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역사를 보는 눈(삿2:1~10)
남북 역사를 보는 눈(삿2:1~10)
우리 후대에 대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겠는가? 성경의 역사관은 언약사관, 구속사관이라고 말씀드렸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모세의 관점이고 여호수아의 관점이였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 시대 사람들이 다 죽고 나서 그 후 세대의 상황에 대해 나와 있다. 하나님의 전쟁을 경험치 못한 신세대가 일어났을 때 상황이다. 이들은 분명히 언약을 전달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선조로부터 받은 절대 언약을 지키지 아니했다.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혼인하고 왕래하며 가나안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여호수아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자를 보내사 말씀하셨다. 너희가 왜 내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느냐? 너희를 위해 다시는 그들을 내어쫒아 주지 아니하겠다고 하셨다. 너희가 남겨두고 왕래한 가나안 족속들이 너희의 옆구리의 가시가 되고 그 신들이 너희 올무가 될 것이라 하셨다.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말씀을 심령으로 받지 아니해서 그렇다. 그 결과 언약과 기도를 놓치고 현실안주해서 그렇다. 3,6,11장과 13,16,19장의 본성과 체질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사사기의 특징을 보면 1) 말씀을 심령으로 받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언약의 말씀에 대한 영적무지에 빠졌다. 2) 진멸해야될 가나안 현장의 죄에 대한 영적 무감각에 빠졌다. 3) 이에 따라오는 종교혼합주의와 육체화에 빠졌다. 오늘날 교회도 언약과 기도 놓치면 똑같은 상황이 온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염두해 두면서 오늘 말씀을 받기 바란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지난 주에 우리나라 선교사 입국과 대부흥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오늘은 이어 일제 말 신사참배와 6,25사변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과 그 후 73년간 극명하게 갈리는 남북의 역사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1. 신사참배와 6,25
1) 신사참배
1931년에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제는 점차 신사참배를 사립학교와 교회에 요구하였다. 감리교와 카토릭에서 신사참배를 먼저 국가의례로 받아드렸다. 신사는 사람과 동물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신사보다 큰 것을 신궁이라고 한다. 천황가의 조상신인 천조대신(보통 태양신)을 섬기는 일을 하는 곳이다. 1936년에 일제는 사립학교 교장 회의 전에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하도록 했다. 교회에 대한 요구도 강해져서 정오 12시가 되면 예배 중에라도 동방요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교단마다 신사참배를 받아드렸고 마지막에 장로교가 받아드리게 되었다. 1938,9,9에 27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렸다. 이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이다. 각 노회 총대마다 경찰이 두 명씩 동행했다. 주기철 목사는 이미 체포해 놓은 상태였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에 대해 불법임을 외쳤지만 결국 그 날 신사참배는 결의되고 말았다. 총회 점심식사 시간을 이용해서 총대들이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했다. 석 달 후에는 총회가 신사참배 할 것을 전국 교회에 하달하였다. 목사님들 중에는 한강에 가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세례를 받는 일도 있었다. 유일하게 신사참배 반대 가결한 노회가 있었는데 경남노회(노회장 최상림 목사)가 이를 반대하였다.
2) 6,25 전쟁의 교훈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제일 미워하신다. 그 결과 일제의 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원자폭탄 투하로 나타났다. 일본은 두 방의 원폭을 맞으면서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945년8,15 해방과 함께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았는데 1948년 9,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미군의 신탁통치를 받은 남한은 1948년 8,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2년도 채 지나기 전에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났다. 북한은 당시 남한 경제보다 40배 우위에 있었다. 소련 지원 하에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남침을 도발했다. 2달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유엔군이 참전과 중공군 개입으로 결국 전쟁은 3년만에 휴전하게 되었다. 6,25로 죽은 사람은 민간인 합쳐서 450만명이다. 천만명의 이산가족을 낳게 되었다. 그 후 남북한 체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어찌 육신적 관점으로만 봐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역사를 언약사관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분명히 이것은 이스라엘이 솔로몬 왕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남북으로 갈라진 것과 유사하다. 우리나라도 일제 말 신사참배 죄에 대한 결과와 무관치 않다. 남한보다 교회가 세 배 많았던 북한은 선전용 교회만 남았고 지금까지 최고 기독교 박해국이 되었다. 김일성 김정일을 신격화하여 우상숭배하고 있다. 남한은 전국에 교회가 세워졌고 도서 산간 벽지 교회가 없는 곳이 없다. 세계 선교 2위국이 되었고 세계 수출 5위, 경제력 10위가 되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다.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하지 않았는가? 지금 그 평양은 북한 공산정권의 수도가 되었다. 남한의 경남 노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고 했는데 6,25 때 유일하게 침략당하지 않은 곳이 경남지역과 일부 경북지역이다. 6,25 시 남북이 다 징계를 받아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남한에 베푸신 은혜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1) UN군 참전 결정 여부를 위해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다. 그 때 소련 대표가 자동차 고장으로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16개국 참전과 68개국이 물자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UN의 이같은 규모의 결정은 역사상 처음이다.
(2) 인천상륙작전은 성공률 5000분의 1이라고 한다. 1프로의 가능성도 없었다. 그 때 부산에서 목사 장로 구국기도회가 있었고 그 기도회가 끝나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UN군 사령관 맥아더는 이승만과 오랜 친구였다. 전쟁 일어났을 때 이승만은 막바로 맥아더에게 전화걸었던 것이다.
(3) 북한은 애초 군함을 이용해서 부산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했다면 대한민국은 진작 끝났을 것이다. 당시 남한은 유일하게 1대의 전함을 갖고 있었다. 그게 백두산호였다. 북한 전함이 동해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포항 영일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함은 우리 전함을 무시하고 막바로 부산까지 내려갔다. 백두산호는 부산까지 따라가서 3000미터 거리에서 포를 20발을 쐈는데 하나도 맞지 않았다. 500미터 전방까지 근접해서 한 방을 쐈는데 그것이 정중앙에 맞았다. 이 교전에서 아군은 2명 죽고 적함은 침몰되어 다 죽었다. 이 일이 아니었으면 남한은 쉽게 점령당했을 것이다. 해군을 창설한 사람이 손원일 제독이라는 절실한 기독교인이다.
2. 대한민국 건국과 그 후 73년의 역사
1)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하나님은 이승만을 우리나라 건국과 나라의 기초를 까는데 쓰셨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예수님 믿은 후 거의 50년간 기독교 건국의 꿈을 꾸고 1948년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8,15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연설을 했다. 성경책 위에 손 얹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3천만 동포 앞에서 선서합니다 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세우는 일에 잘한 일 4가지를 들 수 있다.
(1) 기독교의 확산이다. – 그는 기독교 교육에 힘썼고 기독교 보급을 위해 국가 시스템을 까는 일을 하였다. 교목 원목 경목 군목 형목제도를 만들었다. 기독교 방송, YMCA를 국고로 지원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100만 기독교인을 놓고 기도했는데 1950년에 70만, 1960년에 120만이 되었다.
(2) 토지개혁이다. - 갑오경장(1894년) 때 노비제도가 폐지 되었다. 그러나 토지 지주가 다 양반들이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유는 없었다. 실질적인 자유를 주기 위해서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6,25 전 1950,3월에 이루어졌다. 이것이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로 거론된다.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갖게 되니깐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것이다.
(3) 교육혁명이다. -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학교를 가 본 사람이 14프로였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 10년 정도가 되어 취학아동이 96프로가 되었다. 거의 전국민이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외국 유학 간 사람이 500명이였다. 근데 10년 만에 미국에만 2만명을 유학 보냈다. 한국 경제발전의 이유는 이승만이 토지개혁과 교육혁명으로 사람을 준비했다. 1948년 건국시 전국민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이런 바탕 위에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잘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신자 12가지 상태에 그대로 빠져있었던 사람이다.
(4) 한미 동맹이다. - 이승만이 1897년 경에 벌써 일본이 조선을 잡아먹고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고 마지막에는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예상을 하고 미국 유학시절부터 친한파 인사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했다. 그 때 미군 소령이였던 맥아더를 알게 되고 그와 깊게 교제를 하였다. 전쟁 이후에도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의 결과로 온갖 물자와 기술을 지원받게 되어 경제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후에는 전쟁이 없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비약적 경제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된 것이였다. 우리나라 5000년 동안 천번 정도의 전쟁이 터졌다. 70년 이상 전쟁이 없었던 것은 처음이였다.
2)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경제개발은 62년도부터 시작되어 70년대에 한 참 이루어졌다. 경제개발이 한참 이루어지고 있었던 7,80년대에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73년도 빌리그레함 집회, 74년도 엑스폴로 성회, 80년도 민족복음화 대성회 같은 대형 집회가 열렸다. 그 후에도 제자훈련, 전도훈련의 붐이 일어났었다. 또 대학선교단체들이 기여했었고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그간 여러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수행했지만 그들의 뜻대로 이 나라가 좌우된 것이 아니였다. 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축복 여부가 언약갖고 있는 교회에 달려있다. 우리는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를 하나님의 눈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수많은 문제거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다. 교회를 무너뜨릴려는 세력도 막 일어나고 있다. 그건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잡으라는 뜻이다. 복음의 회복운동을 위해 우리 교단을 세우신 것이다.
결론
6,25 이후 지난 71년 동안 하나님은 공산 독재하며 김일성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북한과 자유민주주의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남한과 두 체제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한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우리는 북한에 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2000년대 이후 20,30대 종교인구가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사사기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영적 무지와 영적 무감각과 육체화와 종교혼합주의 시대다. 여기에 우리 교단과 여러분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언약회복과 기도의 영적 체질만이 승리와 정복의 길이 된다.
'본교회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7월 4일 맥추감사주일 - 옷니엘과 7대흐름(삿 3:1~11) (0) | 2021.07.04 |
---|---|
2021년6월30일 수요예배 - 남북 역사를 보는 눈(삿2:1~10) (0) | 2021.07.04 |
2021년6월23일 수요예배 - 올바른 역사의식 (0) | 2021.06.25 |
2021년6월20일 주일예배 - 올바른 역사의식 (0) | 2021.06.20 |
2021년6월16일 수요예배 - 결단의 촉국 (0) | 2021.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