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회메세지

2026년 11월 8일 주일예배 - 썩지 않을 씨로 받은 구원(벧전 1:18~25)

현상금 2026. 11. 8. 17:00

썩지 않을 씨로 받은 구원(벧전 1:18~25)

 

https://youtu.be/a0TiOgqszII

 

 

토요일에 공대 대학원생과 다락방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간증을 했지요. 그 친구가 다락방을 하면서 두 번 정도 영접 기도를 따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네가 숙소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너 자신을 내려놓고, 진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기도를 좀 해봐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다락방을 하면서 물어보니 못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어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오늘 아침 6시쯤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데, 그 친구에게 카톡을 보낼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보냈습니다.

"어제도 말씀을 잘 들어서 감사했다. 나는 오늘 기쁨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너는 아직 못 드리고 있구나. 금주에는 네가 인본주의 인생으로, 네가 주인 되어 살아온 죄를 회개하기 바란다. 이 점이 참 중요하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속죄해 주시고 또 의를 전가해 주시고 완벽한 구원의 길을 여신 주님이 이제 네 안에 들어와 살아주기를 원하신다. 인생 최고의 축복을 주기 원하신다. 이 축복이 얼마나 감사한지 네가 깨닫기 바라고, 기꺼이 감사함으로 주님을 네 주인의 자리에 모셔 들이기 바란다. 이게 진정한 영접이다."

 

아마 지금쯤 그 메시지를 봤을 텐데, 제가 요즘 이렇게 전도하고 전도된 사람을 다락방으로 양육하면서 유익을 느끼게 됩니다. 다락방은 생명 얻은 자를 말씀으로 양육하고 확립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주일 강단 설교로만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필요를 정확히 알고 거기에 맞는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 권사님이 계시지만 권사님의 개인적인 깊은 이야기를 저와 쉽게 나누지는 못하잖아요. 제가 솔직히 권사님의 진짜 필요한 부분, 지금 영적으로 되어진 부분과 안 되어진 부분을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다락방을 하게 되면 그런 개인적인 대화가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딱 맞는 답을 줄 수 있습니다. 권사님이 자기 필요나 관심사에만 머물거나 자기가 늘 응답받는 부분에만 만족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말씀 전체에 대한 균형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성도가 균형 있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설교로만 할 수 없는 '개인화' 시키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권사님과 다락방을 한다면, 그것은 사역자들을 모아놓고 하는 미션홈의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다락방의 가장 큰 장점은 복음으로 사람을 개인화시키고 제자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신자뿐만 아니라 기존 성도인 형상이에게도, 요한이에게도 다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목사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넘어, 여러분의 내면을 솔직하게 끄집어내 놓을 수 있는 영적 관계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관계가 안 되는 사람들은 '목사님이 내 신앙에 대해서 뭐라고 하실까?' 하며 오히려 자기를 방어하고 감춥니다. 그런 관계가 되면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번 집중 훈련의 목표처럼 이런 개인 전도와 다락방 말씀 운동을 이끄는 사역자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전도 제자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통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며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즘 저는 남인애 집사님과 함께 매주 목요일 공대 현장 전도를 나갑니다. 집사님이 실제 전도 현장에 가면서 자신이 아직 안 되고 있는 부분도 발견하고, 그러면서 실제적인 전도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공대에 가게 되면 먼저 그 현장에서 우리의 영적 상태가 충분히 주님을 믿는 믿음의 상태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100% 주님이 주인 되시는 전도가 될 수 있도록 짝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다음에는 각자 전도합니다. 둘이 같이 가서 한 사람에게 딱 붙으면 상대방이 오히려 위압감을 느끼고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다가가기 위해 각자 전도합니다. 그리고 전도가 끝난 후에는 함께 포럼합니다. 그날 어떻게 전도했는지 나누고, 제가 했던 메시지나 방법, 어떤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전도했는지를 공유합니다. 사실 저는 집사님을 개인 전도자로, 또 다락방 사역자로 준비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팀 사역'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한 사람을 개인 전도와 다락방을 할 수 있는 사역자로 키우는 것, 그것이 팀 사역의 핵심입니다. 팀 사역이라는 말을 여러 부분에 쓰긴 하지만, 원래는 한 사명자를 개인 전도자와 다락방 사역자로 온전히 세우는 것이 진짜 핵심입니다. 이 팀 사역을 시키는 사람을 '팀 사역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팀 사역을 시키는 ‘팀 사역자’가 되는 셈이죠.

 

과거에 류 목사님이 이런 팀 사역자들을 뽑아서 부산의 13개 지역을 복음화하고자 했습니다. 팀 사역자가 누구라고요? 사명자를 전도할 수 있도록 만들고, 다락방 말씀 운동하는 사역자로 세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평신도를 13명 뽑아서 부산의 13개 지역으로 파송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문제들이 생겨서 온전히 실행되지 못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분이 개인 전도와 다락방까지 능히 할 수 있는 사역자로 충분히 세워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남 집사님이 그렇게 사역자로 온전히 세워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남 집사님을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새로운 사명자를 찾는다면 이것을 '팀 사역 전도'라고 합니다. 팀 사역 전도는 단순히 전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서 그 지역의 사명자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사명자를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명자를 데리고 다락방을 해야겠지요. 그것을 '현장 팀 사역'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전도 집회가 끝나면 '현팀(현장 팀 사역) 모임'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 현팀은 현장 팀 사역을 할 때 그 사명자에게 줄 메시지를 훈련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팀 사역자가 다른 지역에 가서 사명자를 찾았을 때 그 사명자를 대상으로 다락방을 하는데, 그 사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가를 돕는 것이 현팀이었습니다.

 

설명이 좀 복잡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정확히 이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나 실라와 같은 동역자와 가기도 했지만, 마가나 디모데처럼 전도및 다락방을 할 수 있는 사역자들을 데리고 타 지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누구를 만납니까? 루디아, 야손 같은 사명자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팀 사역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복잡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단계별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제 과거를 돌아보면, 저는 이런 부분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도 안 되어 있으면서 그저 현팀 메시지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단계를 내 삶에서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션홈 메시지 나오면 미션홈 메시지 듣고, 현팀 메시지 나오면 현팀 메시지 듣고 그러기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내 삶에서는 안 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이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졌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강조하지만, 여러분이 먼저 복음으로 개인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형상 집사님이 정말 귀한 기도를 했습니다. 실제 현실 문제가 강하게 압박할 때, 내가 내 힘으로 그 일을 처리하려 하지 않고 "주님, 이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시오니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셔서 감당케 해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감당하는 것,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삶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성도는 어떠합니까? 시간에 쫓기고 기도 시간이 없고 그래서 기도 못하니 영적인 역량이 밀려버립니다. 영적인 힘을 공급받지 못하니 결국 다시 어떻게 됩니까? 자기 육신의 힘으로 감당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렇게 되면 지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자기 일에 짓눌려 파김치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진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일이 그 사람을 파김치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하나 응답을 받으며 문제들을 처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그저 머리로, 이해력으로만 듣고 실제 영적 역량이 길러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믿음의 전도가 안 됩니다. 믿음의 사역도 안 되고, 믿음의 일도 안 되고, 믿음의 경제생활, 믿음의 대인 생활, 믿음의 가정 생활이 다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과 인본주의 체질로 일을 처리하면서 자기는 주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내 삶에 실제가 되면 자신이 영적으로 느낍니다. '정말 주님이 살아 역사하시는구나. 주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주시는구나. 기도가 되어지는구나. 기도로 문제들이 처리되는구나.' 이런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뼈 빠지게 일했다, 일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이런 소리를 안 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영적 역량이 길러져서 하는 일에도 승리하시고, 개인 전도와 다락방 말씀 운동을 능히 이끌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복음 전파의 가치

1) 한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복음 전파의 가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로마서 10장 14~15절의 유명한 말씀을 함께 볼까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좋은 소식(Good News)'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전파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전도 운동할 사람으로 세워서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보내셔서 전파하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마침내 믿게 하시는 것, 이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복음을 '썩지 아니할 씨'라고 표현합니다. 1장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여기서 '썩어질 씨'는 무엇일까요? 자손을 낳는 육신적 이고 혈통적인 씨를 말합니다. 이 혈통적인 씨는 자연 출생을 통해 육신적인 생명을 얻게 하지만, 결코 영적인 생명은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낳게 하는 씨를 썩어질 씨라고 한 것입니다. 반면 '썩지 아니할 씨'는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곧 복음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씨가 심기면 영적 생명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썩지 아니할 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어서 24절, 25절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풀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청춘도 결국 시들고, 여러분이 가진 부귀영화와 명예, 지위도 결국 다 떨어질 풀의 꽃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전하는 이면에는, 지금 너희를 핍박하고 있는 저 거대한 로마 제국의 권력과 영광도 결국 시들어버릴 것이라는 의미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가진 이 복음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진실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바꿉니다.

 

우리가 전도 현장에 가면 여러 가지 방해를 받습니다. 실제적인 영적 방해를 받습니다. 놀러 갈 때나 먹으러 갈 때는 영적 방해를 전혀 받지 않지만, 전도하러 갈 때는 영적 방해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거부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러 나갈 때는 마음에 부담과 긴장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전도는 정말 스릴 있는 일입니다. 영벌에서 영생으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는 일을 합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2) 전도는 천하보다 귀중한 한 영혼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씀에 나오는 '목숨'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푸쉬케(Psyche)'인데, 생명으로도 번역되지만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전도는 영원한 운명을 바꾸는 것이며, 이 땅에서부터 보좌의 배경과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는 사역입니다. 삼위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소속과 신분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영생 얻는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다가와서,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과 천국의 실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분명히 육체의 부활이 있습니다. 성도는 만물이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실제 땅을 밟고 환경과 자연을 오감으로 생생히 느끼며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니 천당을 그저 죽어서 영혼만 가는 하늘나라로 막연히 생각하지 마시고, 궁극적으로 이 땅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에덴동산처럼 감각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땅을 성도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짧은 인생은 환경과 육신에 저주가 임해 있어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에 불과하고,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땅에서 여러분은 기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이고 천국입니다.

 

반대로 불신자는 부활한 육체를 가지고 영벌을 당하게 됩니다. 이 땅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와는 철저히 격리되어, 영원한 유황 불 못에서 죽지도 못하고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주 짧고, 그 후에 들어갈 유황 불 못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베드로 전서를 수신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습니까? 그저 "늙어서 천국 가겠지" 하는 막연한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에 다 걸고 살기 때문에 영적 실상을 너무 희미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확고한 소망을 가졌기에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삶을 정말 가치 있게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행위대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 48~49절을 보면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경고합니다. 반면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황홀한 묘사가 나옵니다. 보좌에서 생명수가 흐르고 좌우에 열매 맺는 생명나무 실과들이 맺힙니다. 그곳에서 성도는 오감으로 충만히 느끼며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일입니다.

 

2. 복음 전파의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복음을 어떻게 전파해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의 소원에 내 인생 방향을 맞추는 겁니다.

복음 전파의 첫 번째 방법은, 내가 어떤 직종에 있든 내 인생의 방향을 철저히 '하나님의 소원'에 맞추는 것입니다. 직업의 목적, 돈을 버는 목적이 하나님의 소원에 맞춰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전도자로 살겠습니까? 절대 못 삽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며, 그전에 시급히 전 인류 가운데서 택한 백성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세우기를 의도하셨지만,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했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참 이스라엘이시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불완전한 임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세계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원입니다. 구약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셨다면, 지금 이 시대의 전 인류 복음화는 사령관 되신 예수님이 사도행전 1장 8절의 언약을 성취하시며 이루어가십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전도하시기에 우리도 그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 하셨고, "내가 항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내 삶, 내 직업, 내 학업이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방법입니다.

 

2) 두 번째 방법은, 전도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내 개인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제자화'가 되어서 믿음의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도가 철저히 '주님의 전도'임을 믿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전도하러 오셨고,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그 사도들의 터, 곧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우리가 세워졌고, 지금 주님이 우리를 자기의 대행자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전도'입니다. 내가 복음으로 충분히 개인화되어, 내 삶이 온전히 복음화되고 "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전도자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현장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전도입니다. 제자를 삼으려면 내가 먼저 확고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 재생산이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령 충만을 주시겠다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약속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도가 주님의 전도임을 믿고, 그 능력이 임하기까지 평상시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삶 속에서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실천하며 내 인생의 '주객과 체질'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업의 주인이 철저히 그리스도가 되고, 그 업을 내 육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역량으로 감당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이 영적 훈련을 놓치고 그저 예전에 은혜 좀 받은 것으로, 과거 구원받은 사실 하나만으로 현실에 안주하며 육신적으로 살아갑니다. 현장에서 전도자로 사는 성도가 참 적습니다. 내 삶이 아직 온전히 복음화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생활이 조금 편해지면 세상을 좇아가고, 교회에서 헌금 좀 하고 봉사 감당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잘하는 걸로 간주합니다.

 

이것이 선교 단체와 일반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선교 단체는 처음부터 한 사람을 전도해 제자로 세우고 전 세계 복음화를 목적으로 철저히 훈련시킵니다. 하지만 일반 교회는 사람들이 웬만큼 모이고 교회가 커지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기 쉽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자가 되어 전도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그저 교회에 충성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 주간을 살 때, 육신이 아프기도 하고 일상에 치이기도 하고 대인 관계에 갈등이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무엇을 점검해야 합니까? '내가 지금 삶의 주객과 체질을 바꾸고 있는가? 내가 주인 되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단순히 문제 해결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 일을 통해 내 영적인 역량과 믿음이 자라나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됩니다. 염려와 긴장으로 살지 않고, 내 동기로 살지 않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참된 영적인 힘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먼저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순종이 뒤따라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을 믿고 의탁하고, 주님이 함께 하시며, 힘주시는 것을 계속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더욱 따르고 순종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영혼이 거룩하고 깨끗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삶의 체질을 피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 6장, 11장의 옛 본성과 합리적 이성으로 사는 체질을 극복하게 됩니다. 죄를 피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런 영적 역량을 갖추게 되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복음의 눈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내 필요에 따라 사람을 취하고 필요 없으면 관계 끊는 관계가 아니라, '저 사람도 구원받고 제자로 세워져야 할 영혼이구나'라는 복음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 한 영혼이 소중하고 바르게 세워져야 하기에 물질도 쓰고 봉사도 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고린도에 들어가 전도할 때 "나는 심히 두렵고 떨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헬라 철학이 퍼져서, 사람들은 지혜로운 철학적 토론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수준에 맞춰 세상의 지혜롭고 논리적인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만을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말은 바울이 인생의 진짜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그 초래된 결과를 알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영적 문제과 그 결과를 알았기에 해결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고,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만이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복음만 말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3~5절의 말씀도 보십시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우리 육신의 본성은 우상 숭배가 극심하고 핍박이 있는 지역에 들어갈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 영적 압박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을 붙드시고 상대방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설득력 있는 논리로 사람을 믿게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도했습니다. 성령님이 마음을 감동하시고 마음 문을 여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 내 지혜와 결단으로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내가 믿게 된 것이구나" 하고 확신하게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원리는 똑같습니다. 공대 현장에 들어가서 제 논리나 언변으로 이성을 설득해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영이 거듭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철저히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입니다. 현장에 갈 때 내 본성에 오는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현장에서 "진짜 이건 삼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주님, 지금 내 속에서부터 역사하여 주사 나를 굳게 붙잡아 주시고 상대방의 마음 문을 열어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단은 전도자를 방해합니다. 전도자를 억누르고 영적 상태를 연약하게 만들어, 전도할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전도하기 싫다. 너무 부담된다. 오늘은 그냥 쉬자." 이렇게 전의를 꺾는 것이 사단의 교묘한 전략입니다. 저는 이것이 철저한 사단의 역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현장 기도를 하면서 영적 상태를 뒤집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임재하시면 "아, 이 현장을 100% 주님이 완벽하게 통치하고 계시는구나! 주님은 오늘 누가 구원받을 자인지, 누가 거부할 자인지도 다 아신다. 오늘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비하신 백성을 친히 구원하시는 시간이다!"라고 믿어지게 됩니다. "오늘 주님이 내 속에 역사하사 속 사람을 강건케 하옵시고 상대방의 마음에도 역사하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옵소서." 이렇게 100%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나아갔기 때문에, 영접의 열매가 없더라도 실망하거나 내 개인의 욕구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오늘도 나의 믿음의 전도를 주님이 기쁘게 받으신 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이 전도의 적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신앙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확실히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3장, 6장, 11장의 옛 본성과 인본주의적 자아, 자존심의 자아가 삶의 주인이 되어 살던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고백하십시오. "이제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시고,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내가 진정한 '나'임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말씀의 근원이신 성령으로 여러분의 삶에 계속 역사해 주십니다.

 

형상이가 회사 일을 다 해내면서 창업까지 겹쳐서 정말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업무 능력은 아버지보다 훨씬 탁월합니다. 하지만 항상 이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내야 한다는 긴장감과 압박감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 스트레스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인간적인 말로 위로한다고 그 짐이 가벼워지겠습니까? 형상이가 직접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내 삶에 살아 역사하시는구나!' 이 확신을 갖게 되면 삶의 체질과 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은혜를 과거에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옛 체질로 돌아가는 성도도 많이 있습니다. 신앙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수없이 설교를 들어도 그냥 늘 똑같은 말로 들릴 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그 삶의 현장에서 '증인'으로, '전도자'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여러분은 썩을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복음 전파의 가치와 복음 전파의 방법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전도는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갈 2:20이 발전되는 만큼 됩니다. 저는 그동안 복음 말씀이 내면화, 체득화, 개인화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실제 갈 2:20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10일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오늘 메시지가 적용 성취되는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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