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문제와 그리스도 아는 사람만 가능한 일(골 1:13~14)
영적 문제와 그리스도 아는 사람만 가능한 일이 있어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인간의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 문제의 가장 뿌리는 영적 문제죠. 영적 문제가 다른 게 아니고 인간이 죄에 빠져서 영이 죽고 사단의 지배 당하는 운명이 된 것을 우리는 영적 문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창 3장에 보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사탄에게 속아서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돼 있어요. 죄책감으로 두려움이 온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인간에게 두려움과 불안이 시작이 된 거예요. 창 1, 2장에는 그 어느 곳에도 두려움과 불안이 없었습니다. 영이 죽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이제 두려움과 불안 또 염려, 시달림, 각종 정신병 같은 것들이 생기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범죄에서 영이 죽고 사탄에게 잡혔을 때부터 인간은 불안한 영적 상태가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예요. 마음 상태에 영향 미치게 되는 거예요. 마음이 불안하면 생각 상태에도 영향을 당연히 주죠. 그래서 불안한 영적 상태가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근데 인생에 고난이 오잖아요. 또 문제와 충격이 오잖아요. 그때 어떻게 됩니까? 잡히게 돼요. 확 불안이 잡히게 되고 충격에 잡히게 되고 또 사람이 그때 자기 살기 위해서 독한 마음을 품든지, 악한 생각을 하든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현실 문제가 크지 않아도 가문을 통해 내려오는 영적 문제가 큰 집안이 있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드렸습니다. 그래서 현실 문제가 크지 않아도 이런 가문은 정신병이 올 수 있어요. 이건 순수하게 영적 문제로 말미암는 정신 문제죠. 무속인 가문, 종갓집 가문의 그 후손에게 이런 것들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볼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왜 먹었냐?” 이렇게 물었어요. 어떻게 대답했어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렇게 물으시니까 아담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다고 대답을 헸어요.” 핑계와 미움과 원망도 이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우리 주특기가 핑계 대기 잖아요. 핑계, 미움 원망이 이때부터 시작된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이제 에덴동산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 실현시키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 당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주가 오게 된 거예요. 저주 중에 가만 보면 여자만 당하는 아주 큰 고통이 있어요. 그게 뭐예요? 여자만 출산의 고통을 당하죠. 짐승은 인간만큼 출산의 고통을 크게 당하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여자는 진짜 유난히 당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예요? 어떤 메시지가 여기 있어요? 가장 여인에게 가장 큰 축복이 가장 큰 고통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죄가 이렇게 만든 거예요.
그리고 창 3: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내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내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여기 남편을 원한다는 말씀이 있죠. 이 말은 강한 열망이나 욕구를 의미해요. 그냥 단순히 원한다가 아니라 강한 소유하고자 하는 그런 열망이나 욕구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이 잘 빠지기가 쉬운 게 뭐냐 하면 하나님 잘 못 누리면 남편에게 집착하거나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돼요. 여러분 남편을 소유하고 싶죠? 남편이 너를 다스린다는 말도 있죠. 이건 뭐냐 하면 남편이 군림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말하는 거예요. 한쪽은 집착하고 자기 소유로 딱 잡고 싶어 하고, 한편은 군림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이때부터 부부 관계에 고통이 시작된 거예요. 서로 배려하는 부부 관계가 아니에요. 지금 이런 것들이 다 창 3장에서부터 시작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그 말씀 있죠?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내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내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으리니 네가 그곳에서 취함을 입었으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 여기 보면 그야말로 환경의 저주와 죽음의 저주가 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세상에 삼 저주가 온 거예요. 첫째 하나님을 떠나서 영적인 저주가 오게 된 거예요. 둘째 환경의 저주가 왔고 셋째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저주가 오게 된 거예요. 이 땅에서 그렇고 죽어서는 영원한 형벌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불안한 마음과 목마름을 남편이나 자녀에게 집착해요. 그리고 돈과 명예와 쾌락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 집착은 고통과 중독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중독 시대예요. 결국 중독은 정신 문제요, 영적 문제예요. 이것이 다 창 3장의 결과다 이 말이에요.
1. 창 3장 이해가 돼야 인간 이해가 돼요.
1) 창 1장, 2장에는 수고와 고통이라는 단어가 없었어요.
창 3장부터 시작이 된 거죠. 창 3장 사건 이후에 에덴동산에서 내침을 당하고 그 후에 살기 위해서 인간은 몸부림쳐야 돼요. 불신자가 이제 몸부림치면서 문명을 앞서 발전시킵니다. 신자보다 불신자가 문명을 앞장서서 발전시킨다는 것이 성경에 보여요. 그러나 인생은 문명을 막 발전시키면서도 피곤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피곤하다. 죽겠다.” 그 얘기를 뭐 입버릇처럼 하잖아요.
여러분 창 4장에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은 거부당합니다. 그러자 몹시 분하여서 안색이 변하여서 결국 아벨을 죽여요. 아벨이 미운 거죠. 벌써 시기심이 딱 들어가게 되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분노 조절 장애죠. 가인이 분노 조절이 안 돼서 동생을 돌로 쳐 죽인 거예요. 요일 3:12에는 분명히 이렇게 얘기해요.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는 행위는 의로움이라.” 그 아우는 의로워서 하나님이 인정하고 자기는 악해서 인정 못 받으니까 못 참는 거예요. 악한 자에게 처했다고 했는데 악한 자는 사단이에요. 창 3장 문제에 빠진 부부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이 자식은 영적인 문제 속에서 태어나는 거죠.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일대 만에 막바로 살인이 저질러지게 되었다 이 말이에요. 뭐 오래 가지도 않아요. 우리가 영이 죽고 흑암에 딱 잡히면 우리가 순식간에 바뀌어요. 여러분 그런 체험이 있으세요? 여러분 영적인 감각을 딱 잃어버리면 막바로 타락합니다.
이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에 창 3장의 문제에 빠진 두 가문이 만나서 계속해서 결혼하고 계속해서 후대를 낳습니다. 가문을 통해서 영적 문제가 계속 자손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상 숭배하게 되잖아요. 우상숭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사단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성을 가지고 자기를 위한 신을 찾게 만들고 우상숭배를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지역과 국가와 가문과 부모를 통해서 지금까지 창 3장의 영적 근본 문제는 후손에게 전달되는 거예요.
2) 우리는 이런 나 자신과 세상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해요.
영적인 눈으로 이걸 확실히 봐버리게 되면 오늘 기도하셨지만, 가치관 달라져요. 그리고 이 눈을 확실히 뜨지 못하면 육신적으로 살면서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사는 그런 식으로 살아요. 확실히 영적인 눈이 열리면, 창 3장의 눈과 그것을 해결하시는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이 눈이 없으면 나 자신은 물론 사람을 이해 못 해요. 여러분, 중독자나 가정 파괴자나 강간범이나 살인자들 이해가 잘 됩니까? 이해가 잘 안돼요. 이분들이 다 영적 문제로 말미암은 정신 문제예요. 잡힌 거예요. 영적 문제를 모르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상태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행동은 그 마음 상태에서 나오는 거예요. 정신 상태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정신 상태와 영적 상태를 잡아주면 그 사람이 바뀌는 체험을 할 수 있어요. 창 3장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봐야지 이해도 되고 살릴 수도 있는 거예요.
저는 이게 참 안 되었던 사람이에요. 저 자체가 영적 문제 가운데 살았던 사람이에요. 근데 내가 그렇게 영적 문제에 빠졌다 라고 생각을 못 하는 거죠. 왜요? 지성은 멀쩡하니까, 합리성도 있겠다. 또 자기 나름대로 예의범절 갖추고 교양이 있겠다. 그리고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근본적으로 진짜 영이 죽어서 사단의 운명 속에 있었던 인생이다. 이게 확 깨달아져야 돼요. 영적 문제 가운데 태어난 걸 모르고 저 같은 경우도 인본주의 자존심이 세잖아요. 그 인본주의 자존심을 갖고 평생 나를 방어하고 처세하면서 살았어요. 나의 생존의 동기와 사람한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한 동기로 산 거예요. 은근히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고 또 내 기준으로 사람들을 다 판단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런 제가 창 3장의 영적 문제를 알고 그걸 해결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된 거예요. 이걸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심령적으로 딱 와야 돼요.
2. 예수님은 최고 범죄자까지도 위해서 죽어주셨어요.
1) 세상에 최고 범죄자가 당하는 그 저주와 형벌의 자리까지 예수님이 내려가신 거예요.
십자가에 고상한 사람이 죽습니까? 보통 아니죠. 주로 흉악범이나 상대 적들을 죽이는 제도죠. 그런 자들까지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자리에 내려가신 거예요. 그러니 중독자도 살릴 수 있는 거예요. 살인자도 살릴 수 있는 거예요. 전과자도, 강간자도, 살인범도 살릴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꺼리게 돼요.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이런 거리낌이 있잖아요. 그런데 뭘 알아야 되나요? 나도 영적 근본 문제가 같다는 걸 알아야 돼요. 계속 얘기하지만, 나도 영적인 문제가 덮친다든지 아니면 어려운 환경이 계속 정신 차리지 못하도록 생기면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어요. 근데 결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우리가 창 3장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영적 문제가 커 서 정신 문제가 되고, 그게 가정 문제가 되고, 사회 문제가 되어요. 이제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이해가 잘 돼야 해요.
주님은 이런 사람들조차도 그 무너진 자리에서부터 그를 용서하시고 받아내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실제로 주님은 그런 사람을 만나주셨어요.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가장 사람들이 거리감 두고 질시하고 안 좋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단골로 만나주셨어요. 만나서 어떻게 하셨나요? “네가 이런 수준이 되면 너를 용서하고 구원해 줄게” 이렇게 얘기 안 하신 거예요. 그 무너진 그 자체로 용서해 주셨어요. 받아주셨어요.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거예요. 죄사 함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주면서 생명을 얻게 만드시고 성령으로 치유 회복시켜 주시는 일을 하신 거예요. 무너진 사람도 치유 회복해서 주님은 제자로 삼으시는 것이에요. 이거 이게 복음의 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이에요.
2) 우리도 주님의 눈과 마음을 갖고 구원 역사의 통로가 되길 원하시는 거예요.
기도의 발전 단계에 대해 지난주에 얘기했는데 계속 기도의 발전 단계를 통해서 영적인 눈이 자꾸 열려야 해요. 그러면서 진짜로 창 3장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품을 수 있어요. 이런 게 전도자로, 제자로 준비되는 과정이죠. 육신의 본성은 미운 상대 또 내 기준에 못 미치는 상대, 이런 사람들을 안 좋아해요. 그리고 뭐 진짜 사회 범죄자나 강도나 살인자들 이런 사람들은 꺼리지, 그 사람들에 대해서 나랑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을 받아내고 답 줄 수 있고 이런 거 못 해요. 왜요? 내 본성과 100% 안 맞아요. 여러분 속에 성령의 확신과 은혜와 능력 주셔서 이런 일을 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제일 무너진 사람이 영적 문제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되면 제일 확실한 증인이 될 수 있어요. 제일 우리가 “심하다”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근데 그 사람에게 은혜가 제대로 임하여서 영적 문제와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이 사람은 큰 사명자가 돼요.
3. 구속의 교리
1) 오늘 읽은 두 구절은 구속 교리의 핵심입니다.
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성냥 곧 죄사 함을 얻었도다.” 이 말씀이 구속 교리의 핵심이에요. 구속이라는 거는 “건질 구”에, 속은 “갚을 속”에요. 그러니까 죗값을 치르고 구해낸다는 말이 구속이에요. 여기 보면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속량과 구속은 같은 뜻이에요. 속량이란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주는 걸 말해요. 거기에 쓰이는 돈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이런 구속의 교리는 어느 종교에도 없어요. 세상에 어느 종교에도 구속의 교리가 없어요. 전부 행위 종교이고, 기독교에만 유일하게 있는 게 이 구속의 교리예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배제 학당을 다녔잖아요. 지난번에 우리 민규랑 배제 학당 다녀왔는데 청년 이승만은 이 배제 학당에서 영어와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에 대해서 배웠어요.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베제 학당을 세웠거든요. 선교사님으로부터 이 구속의 교리, 십자가의 대속의 교리를 들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어떻게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나의 죄를 대신 치른다고? 그럴 수 없어!” 도무지 이해가 안 됐어요. 사실 머리로 이해 안 되죠. 그러다가 1898년에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한성 감옥에 투옥이 됐어요. 그 죄명이 고종 폐위 사건에 가담했다는 거예요.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고종은 하야해야 된다. 이거를 신문 기자가 돼서 글도 쓰고 또 그런 운동을 한 것이 걸린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형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종신형을 받게 돼요. 그러면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어요. 그때 선교사님이 성경책을 감옥에다 집어넣으셨어요. 이승만이 그때 비로소 제대로 읽는 거예요. 성경책을 읽는데 어느 날 깊은 영적 체험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고 이게 되는 게 아니에요. 딱 스파크가 돼야 하는 거죠. 어느 날 드디어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됐는데 그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거예요.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어요. 그 결과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은 그런 체험을 한 거예요. 갑자기 그 냉랭한 감옥이 빛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마음의 기쁨이 오는데 넘치면서 평안이 깃드는 겁니다.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의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랬는데 그 평강이 깃들면서 완전히 변화된 체험을 하는 거예요. 내면적인 영적 변화죠. 이게 그의 옥중 일기에 쓰여 있어요. 그리고 옥중 편지에 그 내용이 있어요. 이때 구속의 교리가 믿어지고 체험 된 거예요.
2) 주님의 구속으로 우리의 운명 소속 신분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거예요.
옛사람이 그리스도 함께 죽고 새사람을 입게 되는 거예요. 생명이 주어지는 거예요.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어요. 이 흑암 권세는 뭐예요? 사단이 지배하는 권세란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어디로 옮겼어요?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거예요. 그 나라는 그 통치받는 나라, 그 지배받는 소속으로 바뀌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소속 운명 신분이 통째로 바뀐 거예요. 우리는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담당했고 우리는 다만 성령으로 믿은 것밖에 없어요.
근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탈북자가 이 구절을 읽으면은 겁나게 은혜가 될 것 같아요. 탈북자가 정말 지옥 같은 체제에서 목숨을 걸고 빠져나와서 지금 자유 대한민국으로 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흑암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이 말이 얼마나 와닿겠어요? “야 이거야말로 나에게 하는 말이구나.”아마 이렇게 느낄 거예요.
근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지금 그런 감사와 감동으로 사십니까? 아니면 세상 따라 살고 있는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먹고 살기 위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예수 믿고 있습니까? 이 부분에서 제대로 스파크 되는 사람은 제자로 세워지게 돼요. 오래 믿어서 제자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영적 사실을 제대로 본다면 탈북자보다 더한 운명 전환이 되는 거예요. 그분들은 대한민국에서 이제 적응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데 또 적응 못 하는 사람은 어떻게 돼요? 다른 나라로 가요. 근데 간 다음에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근데 사실은 우리는 영원한 지옥 운명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우리의 운명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소속 운명 신분 권세 배경 통치 체제가 영원히 바뀐 거예요. 이제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말고 진짜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고 믿으셔야 해요. 현실적으로는 돈이 필요하잖아요. 돈에 대해서는 우리가 맨날 염려하잖아요. 이제 구분하세요. 그건 내 본성이 그러는 거예요. 본성은 안 바뀌어요. 본성은 여전히 돈 없으면 어떡해? 인본주의 이성으로 계산 들어가요. 근데 그게 영적 문제라는 걸 모르고 사는 게 문제예요. 그 본성은 저한테도 있어요. 근데 성령이 주시는 생각이 진리고 그게 사실이에요. 이제 얼마만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사실, 진리의 사실을 근거한 인생을 사느냐? 아니면 계속 본성에서 주는 감각과 그 생각에 잡혀서 인본주의 계산과 생각으로 사느냐? 이 차이예요.
왜 우리가 치유되고 갱신되고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되냐 말이에요. 구원을 받았음에도 치유 회복이 안 되면 계속 사단의 통로로 살아요. 내가 그리스도께 힘 있게 잡혀서 살지를 못한다니까요. 이렇게 되면 여전히 인본주의 체질로 산다니까요. 판단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니까요. 여전히 인본주의 자존심 가지고 살고 거기에 걸리면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산다니까요.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는 말이 있잖아요. 옮겼다는 말은 이게 헬라어로 부정 과거형인데 한 번에 영원히 이루어진 사실을 말할 때 부정 과거형으로 쓴다는 거예요. 이걸 알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날마다 기뻐하면 체질까지 치유돼요. 이걸 맛보게 되면 과거 해석이 달라진다니까요. 전부 다 진짜 발판이 돼요. “내가 이 복음의 쓰임 받으려고 옛날에 그 고난을 당했구나.”그때 사탄에게 그렇게 내가 시달렸는데 그것도 다 발판이 되네. 왜요? 지금은 내가 그 이기는 분을 누리므로 그게 다 발판이 돼버려요. 그래서 그냥 편안하게 산 사람보다, 삶이 기구했던 사람이 창 3장 눈이 확실히 열리고 영적 문제 확실히 알고 그리스도 확실히 알면 확실한 증인 돼요. 오히려 제자 돼요.
결론
오늘 제목이 영적 문제와 그리스도 아는 사람만 가능한 일이에요. 영적 문제와 그리스도 아는 사람만 가능한 일이 뭐예요? 불신자 6가지 상태에 빠진 사람 건져내는 일이에요. 종교인이나 율법인이나 세상 학자도 못해요. 이 일을 못 해요. 대통령도 못해요. 근데 우리는 불신자 여섯 가지 상태에 빠진 사람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 답을 줄 수 있어요. 내가 그걸 체험했으면 아주 확신 있게 말할 수 있겠죠. 하나님 그렇게 여러분 세워서 쓰시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복음 받을 자, 구원받을 자를 놓고 답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계속 그걸 놓고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만남을 연출해 주옵소서. 진짜 하나님 예비 된 자를 만나게 해 주옵소서.“ 물론 예비 안 돼도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라고 했어요. 믿든지 안 믿든지 다 전파하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가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진짜 영세 전에 예배하사 출생 때부터 개입하고 간섭해서 이 복음을 받도록 주관 통치 연출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옵소서” 그 사람을 주님이 어떻게 연출하십니까? 그 마음을 가난해지게 만들어요. 복음 받을 사람은 목마름이 있게 만들어요. 갈급하게 만들어요. 그게 어떤 문제, 사건을 통해서 그렇게 만드신다니까요? 주님이 그래 놓고 전도자와 연결시키는 거예요. 이 사람이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이끄신다고요. 거기에 딱 저와 여러분이 쓰임 받는 거예요. 창 3장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보시고 그들에게 답 줄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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