 가지만 부끄러운 구원이 있습니다. 책망도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너희가 긍휼이 없으면 너희가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 이 말은 강하고 경고하는 말이에요. 그러나 오히려 여러분은 도전으로 받을 수 있어요.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었으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이가 어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 8:32) 이렇게 얘기했어요. 우리에게 진짜 자유의 율법, 우리가 자발적으로 우러러 나와서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에요. 야고보서는 이렇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결론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해요? 복음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사람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껍데기 보지 마시고 속을 보세요. 그리고 나를 부인하고 갈라디아 2장 20절이 되셔야 해요. 수직적인 죄에서 수평적인 죄도 나오잖아요. 영적인 죄에서 양심적인 죄도 짓잖아요. 그래서 정말 내가 창세기 3장 6장 11장의 본성을 가진 나의 근본 뿌리 본질을 보고 갈라디아 2장 10절이 되라는 거예요. 갈라디아 2장 20절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거잖아요. 오늘 제가 최 장로님 내외가 나가면서 제가 어떤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는지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기도 속에서 나를 보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해요. 처음 믿는 사람은 아직 자기를 보는 게 안 돼요. 남만 보지 자기 별로 안 보거든요. 근데 자기를 보면서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고백하고 의탁하고 주인 삼으면 계속 영적 성장이 됩니다. 말씀 실천할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의 지대한 관심은 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고 어떤 제자로 세워지는가 여기에 있습니다. 골 1:28~29처럼, “내가 그를 전파하며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 모든 지혜로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하심이라” 이 삶의 축복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세우는 일에 여러분도 여러분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이런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