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지체를 죽이는 전도 제자 (골 3:5~11)
한동대 1학년 학생을 만나 매주 다락방 하고 있습니다. 이 학생은 기존 교회 다니는 학생이고 몇 주 전에 종교와 복음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어요. 이 학생도 인간이 빠져 있는 이 영적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집어줘야 하겠다 싶어서 종교와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어요. 그리고 말씀 나눈 것을 항상 정리해서 저보고 카톡 하라고 부탁하거든요. 근데 잘 보내줘요. 제가 종교와 복음에 관한 메시지를 한 다음에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좀 정리해서 카톡을 보내주라고 얘기했어요. 그 질문이 뭐냐 하면 첫째 북한 정권과 사단의 정권이 어떻게 유사한지 한번 설명 좀 해봐라. 그게 첫 번째 질문이었고요. 두 번째는 원죄와 이 영적 문제 속에 빠져 있는 것이 맞다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지 그거를 한번 설명해 봐라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왜 인본주의 체질로, 인본주의 열심으로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 좀 해봐라 이렇게 카톡을 했어요. 잘 정리해서 자기가 깨달은 거를 저에게 카톡을 보내왔어요. 첫째 답변입니다. 북한 정권이나 사탄 정권의 특징은 사람들을 철저히 속인다. 그래서 아무리 성실히 또 열심히 또 착해도 그 정권에 속고 있으면은 불행한 운명이다. 이렇게 답변했어요. 맞는 거죠. 둘째는 인간이 원죄와 영적 문제 속에 빠져 있다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정확하게 얘기를 했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이 뭐였죠? 왜 인본주의 열심으로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라.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대답을 잘 했어요. 영적 문제는 인본주의 열심으로 해결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본주의 자체가 이미 속고 있는 것이고 사단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렇게 답변했어요. “우와~ 잘했다.” 칭찬을 해줬어요.
지금 교회 다니면서도 이런 걸 모르고 다니는 종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종교적 열심으로 열심히 믿으면 된다 이런 생각이 깔려 있어요. 창세기 3장에 빠진 인본주의 자아로 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우리도 오랫동안 몰랐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보는 진짜 눈이 열려야 되는데 오랫동안 인본주의 자아로 또 인본주의 동기와 열심으로 뭐든지 했잖아요. 열심히 안 하는 걸 항상 문제라고 생각했지, 열심히 하는 거는 좋은 거다. 이렇게 생각을 했잖아요. 근데 가만 보면 왜 열심을 내요. 자기 불안 염려 때문에, 또 사람한테 자기가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 내요. 인본주의는 철저히 그래요. 근데 예수 믿으면 어떻게 돼요? 구원받았으면 이게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요. 주님을 위한 마음, 주님을 향한 믿음과 또 자기 인본주의 체질 속에서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열심히 섞여 있다고요. 그게 잘 구분이 안 가요. 그러니까 제가 그런 면에서 복음과 종교를 게속 강조하는 건데요.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어요. 분명히 은혜도 받았어요. 그렇지만 자기 머리, 자기 힘으로 주님을 잘 믿으려 하는 체질도 갖고 있단 말이에요. 이거는 믿음의 체질입니까? 정확히 말해서 이건 믿음의 체질이 아니고 자기 열심이에요. 믿음의 체질은 내 안에 와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인정하고 힘입는 것이 믿음의 체질입니다.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분이 잘 되기 바래요. 자기 힘으로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 거는 성실한 사람은 더 열심히 할 수 있어요. 평상시에 성실히, 열심히 살던 사람은 예수님도 철저히 믿으려고 그래요. 근데 그게 자기 성향에서 나오는 열심이죠. 그게 종교적 체질이다. 이 말이에요. 이게 잘 분별되기바랍니다. 인간이 빠져있는 영적 문제는 그리스도와 그 성령님이 아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철저히 느껴야 돼요. 이걸 정말로 아는 사람은 자신의 창 3장의 본성과 거기서부터 형성된 체질을 딱 보는 겁니다. 보면서 “아, 내가 사단의 함정에 빠져 있었구나” 이렇게 깨달아야 해요. 사단이 이 속에서 나를 오랫동안 각인 뿌리 체질 되게 만들었구나. 그러니까 그게 인본주의 체질이거든요. 근데 그걸로 내가 예수님을 잘 믿겠다는 건 내가 주인 되어서 계속 살겠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외적인 열심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 없어요. 정말로 내가 사단의 함정에 빠진 인본주의 자아고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이구나 라는 것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 비로소 자기 부인이 돼요. 이거는 하나님을 맞서고 살아온 자아구나. 그러면서 자기의 죽음을 선언하게 됩니다. 실제로 죽지 않았죠. 그렇지만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혔음을 인정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사는 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실제 성령으로 임재 통치하는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 거예요. 그게 너무나 중요한 삶의 전환이죠. 그래서 성령의 실제 임재, 통치, 인도 역사를 통해서 성령님이 내 마음과 생각을 잡아주시고 영의 생각, 영의 말씀, 영의 깨달음, 교훈, 감동,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체질이 치유돼요. 이게 깊게 뿌리부터 치유된다면 더 좋은 거고요. 제가 계속했던 얘기예요. 이게 보이고 실제로 전환이 돼야 한다니까요.
대부분 신자도 내가 딱 주인으로 있으면서 열심을 낸다니까요. 그게 아니라는 거를 진짜로 알아야 그리스도께서 그를 붙잡고 마음껏 역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갖고 있는 두 가지 동기 있잖아요. 안전의 동기와 자존심의 동기 있잖아요. 이게 사실 하나님 떠나서 지금 잘못된 동기로 딱 지금 잡혀 있거든요. 하나님이 함께하셨으면 내가 그 안전에 대해서 염려에 그렇게 빠질 필요가 없잖아요. 정말로 보좌 배경이 믿어지고 임마누엘이 누려지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할 수 있잖아요. 사람이 사랑 안 해줘도 심지어 상처를 줘도 그렇게 꼭 상처를 받아야 됩니까? 트럼프가 뭔데 그 트럼프 왔다고 난리잖아요. 트럼프한테 왕관 씌워줬잖아요. 그거 합성해 갖고 지금 유튜브에 돌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자기를 높여주면 너무 좋아해요. 맞죠? 원래 그랬습니까? 사단이 넣어준 욕심 때문이에요. 인간은 지금 하나님도 상실했고 그 말씀의 권위를 믿는 거 진짜 안 되는 인생으로 빠져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뭐로 사냐 하면 자기 이성의 논리와 사고와 계산과 셈법으로 살아요. 눈에 보이는 것만 근거로 해서 살아요. 그러면 믿음이 안 성립이 되잖아요. 제일 중요한 게 나를 보는 겁니다.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진짜 그리스도가 주인 되는 인생을 사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주님은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돼 있어요. 어떤 상황이든지 내 안에 주인이 계시고 책임자가 딱 내 안에 계시는 거예요. 모든 능력을 가지신 주인이 내 안에 계시는 거예요. 그분이 보좌로 통치하시면서 내 안에 지금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주인이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은 승리하게 되고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섯 현장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만약에 내가 인본주의 자존심에 딱 잡혀 있으면 누가 걸면 특별히 부부간 걸면 못 참죠. 못 참으면 안 되니까 체념하고 살죠. 부부 관계가 그냥 어쩔 수 없이 법적인 관계를 깨뜨리면 안 되니까 살기는 살아요. 힘들게 살아요. 하나님이 나를 바꾸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진짜 이해가 되고 중보 기도가 되는 거예요. 다섯 현장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 사람이 위의 것을 찾는 전도 제자예요. 이 사람이 교회 제자도 되고 현장 제자도 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이것과 이어서 땅의 지체를 죽이는 전도 제자예요.
1. 땅에 지체를 죽인 것은 9절에 보면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겁니다.
1) 땅의 지체가 뭐예요?
3, 6, 11장의 본성에 체질화돼 있는 지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통치 못 받으면 이 본성 지체의 지배를 받잖아요. 땅의 지체를 죽인다는 것을 9절에는“너희가 가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여기 옛사람이라는 거는 그리스도가 죽어주신 그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의 과거 불신자 체질의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정과 사욕과 악한 종족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러분이 이 땅의 지체 다시 말해서 3, 6, 11장의 본성에 지배받아서 형성된 체질이 있잖아요. 그 결과 열매에요. 첫째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력, 탐심입니다. 목사인 제게도 이 본성과 체질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제 속에 여전히 정욕, 탐심, 음란, 사욕 다 있어요. 음란은 육신의 욕구의 대표적인 거예요. 센 겁니다. 그래서 성 문제는 센 거예요. 부정이라는 것은 음란과 상관하여 더러운 행위라고 얘기를 해요. 부정이 더럽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오” 라는 뜻이 아니고, 정하지 못하다는 뜻이에요. 사욕은 개인적인 사적 욕심이죠. 그다음에 악한 정욕은 그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람한테 나 중심으로 행하고 육신을 탐하는 그런 정욕이에요. 이것의 뿌리는 다 창기 3장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에 빠졌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게 아니라 욕심이 싹 들어가면서 인간의 포지션을 지키지 않은 거예요. 유 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지금 영원한 결박으로 큰 날의 심판까지 가둬 놓은 천사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전부 다 가두어 놓은 게 아니고 지금 공중 권세 잡고 역사하는 사단 귀신도 존재하면서도 또 이렇게 가둬 놓은 게 있다는 겁니다. 근데 여기 특징이 뭐예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그 말은 포지션을 안 지켰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다 지으시고 자기 위치와 역할을 다 주셨어요. 근데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해서 지위를 지키지 않은 겁니다. 천사가 지은 죄나 인간이 지은 죄가 똑같아요. 5절에 보면 또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상숭배의 동기랑 창세기 3장의 동기가 똑같아요. 왜 그럴까요? 자기 욕심으로 하나님을 떠났고 또 자기 욕심으로 우상을 섬기고 있어요. 그 우상이 뭐예요? 자기 욕구를 해결해 달라는 게 우상 아닙니까? 출 20:4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만을 복의 근원, 행복의 근원, 생수의 근원으로 삼는 거예요. 근데 지금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우상을 섬기고 현대에 와서는 더더욱 돈과 명예와 쾌락과 또 섹스를 우상으로 섬겨요. 6절에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돼 있어요.
7~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노여움과 아기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6절에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7절에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는 그랬는데 그 가운데는 뭐냐 하면 땅의 지체를 쫓아서 살고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가운데 살 때를 말하는 겁니다. 엡 2:2~3절도 그렇게 돼 있잖아요.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왔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같은 맥락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 두 가지 기본 욕구를 가지고 끊임없이 욕심을 내고 사는 거예요. 말씀을 순종하면 두 가지 욕구가 다 채워지는데 하나님을 못 믿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안전과 자기 명예, 성공을 위해서 욕심을 내면서 나 중심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죄를 짓게 되잖아요. 어떤 죄를 짓냐 하면 욕심을 내다보니까 8~9절의 죄를 짓는 겁니다.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욕심을 내면서 노하는 거예요. 악의를 갖는 거예요. 또 사람을 비방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결과로 나오는 열매들이죠. 우리가 죄를 짓는지 메커니즘을 잘 알아야 돼요. 3, 6, 11장의 본성과 두 가지 욕구에 딱 걸리니까 우리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단의 통로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 가지 욕구를 가지고 욕심내는 게 뭐냐 하면 물욕, 소유욕, 명예욕 그리고 성욕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겁니다. 세상은 전부 다 여기에 빠졌잖아요. 이것들로 지금 너무 부패하고 타락하고 그러잖아요. 근데 사실 우리 속에도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모습을 잘 보면 세상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을 옛사람의 특징으로 말하는 거예요. 옛사람의 행위로 얘기하는 거예요. 9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그랬어요. 이런 것들이 옛사람의 특징과 행위에요. 그리고 10절에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여기 보면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을 하는데, 벗고 입는 거는 뭐냐 하면 종교의식에 어떤 새로운 신분이나 직위에 임명될 때 옷을 갈아입혔어요. 프리메이슨도 등급이 올라가면 옷을 바꿔 입는다고요. 무슨 백작이면 백작에 해당하는 옷이 있고 사람들이 그 직위에 따라서 옷을 바꿔 입잖아요. 그런 것에 착안해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신분이 바뀌었으니까 새 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2) 저와 여러분이 신분이 바뀐 겁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헸어요.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영이 죽고 하나님을 떠나다 보니까 모든 사람이 영적 지식을 상실했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해요. 이 지식은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깨달아지고 믿어지게 하는 지식을 말하는 거에요. 그 지식으로 사람이 변화를 받게 돼요. 새롭게 된다고요.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제일 좋잖아요? 그렇지만 성령 충만해서 한때 하나님께 쓰이고 막 그랬는데, 불의 종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이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고 복음이 정립되는 자리에까지 이르지는 않은 사람들도 있어요. 은사는 받았는데 의외로 복음 정립이 안 돼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 말하는 영적 문제에 대해서 우리처럼 정리가 안 돼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은사를 받고 충만함을 받았다고 다는 아니구나. 이렇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참된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게 삼위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거예요. 여기에 모든 축복이 있잖아요. 이거 되면 우리 인생이 승리하잖아요. 제대로 알고 믿을수록 땅의 지체를 죽일 수 있게 됩니다. 제대로 모르니까 못 죽이고 그냥 따라가는 거거든요. 내가 사단의 함정인 3, 6, 11장의 본성에 빠져서 그 속에서 어릴 때부터 계속 인본주의 노력으로 살다 보니까 그게 체질되었구나! 이렇게 보여야 합니다.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짜증 나고 거기서 욕 나오고 거기서 상처받고 거기서 나쁜 습관 만들어졌구나! 이런 게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도 워낙 체질화되어서 거기에 내가 쉽게 빠지는구나 이런 게 보여야 합니다. 이게 보이는 사람은 죄의 본성과 체질을 이기게 돼요.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고 영적 체질로 바뀌게 됩니다.
2. 그러면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게 됩니다.
1) 성도들도 주님의 관점으로 보고 불신자도 주님의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정말로 영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17절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활레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시니라.”거기에는 했는데 거기란 그리스도 안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어요. 무슨 차별이 없냐 하면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것은 무슨 차별이에요? 민족적 차별이죠. 그리고 할레파나 무할레파는 뭐예요? 이거는 선민 여부의 차별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받았던 것 을 선민의 증거로 삼았잖아요. 그래서 항상 무할례자들은 상종을 안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선민 여부의 차별이에요. 그다음에 또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그랬는데 야만인은 무식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스구디아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무식한 야만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거는 무슨 차별이냐 하면 유식과 교양과 지식 여부의 차별이에요. 교회도 박사도 있고 뭐 학벌이 없는 분도 계시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돼 있어요. 종과 자유인은 뭐예요? 그거는 굉장히 그 시대에 강했던 신분적 차별이죠.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차별이 철폐된다는 거예요.
2) 그리스도 안에 차별이 없다는 사실은 위대한 선언이고 혁명적 선언입니다.
그 당시에 교회에서 어떻게 주인과 종이 같이 예배드렸겠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사무엘 무어 선교사님이 왔을 때 백정이 교회에 나왔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백정이 장로가 되니까 양반들이 그 교회 못 있겠다 하고 나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이게 오래된 차별이에요. 근데 가만히 보세요. 이 차별의 시작은 창세기 3장이죠. 사단의 욕심이 들어갔을 때부터 분열이 일어나고 차별이 시작이 된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11장으로부터 민족이 갈라지잖아요. 그러면서 국가가 설립되잖아요. 그때 평등한 시민사회가 되었습니까? 국가가 세워지면서 전부 다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 그 전쟁이에요.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갈라져요. 피지배 계층은 노예로 전락하는 거예요. 사회는 항상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가 갖춰지게 돼요.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왕 그 밑에는 귀족 그 밑에는 군인들 그다음에 평민 그리고 맨 하층은 노예나 종이죠. 노예들이 많고 왕은 하나밖에 없는 피라미드 구조 형태를 다 갖추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겁니까? 이게 창세기 3장의 결정판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런 차별의 담을 무너뜨리시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는 거예요. 이건 진짜 혁명이에요. 혁명이라는 게 뭐예요? 근본부터 뒤집는 걸 혁명이라고 그러거든요. 복음은 사람을 근본부터 뒤집고 변화시켜요. 제도까지 변혁시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복음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창세기 3장을 보는 눈으로 보면서 저 사람이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영적으로 죽거나 눌려 있고 자라나면서 상처받는 사건들을 또 당하면서 사람이 잡혀버린 거예요. 상처와 부정적인 생각과 우울한 감정과 미워하는 생각과 또 나 중심의 강한 기준과 그러면서 낮은 자존감과 센 자존심 이렇게 갖는 거예요.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는데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눈으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 육신의 본성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떨어내지 못해요. 오히려 살면서 강해져요. 한 번 팍 꽂히는 거는 빼내기 힘들어요. 근데 성령님이 보여주시면, 성령님이 여러분 마음을 감동하면 감정이 녹아져요. 나는 예수님 만나서 구원받아서 이렇게 바뀌었는데, 저 사람은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부리고 있고 지금도 안 믿고 있는 저 사람은 얼마나 애통한 사람이고 탄식해야 할 사람이냐? 오히려 그렇게 봐진다니까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앞으로 정말 유식한 사람이나 진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들어와도 사실 그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왜요? 다 똑같으니까, 다 근본이 영적 문제에 빠져 있고, 누구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면 다섯 가지 현장의 변화가 된다니까요. 개인 만남, 가정 직장 지옥이 변화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아직도 영향력을 못 주고 있는 영역이 어떤 부분인가 생각해 보세요. 그거는 누구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안 바뀌려는 고집 때문에 그래요. 아주 센 자아가 딱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마치 그거를 놓으면 자기가 너무 아닌 것처럼 될까 봐 겁나는 거예요.
결론
오늘 제목이 땅의 지체를 죽이는 전도 제자예요. 창세기 3장의 핵심이 탐심이에요. 욕심이에요. 세상은 여기 다 빠져 있어요. 우리도 빠졌던 사람들이에요. 주님은 이걸 종교 체질로 죽이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참는 걸로 이거 죽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아요. 오늘부터 작심해서 생활 스케줄 바꾸는 것처럼 그렇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은 종교 신앙이 아닌 복음 신앙에 확실히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봐야 하는데 교인도 그렇게 보고, 현장도 그렇게 보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이렇게 현장 보면 중보 기도가 되고 전도자의 마음을 갖게 돼요. 이 전도 못 하는 것도 내가 사람한테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사람 타는 게 너무 심해서 그게 안 되는구나. 하나님 나만의 전도를 가르쳐주세요. 기도하시면 돼요.
요 11장에 나사로 살리는 내용이 나와요. 요 11:33~35을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여기 보면 우는 그가 누굴까요?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다음에 눈물을 흘리셨다는데 여기서 개혁 한글을 보면 조금 표현이 달라요.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이 여기는 비통이 아니고 통분히 여기셨다고 되어있어요. 통분히 여긴다는 건 분 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장례식 가서 왜 분을 내시죠? 죽은 나사로는 삼 남매의 셋째에요. 지금 막내가 죽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죽음 앞에서 그 누이들과 사람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 왜 통분히 여기셨냐 하면 이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는 죄와 사단의 권세에 대해서 분하게 여기신 거예요. 사람을 이토록 범죄케 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잖아요. 사망 세력을 잡고 있잖아요. 그 사단과 죄의 세력에 대해서 통분히 여기신 거예요. 그리고 민망히 여기셨다 그랬는데 아까 개혁 개정에서는 불쌍히 여기셨다고 돼 있었어요. 지금 민망하다는 표현은 보통 부끄럽고 어색한 걸 뜻해요. 근데 성경에서 민망히 여긴다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가슴이 아프게 불쌍히 여기는 것이 민망히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수에 대해서는 통분히 여기시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보면서는 가슴 아프게 불쌍히 여기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끝내 우셨어요. 이 현장에서 예수님이 우신 경우는 몇 군데 안 돼요. 이 현장에서 인생의 모습을 보시면서 심령이 움직이면서 우신 거예요. 여러분이 은혜를 받아서 심령이 감동되면 눈물이 나요. 예수님이 지금 우시는 거예요. 현장을 바라볼 때 저도 종종 실수합니다. 그 사람 잘못했다고 하면 휩쓸려서 같이 비판해요. 근데 그렇게 하지 말고 진짜 그 인생을 잡고 있는 사단과 죄의 권세에 대해서는 통분히 여기고, 그 인생을 향해서는 애통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주간부터 10일 기도회가 시작이 됩니다. 오늘 10일 기도회 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통로로 쓰기를 원해요. 여러분 속에서부터 뒤집어서 그 연약했던 것들을 치유하셔서 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속에서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 아는 거 믿는 거 그분이 하실 수 있는 게 믿어져서 여러분이 그 통로로 쓰임 받기를 원하셔요. 그 도구가 되는 기도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