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의 결과를 뒤집어라 (야고보서 5:12~20)
https://www.youtube.com/watch?v=jnrnC8ejK1I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우리 교회 강단 메시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영적이고 내적이며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눈에 드러난 결과보다 내적인 원인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해결책인 복음을 말하고, 거기에 삶의 적용과 또 전도 메시지까지 나누게 됩니다. 원인과 초래된 결과, 그리고 해결책을 분명히 알아야 성도들이 올바로 세워지게 됩니다. 내 삶의 진짜 원인이 무엇이고 그 영향을 내가 어떻게 받고 있으며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인 복음을 실질적으로 알고 의지하게 되면, 변화의 삶을 맛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영적이고 내적이며 본질적인 문제를 알지 못하면 자기 열심으로만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게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의 결과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인과 함께 그 영향과 복음을 바로 믿으면 창세기 3장의 결과가 뒤집어집니다. 치유, 회복되고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각자의 현장에서 하는 일에도 승리하면서 전도자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천명과 사명까지 감당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각자 자신이 우리 교회 강단 말씀을 바로 받고 있는지, 정말로 이것을 통해서 내가 자꾸 발견되고 갱신, 치유, 회복되는지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자 바울은 자기가 항상 힘쓰는 사명이 무엇인지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2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하려 함이라고 해석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한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을 계속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도 목표가 되어야 할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교인을 숫자로 보지 말고, 어떻게 한 사람이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세워지고 있는가를 보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점점 세워지고 있으면 그만큼 내면의 힘이 생기게 되고, 자기 자신이 승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이제 내가 증인으로 세워지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사람의 숫자에 휩쓸리거나 교회 분위기에 밀리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이렇게 세워져야 되겠구나, 저 사람도 저렇게 세워질 수 있어'라며 오히려 영적인 관점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가 골로새서 1장 28절입니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이 일을 위해서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또 내 속에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내 속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내가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렇게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것과 관련해서 야고보서를 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1. 야고보서에는 무엇을 강조한다고 되어 있죠?
믿음보다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결론 부분에 야고보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음의 중요성을 결코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를 강조하다 보니까 그렇게 표현된 것이고,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을 책망하는 것뿐입니다. 믿음만 말하지 말고 행위로서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이 창세기에도 있고 로마서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가 행위로 자기의 믿음을 나타내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는, 사실 독자 이삭을 죽이라고 하시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지만 그 당시에는 신이 그렇게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른 말 없이 순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천주교처럼 믿음과 행위를 합쳐야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과로 행위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육신에 있는 자가 아니라 영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의 소속은 영에 있는 자가 맞습니다. 여러분이 육신의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육신에 있는 자라고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영에 있는 자라는 말은 그 사람이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본성은 우리를 끌어내리는 중력과 같고 성령은 양력과 같습니다. 비행기가 뜨는 원리를 보면 중력과 양력이 있는데 양력이 더 세기 때문에 비행기가 뜨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양력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세기 3장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부분까지 뒤집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치유와 회복이요, 열매 맺는 삶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그동안 주객을 바꾸어서 믿음과 의탁과 순종과 충성의 인생을 사시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되는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학벌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뒤집어진다는 것이 창세기 3장의 본성과 그 욕구에 따라서 살았던 인생을 영적으로 뒤집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되고 기도 응답을 받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서의 결론 부분으로 세 가지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가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
왜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언어생활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가 AD 45년에서 48년경, 즉 1세기 중반부 유대 사회를 배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거래할 때 자신의 거래가 진실하다고 증명하기 위해 맹세를 했습니다.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내가 이 거래를 정당하게 한다, 나는 절대 안 속인다, 너하고 약속한 것을 절대로 지킨다' 이런 맹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금기 사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기 때문에 주로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땅을 두고 맹세한다, 또는 성전의 제단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을 썼습니다. 그래 놓고 안 지키는 헛맹세가 아주 많았다는 말입니다.
성도들도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맹세하지 말고,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냥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굳이 맹세하지 않아도 '예' 혹은 '아니오'라는 대답만으로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성과 말에 대한 책임성이 있어야 합니다. 밥 사준다고 했으면 꼭 밥 사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어생활은 야고보서에서 여러 번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혀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2) 두 번째는 고난과 즐거움 등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난이든 즐거움이든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적으로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이라 하면 외부적인 핍박이 될 수도 있고, 그로 말미암은 경제적 어려움이 될 수도 있으며, 여러 가지 낙심할 만한 모든 상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런 고난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기 때문에 항상 먼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이 올 때 원망하지 않습니다. 주로 내가 주인 되어 내 힘으로 살 때 원망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면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이 되시고 책임자가 되시며 철저한 언약 성취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언약 성취의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기도로 더 깊은 집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것이 생명 가진 자의 특징입니다. 영적 생명이 없으면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 없는 사람은 기도 자체를 못 합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내 생각이 아닌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성령이 주시는 생각으로 올바른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도 영적으로 선용이 됩니다. 고난은 선용 되거나 하나님이 해결하시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만약 즐거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는 다시 육신에 빠져 영적으로 희미해지지 말고,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찬송하며 늘 하나님과 관계에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승리와 실패는 외부 환경이나 외부 사람 때문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바르게 인정하고 철저히 의지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께서는 그 상황을 온전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인도받으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 환경이 어려워도 그것은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을 인정하고 집중하는 절호의 시간표가 됩니다. 그러면 그 문제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문제가 됩니다.
14절부터 16절을 보면, 고난과 즐거움에 대한 일반적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특별히 병든 상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성도들도 육신을 입고 있기에 병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병이 위중하여 혼자 기도하기가 힘들 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의 장로는 지금처럼 목사를 보필하는 중직자가 아니라 교회의 책임자요 목회자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장로, 감독, 목사 이 세 가지 명칭을 혼용해서 함께 썼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장로는 행정을 맡은 장로라는 개념보다는 교회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목회자들을 초청해서 병 낫기를 위해 기도를 요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올리브유를 의미하는데, 올리브유는 당시 치료제나 의학용으로도 널리 쓰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병 낫기를 위해 의학적 수단이나 조치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맞고 이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15절과 16절은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 믿음의 기도가 가진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이 믿음은 내 힘으로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실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기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믿음입니다.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기도는 참 응답이 됩니다. 이럴 때 실제적인 치유의 역사도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성령의 역사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간절성과 지속성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간절성과 지속성도 곧 믿음입니다. 이 간절함과 지속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맞물려 응답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를 초청하여 환자를 놓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환자의 내적 자각을 일으키셔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죄를 깨닫게 만들고, 회개가 일어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고 기도를 막기 때문입니다. 죄가 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올바른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질병뿐만 아니라 죄부터 고백해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죄지은 것이 없는데 사단이 억누르는 것이라면 죄를 고백할 필요 없이 곧바로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사단이 불법적으로 나를 누르고 압박해서 지배하려고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아, 네 머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깨졌다, 너는 하늘에서 내쫓겼고 이 땅에서도 철저히 패배하고 정복당하여 내쫓길 수밖에 없는 놈인 줄 나는 믿고 안다. 너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절대 이길 수 없고 굴복하며 벌벌 떠는 놈인 것을 나는 안다." 사단 앞에서 이런 확고한 믿음의 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중에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병이 왔다는 자각이 든다면 당연히 그 죄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17절부터 18절에서는 엘리야를 기도의 모범 사례로 이야기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사실 엘리야는 당시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고 명령대로 행하던 사람, 굉장히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적당히 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절하고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역사하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간절성과 지속성이 필요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과 믿음을 받게 될 때 아무리 큰 병이라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도 질병을 놓고 기도하시겠지만, 기도를 이렇게 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병은 내 병이 아니다, 이 병은 주님의 병이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이 병은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이 완전히 담당하신 병이다,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셨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질병을 놓고 계속 기도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담대히 믿음의 기도를 하기 바랍니다.
3) 세번째는 19절과 20절은 목회적 당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는 이단에 빠진 사람을 일컫습니다. 혹은 이단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비진리에 영향을 받아 신앙의 낙오자가 된 사람입니다. 이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은 목회자만 할 일이 아니라 성도가 함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장로님들도 그렇게 하셨고 성도 여러분도 같이 기도하면서, 어떤 성도가 연약해지고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같이 심방하고 기도해 주며 도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한 영혼을 돌보는 일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동역하라는 것입니다.
2. 야고보서의 결론
오늘 야고보서의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 열매 없는 믿음의 허실을 엄중히 책망하고, 행위를 통해 참된 믿음을 삶으로 나타내라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우리보고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복음은 창세기 3장의 모든 파괴적인 결과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3장 죄의 성격과 본질, 그로 말미암아 초래된 결과를 바로 알면 더 이상 육신의 본성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성령을 힘입어 영의 생각, 영의 말씀, 영의 믿음으로 본성을 분별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느 때든지 현실에 적당히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문제가 없다, 이제는 살 만하다' 이처럼 환경이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합니다. 인생이 한참, 어려울 때는 절에 가서 간절히 빌고 스님에게 부탁하며 공양을 바칩니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편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위치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신이나 종교를 이용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종교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끊임없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고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시며, 삶의 현장에서 증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사단과 죄의 본성과 그 체질을 결코 간과하거나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계속 싸워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골로새서 2장 6~7절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제가 예전에 이 말씀을 하면서 신앙 성장의 네 단계를 이야기 했습니다.
(1)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는 '영접의 단계'입니다.
(2) '그 안에서 행하는 단계'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서 성령님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매일의 기도 생활이 영적으로 안 되면 그 안에서 행하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3)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는 단계'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고난과 문제를 선용하십니다. 평소에는 영적인 깊은 집중으로 뿌리내리기가 잘 안됩니다. 평소 안 하던 새벽 기도를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인생에 큰 문제가 터져서 나오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로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일대일로 독대하며 주님을 깊이 만나야 상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합니까? 성령님이 기도의 문을 여시며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영적인 생각으로 이끄십니다. 기도는 그저 우리가 필요한 것만 간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속에 내적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됩니다. 기도의 시간이 깊은 교훈과 가르침을 받고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메시지를 매주 들어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한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와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말씀은 결코 내 심령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이 진정 나의 것이 되려면 반드시 성령께서 이끄시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직접 내면을 가르치고 교훈하시며 깨우쳐 주실 때 비로소 진짜로 깨닫게 됩니다. 이 뿌리를 내리는 단계에서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뿌리와 근본을 터치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단계가 매우 중요하며,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참된 제자가 되고 사역자가 됩니다. 내 안의 근본을 철저히 보며 '아, 내가 내 생각대로 살면 안 되는구나, 주님을 내 성공의 도우미로만 삼으면 안 되는구나'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의 본성으로 살았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음을 선포하고, 내 삶의 주인이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의 본성이 내 삶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주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뿌리 내리는 단계입니다. 뿌리를 제대로 내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음 단계가 됩니다.
(4)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단계입니다.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100%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체질, 즉 옛 본성대로 살려는 순간 금방 영적으로 알아차리고 성령님의 임재와 통치를 구하는 삶으로 바꿀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내 모든 문제의 주인, 책임자, 언약 성취자가 되시기에 주님이 감당 못 하실 문제가 없게 됩니다. 다른 조건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단계가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지, 아니면 일상에 지치고 힘들면서 가끔 행복하고 어쩌다 한 번씩 은혜를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의 네 단계로 계속 발전하셔야 합니다. 4단계까지 나아가면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증인이 되고 자발적인 전도자가 됩니다. 현장에서 사단의 방해가 오고 영적 눌림이 와도 그것까지 극복하게 됩니다. 가정, 직장, 모든 현장에서 복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강단 메시지와 복음 메시지를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이 점점 늘어나야 합니다. 모든 일과 문제를 전부 믿음의 역량을 기르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되시면 창세기 3장으로 초래된 결과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2) 세상 현장을 항상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단의 속임수와 욕심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선악의 기준을 완전히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선악의 기준을 왜곡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영이 죽은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안의 죄성의 지배받는 양심을 가지고 선악의 기준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영적 죄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오직 창세기 3장, 6장, 11장의 타락한 본성에 입각한 합리적 이성으로만 평생을 살아갑니다. 문제를 만나면 전부 다 3, 6, 11장 본성에 입각한 합리적 이성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근본적인 두 가지 욕구, 즉 안전에 대한 욕구와 명예를 위한 자존심의 욕구에 잡혀서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까 봐 염려하고 불안해합니다.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면 염려하고 긴장하며, 주님을 의지하기보다 내 육신의 힘으로 문제를 빨리 처리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얼마나 뿌리 깊게 숙달된 인본주의 체질인지 저는 이제 깊이 깨닫게 됩니다. 문제가 딱 생길 때 불안과 염려, 긴장 속에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애쓰는 것이 인본주의 체질입니다. 이런 체질로 빠져드는 메커니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런 체질을 극복하지 못하면 염려하고 원망하고 짜증을 냅니다. 오랫동안 이런 욕구를 채우려고 염려하고 긴장하며 자기 머리와 힘으로 애썼던 인생입니다. 타고난 기질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인본주의 체질의 메커니즘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이것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모른 채 평생 속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모든 인생이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속고 도적질 당하고, 파괴당하고 유린당하다가 결국 죽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성공했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육신의 성공일 뿐, 영적으로는 여전히 사탄에게 속고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이런 운명과 체질과 멸망의 메커니즘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이걸 뒤집어야 합니다. 이걸 뒤집는 것은, 스스로 불가능하며 오직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이 육신의 체질을 뒤집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고, 그러면서 체득하게 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옛 본성대로 성질 내고 판단하다가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무릎 꿇으면 성령께서 '아, 내가 여전히 내 육신대로 하고 있구나. 성령으로 살지 못하고 죄의 본성에 지배받고 있구나' 이런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런 영적 사실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결론
창세기 3장의 결과를 뒤집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청지기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실현자로,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는 1장부터 5장까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강력하게 책망했고, 혀에 담긴 치명적인 독성을 경고했으며, 세상과 짝하여 타협하고, 돈에 탐욕을 부리는 성도들을 엄중히 책망했습니다. 야고보서가 왜 이토록 강한 말씀을 주셨습니까?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 한 영혼이라도 바른 복음 위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서론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여러분 모두가 복음으로 삶이 완전히 뒤집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교인들을 단순히 숫자로 파악하지 말고,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지 그 영적 성장을 집중해서 보아야 합니다. 참된 전도자와 사역자가 되십시오. 전도자와 사역자로 제대로 세워지면 환경이 어떠하든, 어디를 가든 살아남습니다.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거나 작은 일에 시험 드는 연약한 자가 아니라,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런 사역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배 후 포럼 시간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포럼해 보기 바랍니다. 내 삶에서 복음으로 확실히 뒤집어진 부분과 여전히 뒤집어지지 못한 부분을 포럼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저 "말씀을 좋게 깨달았습니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 되고 있는 나의 연약한 부분까지 솔직하게 꺼내어 나눌 수 있다면 서로 진정한 애정을 갖고, 깊은 영적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영적 싸움을 함께 감당하여 함께 날마다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교회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년 9월 23일 수요예배 - 주의 강림과 전도자의 삶2 (약 5:7~11) (0) | 2026.09.23 |
|---|---|
| 2026년 9월 20일 주일예배 - 주의 강림과 전도자의 삶 (약 5:7~11) (0) | 2026.09.20 |
| 2026년 9월 16일 수요예배 - 올바른 경제관2 (약 5:1~6)/ 찰리신 간증 (1) | 2026.09.16 |
| 2026년 9월 13일 주일예배 - 올바른 경제관(약 5:1~6) (0) | 2026.09.13 |
| 2026년 9월 9일 수요예배 - 직업과 경제2 (약 4:13~17) (1) | 2026.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