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역사를 보는 눈(삿2:1~10)
우리는 한국교회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보고 있다. 타락한 목회자들, 수많은 분열과 세속화 그리고 종교통합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한국 교회의 위기상황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2000년대부터 20,30대 기독교인 수가 급감하고 있다고 했다. 사사기의 전철을 밟기 쉽다. 사사 시대의 특징이 말씀을 심령으로 받지 못하므로 오는 영적무지와 가나안 죄에 대한 영적무감각과 육체화와 혼합종교라고 했다. 사사기는 3,6,11장을 극복 못하면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 그 언약에 오직이 되면 12가지 체질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약사관으로 한국 교회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다.
1. 신사참배와 6,25
1) 신사참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우리나라를 황국 신민화(천황 나라의 신하) 시키는 일환인 것이였다. 교회에다가 천황의 사진을 걸어놓도록 하였다. 교회 안 동쪽에 가미나다라는 우상단지를 두고 절하게 했고 12시 동방요배를 했다. 조선신궁은 1925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세워졌다. 1930년 쯤 감리교, 카토릭이 국가의례로 받아드렸다. 1935년 경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본격 강요했다.
시대배경을 보면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중일전쟁 터진 다음 해인 1938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1938,9,9 27회 총회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했다. 목사님들이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했고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세례를 받기도 했다. 모든 교단이 신사참배 가결했다. 유일하게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반대를 가결했다. 항거한 사람은 주기철, 손양원, 박관주 장로- 안이숙(일본 의사당에 들어가 유인물 투척, 박장로 평양감옥에서 순교, 안이숙은 해방 후 석방 도미해서 김동명목사와 결혼), 최봉석 목사(예수 천당), 최상림(경남노회장), 이기선(평북출신 공산당에 의해 죽음), 주남선 한상동 목사(주목사 경남 거창, 한목사 부산 초량교회 두 분은 해방후 출옥) 이런 분들이다.
2) 6,25 전쟁의 교훈
우리는 6,25전쟁을 언약사관의 관점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솔로몬 시대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그 아들 때 남북으로 분단된 것과 유사하다. 6,25도 일제 말 신사참배의 죄에 대한 결과와 무관치 않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상숭배국이 되었고 최고 기독교 박해국이 되었다. 김일성 김정일을 신격화하는 공산정권의 수도가 되었다. 김일성 김정일 동상 중 가장 큰 만수대 동상이 장대현 교회 터 위에 세워져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태양신으로, 하나님으로 섬기고 김정일까지 태양으로 받들고 있다. 남북이 다 징벌 받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남한을 보호하신 면이 여려 면에서 나타난다.
(1) UN군 참전이다. -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시 소련 대표가 자동차 고장으로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16개국 참전과 68개국이 물자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역사상 처음이였다. 미군 참전은 투르만 대통령이 결정했다.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미국 교회의 역할이 컸다. 미군은 약 170만명이 참전해서 3만7천명이 죽고 10만명이 부상당했다.
(2)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이다. - 성공률 5000분의 1이라고 한다. 0.1프로의 가능성도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부산에서 목사 장로 구국기도회가 있었고 그 기도회가 끝나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던 것이다.
(3) 백두산호가 북한의 부산상륙작전을 실패케 만들었다. 북한군의 부산상륙작전이 성공했다면 6,25는 조기에 끝났을 것이다. 부산항이 있었기에 UN군이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 이것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모든 전쟁사를 보면 그 주어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적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다.
2. 대한민국 건국과 6,25 이후 71년의 역사
1)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의 기초를 까는데 쓰임받았다.
(1) 기독교의 확산이다 -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회심(1899,1)하고 처음부터 조국을 위해서 기도했고 100만명 기독교인을 달라고 기도했다. 대통령이 된 후 기독교 확산을 위한 국가적 시스템을 깔았다. 교목 경목 군목 원목 형목제도를 만들었다. 기독교 방송, YMCA를 국고로 지원했다. 그 결과 1950년에 70만, 60년 초 120만 기독교인이 되었다.
(2) 토지개혁이다. - 갑오경장(1894년) 때 노비제도가 폐지 되었다. 그러나 지주가 다 양반들이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유는 없었다. 이 폐단을 폐지하기 위해서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년동안 150프로 대금만 값으면 자기 소유되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국가가 먼저 돈을 빌려주었다. 3년동안 국가에 그 돈을 갚게 했다. 토지개혁(1950,3)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되니깐 그것이 공산화가 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3) 교육혁명이다. - 교육은 양반만 받을 수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학교 가 본 사람이 14프로였다. 대통령이 되어 10년만에 취학아동이 96프로가 되었다. 거의 전국민이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을 읽도록, 양반제도를 깨뜨리기 위해, 선진국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유교제도 잔뿌리를 뽑아내는 작업을 했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시행했다. 1948년 5,1 총선부터 바로 전국민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외국 유학간 사람이 500명이였다. 근데 10년 만에 미국에만 2만명을 보냈다. 이승만 외교 덕으로 이들이 미국에 가서 장학금 받고 공부했다. 2만명이 엘리트로 준비되게 한 것이였다. 한국의 경제발전의 이유는 이승만이 토지개혁과 교육혁명으로 사람을 준비했다. 이런 바탕 위에 박정희가 경제정책을 잘 쓴 것이였다.
(4) 한미 동맹이다. - 1897년 경에 벌써 이승만은 일본이 조선을 잡아먹고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고 마지막에는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을 지금 미리 막아야 한다.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했다. 국제법을 전공한 후 이것을 더 확신했다.(조지워싱톤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5년만에 마침) 40년 동안 미국 전역을 이런 강연을 하고 돌아다녔다. 1941년에 일본의 내막을 폭로하는 책(제펜 인 사이드 아웃)을 출판했다. 6개월 후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미국이 그 때부터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을 통해 결국 조선이 독립할 것을 안다. 그래서 미리 친한파 인사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했다. 그 때 미군 소령이였던 맥아더를 알게 되고 그와 깊게 교제한다. 6,25시 그는 UN군을 이끌고 한군전에 참전했다. 더 중요한 것이 6,25전쟁 이후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온갖 물자와 기술을 미국에서 지원받게 되어 경제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5000년 동안 천번 정도 전쟁이 터졌다. 70년 이상 전쟁이 없었던 것은 처음이였다.
2) 6,25 이후 71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62년부터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행되었다. 경제 발전과 함께 70년대, 80년, 90년대 까지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73년 빌리그레함 전도집회, 74년도 엑스폴로 성회가 있었고 80년도 민족복음화 대성회 같은 대형 집회가 여의도에서 모였다. 그 후에도 제자훈련, 전도훈련의 붐이 일어났었다. 대학생선교단체와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한국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여러 대통령이 그 동안 선출되었지만 그들의 뜻대로 이 나라가 좌우된 것이 아니였다. 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올바른 역사관 곧 언약사관을 갖고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를 하나님의 눈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수많은 문제거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다.
결론
1. 하나님은 공산주의와 개인을 우상화하는 북한과 자유민주주의와 하나님을 섬기는 남한과 두 체제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해방시 북한 교회가 남한보다 3배가 많았고 경제력은 40배나 좋았다. 지금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을 이은 김정은까지 3대 세습의 신정국가다. 경제력은 남한의 백분의 일이다. 우상숭배의 결과의 차이를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한을 버리지 않으셨다. 러시아 벌목공들, 중국으로 탈북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게 되었다. 그 중에 잡혀서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다. 90년대 초까지 기독교인구 3000~7000명으로 잡았다. 지금은 20~25만으로 추정된다.
2. 2000년대 이후 20,30대 종교인구가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사사기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영적 무지와 영적 무감각과 육체화와 종교혼합주의 시대다. 언약회복과 기도의 영적 체질만이 승리와 정복의 길이 된다. 여기에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의 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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