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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2년4월24일 주일예배 - 이사야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by 현상금 2022. 4. 24.

이사야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내래 죽어도 좋습니다에 이어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내래 죽어도 순종합니다 씨리즈가 또 있다. 내래 죽어도 순종합니다 씨리즈에는 남한에 온 북한 청소년들이 성경통독학교에서 겪게 된 얘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가며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북한 체제 속에서 부모 잃고 꽃제비로 살아온 체질이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뒤집혀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인성이 무너진 아이들이 세상을 살릴 전도자로 바뀌는 내용이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니 그렇다. 청취해 보기를 권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녀 신분 권세를 얻게 하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다. 지난 주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 드렸다. 오늘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사야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한다. 그 만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많이 나와있는 구약 성경이다. 여러 메시야 예언이 나와있다. 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사야서의 메시야 예언

1) 아들의 출생을 예언해 주셨다. - 7:14에 보면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셨는데 그 말씀은 마1:20~23에 성취되었다고 나온다.

2) 예수님이 주로 어디서에서 사역하실 것을 예언해 주셨다. - 9:1~2에 보면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을 마4:14~16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 중심으로 사역하신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지도 참조) 갈릴리 지방에 큰 빛이 비추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한 아들의 출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나온다. 9:5~7에 보면 이 아들은 비범한 분이신데 정사(통치권)을 메었다. 기묘자(초월하고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 모사(완전한 지혜를 가지신 분).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다. 평강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이다. 그리고 다윗의 왕좌에 앉아 그 나라를 굳게 세우게 되신다. 이런 통치력과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은 예수님 외에 다른 분은 없다.

3)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예언해 주셨다. - 4:17~18에 보면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인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사61:1,2절을 읽으시고 나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셨다.

4)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700년 전에 눈으로 보듯 예언해 주셨다. - 그것이 사53장의 내용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마태는 마8:17에서 예수님이 병든 자를 다 고치신 것을 사53:5의 말씀을 성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2. 어떻게 이런 예언이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가능하겠는가?

1) 하나님은 역사의 처음부터 끝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메시야 예언을 시대마다 하셨다. 하나님은 이사야서에서 예언하기 전에 다윗 언약을 맺어 주실 때 이미 오실 메시야를 염두하고 언약을 맺어 주신 것이다.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이 왕정 구할 때 그들은 불신앙하는 마음으로 구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신다. 이는 메시야를 보낼 생각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율법언약을 주셨을 때도 성막을 주시면서 메시야 보낼 계획을 갖고 계셨다. 또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노아언약 맺을 때도 방주언약을 주셨다. 최초 에덴동산에서 창3:15의 언약을 주셨을 때 이미 여인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예고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시대마다 메시야 예언을 해 주셨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내다보시면서 메시야가 이루실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내다 보신 것이다. 영적문제에 빠진 온 인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분을 준비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된 전환이 되었는가?

2) 그리스도께서 구약에 초림에 대한 예언들을 다 이루시고 지금 보좌 통치하시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성령 통치를 하시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 속에 주님의 통치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도 때로 화가 날 때도 있다. 가정에서 낼 때도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그럴 수 있다. 우리 본성은 자기 동기에 안맞거나 자기 기준에 안맞으면 답답해 하고 화를 내게 된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여러분 본성은 화가 나더라도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는 그렇지 않음을 인정해라. 여러분 본성은 불안해도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는 전혀 불안치 않으심을 인정해라. 나는 연약하지만 내 안에 성령께서는 전혀 연약지 아니하시고 모든 능력이 있으시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님은 안그럼을 고백하고 의탁하면 승리할 수 있다. 대부분은 육신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느낌과 감정과 생각대로 산다.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살면 진다. 여러분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통치하고 계시다. 이걸 자꾸 인정하고 전환시켜야 한다. 여러분이 과거 사탄의 직접적 통치를 받았다면 이제 주님의 직접적 통치를 받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속에서 직접적 통치를 강하게 해 주시며 능력있게 해 주시는 것을 믿는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여러분 속에 주님을 믿어야 한다. 13장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고향에서 환대를 받지 못하셨다. 거기에 보면 사람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되어있다.

 

3. 이긴 싸움

1) 십자가에서 다 이겨놓으신 주님이 우리보고 보장된 승리의 싸움을 하라는 것이다.

7족속31왕을 정복 후 미리 땅 분배해 주었다. 하나님 소원이 뭔지를 알고 승리 보장된 싸움을 하라는 것이다. 가나안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싸워주실 것을 믿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하면 지게 된다. 눈에 보이는 현실 상황은 녹록치 않다. 아낙 자손도 있었고 철병거도 있었다.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판단하면 지게 된다.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하면 속게 된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 진 것이다.

2)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현장에서, 문제나, 일 앞에서 승리 보장된 싸움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함께 하사 싸워주시는 싸움을 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속에서 직접적인 통치하사 싸워주시고 역사해 주시는 방법으로 일 처리, 문제 처리 하라는 것이다. 전도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적 가나안 정복을 해야 한다. 주님을 대행하는 것이다. 근데 전도는 어려워. 저 사람은 안믿을 거야, 저 사람은 인상이 안좋아, 내가 회사에서 전도해서 불이익 당하면 안되지, 내가 전도하면 친구들이 뭐라 생각할까 등 사람 생각과 육신의 본성과 느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해서 싸우지 못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전도치유 받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싸움이요 주님이 내 속에 함께 하사 싸워주시는 싸움이다. 흑암은 꺽고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건지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안받아 드려도 괜찮다. 그 사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 동기 불만이나, 낙심에 빠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 중보기도할 수 있다. 설사 상대가 안믿어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할 사명이 있다.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한 것이요. 너희를 영접지 않는 것은 나를 영접하지 않은 것이라 하며 심판 날에 소돔 고모라가 견디기가 쉬우리라 하셨다.

 

결론

하나님은 처음부터 메시야를 약속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통해 출바벨론이 되고 교회를 통해 전 세계가 복음화될 것까지 내다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문제가 해결되고 이긴 싸움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된 전환이 안되면 지게 된다. 참된 전환이 안되면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싸움이 안된다. 여러분은 염려가 합당치 않고 자기 힘이 필요치 않다. 여러분은 항상 여러분 속에 직접적 통치, 현재적 통치하시는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신뢰하고 기대하며 의탁할 수 있다. 주님의 권세를 누릴 수 있다. 오늘 성례식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누릴수록 성찬의 의미가 더 깊게 더 의미있게 와닿게 된다. 오늘 그런 성찬식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