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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2년 6월 12일 주일예배 - 뜻을 정한 다니엘(단1:1~21)

by 별종외계오동 2022. 6. 13.

2022년 6월 12일 주일예배 - 뜻을 정한 다니엘(단1:1~21)

 

뜻을 정한 다니엘(1:1~20)

 

지난 주에 참된 금식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내 문제 해결과 자기 뜻 관철을 위해 금식하라는 말씀이 아니였다. 참된 금식이란 오히려 자기를 살피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 금식하라는 말씀이였다. 그것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은 물론이고 유대 공동체에 대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였다. 그러나 유다백성들은 이 계명에 불순종했다. 이유는 3,6,11장의 육신의 생각에 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언약을 심령으로 못믿었고 보장된 축복과 권세를 못믿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그래서 우상숭배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불의와 악독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갔다는 말씀 드렸다. 주전605년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1차 침략을 받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가운데 다니엘과 3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다니엘의 나이가 15~17세 정도로 추정된다.

이렇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니엘과 3친구의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시는 것이 단1~6장까지 내용이다. 이스라엘 밖에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 증명하는 것이 다니엘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바벨론 제국과 민족들과 열방을 다스리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증명하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여러분도 뜻을 정하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1. 바벨론 왕궁교육을 받았던 다니엘과 3친구

1) 그들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니엘과 3친구들은 자기 민족이 왜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는지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말씀들의 성취였다. 이렇게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왕이 하사하는 음식을 그냥 먹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우상신전에 바쳐졌던 음식이였고, 율법에 금지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였다. 먹자니 율법에 걸리고 안먹자니 자기 안전과 신변의 위협에 걸리는 상황이였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는가? 이런 걸 자기 머리로, 생각으로 처리할려고 하면 지게 된다. 이럴 때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승리한다. 지금 국토부장관이 된 원희룡씨가 제주도지사로 있을 때 제주도는 매년 드리는 한라산 산신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도지사가 처음 술잔을 올리면서 절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도의원들이 조례로 정해놨다고 한다. 그는 도지사를 안하더라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다니엘처럼 승리했던 것이다.

2) 다니엘과 3친구가 뜻을 정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채식만 먹었는데도 괜찮도록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 17절에 보니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다고 되어있다. 거기에다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도록 해 주셨다고 되어 있다. 이건 앞으로 다니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상되는 말씀인 것이다. 3년 왕궁교육을 받고 왕 앞에 나가 섰을 때 왕이 질문해 보니 이들 지혜가 최고로 뛰어났다. 다른 이들보다 10배나 뛰어났다.

한 번 제대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에 뜻을 정하게 되니깐 하나님이 이같은 축복을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역사를 체험하면 믿음의 역량, 기도의 역량이 굉장히 자라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헌신하며 자신의 생명도 드리게 된다. 여러분이 모든 문제를 기회로 여기면 계속 기도응답이 오게 된다. 현장을 볼 때 신자가 보장된 축복을 못누리고 있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비난하는게 아니라 진정한 중보기도가 된다. 그들을 도와 제자화하고 불신자까지도 제자화할 수 있는 일꾼이 되게 된다. 다니엘과 3친구는 이후 큰 위기가 닥쳐서도 그걸 다 기회로 삼는 자 된다. 육신으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으로 반응하는 기회 삼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증명 되시는 것이였다.

 

2.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뜻을 정해야 하겠는가?

1) 당연히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서 뜻을 정해야 한다.

우리가 불신세상에 살고 있다. 그 속에 우리를 두신 이유가 뭔가?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자로 빛을 비출 자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 일을 대행할 사명을 받았다. 지난 주에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손해보는 것이 아니고 전부 축복의 기회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 직면하면 현실과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된다. 육신의 본성은 여전히 3,6,11장의 본성으로 반응한다. 안전의 동기와 자기 자존심의 동기가 올라온다. 그래서 영이 약한 사람은 지게 된다. 이것을 누가 뒤집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가? 여러분 속에 성령이시다.

2) 왜 뜻을 정해야 하는가?

뜻을 정하지 않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고 지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에서 밀리기 때문에 그렇다. 집중하는 것도 뜻을 정하지 않고서는 안된다. 지난 주 말씀처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도 뜻을 정하지 않고서는 안된다. 우리는 날마다 뜻을 정해야 한다.

 

3. 이를 위해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을 이겨놓으신 것이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 3,9,3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제가 이런 예를 들은 적이 있다. 탈북자들이 너무나 다른 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 체제 속에서는 자기들이 배워온 것이 맞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탈북해서 남한 체제 속으로 들어오면 비로소 분별이 되고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전에는 절대 속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속았다는 것을 알아야 뒤집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의 생각이 들어와야 한다. 우리도 구원받기 전까지 사탄의 체제 속에서 살면서 얼마나 거기서 형성된 3,6,11장의 체질 속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저는 과거 3,6,11장의 내 동기와 욕구와 기준이 완전히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은혜도 받고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믿을려고 애썼다. 제가 잘 믿을려고 애쓴다고 여겼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저는 문제 사건과 집중을 통해서 비로소 내 동기, 내 기준이 얼마나 창3장에 뿌리깊은 지 주님이 보여 주셨다. 이게 보이니깐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로소 1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 백프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을 시도하게 되었다. 보좌의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갈2:20이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갈2:20이 되는 것을 류목사님은 내 안에 보좌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보좌화 이루어지는 사람이 시공간 초월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게 된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었다고 했는데 우리가 성령충만을 회복하게 된다. 그 사람은 에덴의 축복을 누리게 된댜.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는 축복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전무후무, 업의 전무후무가 된다. 이걸 맛본 제자들로 인해 교회의 전무후무를 체험하게 된다. 그 결과로 3,9를 누리는 목사, 중직자, 렘넌트들이 나온다. 이걸 3시대의 축복이라고 한다. 지금 제가 3,9,3의 축복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플렛폼이 되고 파수망대가 되고 복음 송출하는 안테나가 된다.

 

결론

자신이 뜻을 정해야할 부분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결단해라.

청년들 육신의 재미난 것, 습관적인 것 그러나 영적으로 도움 안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뜻을 정해야 한다. 나의 관심과 생각이 주님께 24시 안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뜻을 정해야 한다. 주님이 분명히 내게 원하시고 있는 것이 있는데 못하고 있는 것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뜻을 정해야 한다.

2. 성경의 뜻을 정한 모델들을 본받으라.

오늘 다니엘과 3친구는 모델이다. 뿐만 아니라 신약에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뜻을 정하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여러 사람이 올라가는 것을 만류한다. 그 때 바울의 고백이 행20:24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이 조금도 아까운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생각으로 가능하고 그것이 강해질 때 가능한 것이다. 주님의 보좌화가 내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뜻을 정하는 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정해야 된다. 오늘 말씀을 실제 적용하기 바란다.

 

 

 

(지난 주)

남에게 안좋은 소릴 들었을 때 육신의 본성은 기분이 상하고 변명하고 방어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말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육신의 본성은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께서는 그렇지 않다. 기분 상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그러지 않으신다. 모든 육신의 본성을 극복하고 사탄은 꺽고 상대는 살릴 수 있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성령으로 주님이 우릴 직접적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관계든, 각종문제든, 현장에서 어떤 사탄의 공격이든 이같은 성령님으로 주님이 통치하시니 우리는 기회인 것이다. 여러분이 해야할 것은 내 생각으로 반응치 않고 성령으로 반응하도록 주님을 바라며 기다리며 집중하는 것이다. 기도가 될 때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