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여러분 안에 주인이신가?(눅5:12~13, 17~24, 27~32)
지난 주에 신앙생활의 세 단계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1단계가 콜링의 단계이고 2단계가 치유 성장 확립되어 누림이 되는 단계라고 했다. 얼마만큼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인 성령의 통치가 누려지느냐에 따라 여러분 인생이 바뀌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문제에 대한 역량이 달라진다. 창3장의 인생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안 염려 연약함이 있고 이걸 깔고 반응하며 살게 된다. 여러분이 그간 창3,6.11장의 본성으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왔는지가 보여야 한다. 보통 내 느낌, 감정, 생각으로 반응한다. 또 창3장의 내 기준, 내 동기, 잘못된 믿음의 현주소, 내 방법, 자기 욕구로 반응하게 된다. 이제 이런 것이 보여야 하고 그런 나를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면서 거기에 빠지지 말고 내 안에 주님의 성령께서는 모든 능력이 있으심을 고백하는 거다. 그러면서 내 속에 성령께서 통치 인도 역사해 주시기를 의탁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매일 살 수 있는 영적 삶의 시스템이 있으면 치유 성장 확립되어 누림의 단계가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인 파송 사역의 단계로 나가게 만든다. 오늘 제목이 어떤 분이 여러분 안에 주인이신가 이다. 오늘 읽은 눅5장에서는 예수님이 전신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시며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고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분이 우리 안에 주인이시다.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잡기 바란다.
1. 전신 나병 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심
1) 먼저 온 몸에 나병이 든 환자를 고쳐주시는 내용이 나온다. - 예수님의 주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되 병고침과 귀신을 쫒아내는 사역을 동반하셨다는 말씀을 드렸다.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메시야 되심을 입증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나병 환자는 하늘에서 내린 병이라고 여겼고 부정한 병이라 여겼기 때문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었다. 동네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매맞을 위험과 돌 맞을 모험을 하면서 예수님께로 나온 것이다. 그는 믿음의 고백했다.“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하기 바란다. 예수님은 그에게 어떻게 해주셨는가?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그의 믿음에 응답해 주셨다. 하늘의 병이라고 여겼던 나병이 나음을 입고 돌아갔다. 16절에 보니깐 이 일을 후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따로 아버지와 깊은 기도시간을 매번 가지셨던 것이다.
2) 이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나온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율법교사)들이 마침 와 있었다. 그 때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들려왔다. 사람이 많아 못들어오니깐 기와를 벗겨 천장에서 달아 내렸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 여러분 제3자의 믿음도 중요하다. 그래서 여러분이 집중하여 하는 중보기도는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먼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21절“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러자 23~24절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인자가 땅에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리라”하셨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는가? 우리 편에서는 둘 다 불가능하지만 예수님 편에서는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쉽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창조주시니깐 치유는 말씀의 능력만으로도 가능하시다. 그러나 죄사함은 인자에게도 사죄권이 있지만 본인의 죽음을 생각하셔야 하기 때문에 쉬운 것이 아니였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에게 사죄권과 병고치는 능력이 다 있으심을 보여준 사건이였다.
2.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
그 다음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내용이 나온다. 마태복음에 병행 본문을 보면 이 세리 를 마태라고 밝히고 있다.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제자가 된 후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사람들이였다. 이들은 먼저 로마에 세금을 상납하고 그 갑절을 거두는 매국노였고 대표적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런 자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신 것이였다. 우리는 친구를 삼아도 이런 사람을 친구 삼고 싶어하지 않는다. 교회에도 사회적으로 평판 좋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와서 교인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 사회적 평판이 안좋은 사람들을 친구 삼으셨다. 이들을 1차적 구원의 대상, 사역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왜 그랬을까? 일단 예수님은 전인구원의 능력이 있으셨다. 영육으로 구원할 수 있는 전인 구원의 능력이 없으면 이런 사람들 전도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진짜 답변이 31~32절 말씀이다. 우리도 이런 주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봐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러 오셨고 뿐만 아니라 영적문제로 파생된 육신의 질병과 각종 저주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것이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적 능력이 동반된 복음으로 전인구원 사역을 하신 것이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의 도구되고 주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다. 그러면 참된 중보기도가 된다.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주님의 이런 사역의 대행자가 되었던 것이다.
3. 오늘 여러분 안에 어떤 분이 주인이신가?
1) 사죄권도 있으시고 불치병도 고치시고, 또 레위 같은 죄인을 제자로 부르신 주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기 바란다.
그런 주님이 지금도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심을 믿기 바란다. 이미 권세가 주어졌는데 못누리고 못사용하도록 사탄은 방해한다. 영적 사실을 못믿고 기도권세를 못누리므로 교회를 연약하도록 만든다. 문제와 현장 앞에서 3,6,11장에 입각한 느낌과 생각으로 반응하므로 지게 만든다. 누가? 사탄이! 우리가 보장된 자녀의 권세를 못누리고 교회가 현장 정복 못하는 것은 사탄에게 지는 것이다.
2) 여호수아는 죽었어도 사사기에 보면 이긴 싸움을 하도록 보장해 주셨다.
삿3:1~3에 보면 여호수아 때 가나안 족속을 다 정복하지 않고 남겨둔 것은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고 하시며 아직 전쟁(믿음의 전쟁,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고 남겨 두셨다고 하셨다. 좋은 의미로 남겨두신 것이다. 4절에도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다고 되어있다. 순종만 하면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였다. 하나님의 소원이 남겨둔 가나안 족속까지 정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들이 영적문제에 빠져 믿음과 순종이 아닌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했다. 창3,6,11장의 본성에 입각한 감정 느낌 속아, 두려움과 부담과 눌림 속에 믿음의 전쟁을 싸우지 못하고 현실 회피, 안주, 타협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가나안 족속과 교류, 혼인, 동화, 우상화, 육체화 되었던 것이다. 이게 사탄에게 진 것이다. 주어진 권세 못누리고 정복 보장된 싸움을 못싸우므로 지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적문제에 빠진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는 영적 정복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에게 보장된 권세와 우리 속에서 싸워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이다. 분명히 사람과 지역에 역사하고 있는 흑암세력이 있다. 자기 영역과 자기 수하에 사람들을 안뺏길려고 사탄은 역사한다. 우리를 누르고 방해할 수 있다. 구정이나 추석 때 제사드리는 집안의 성도들은 이런 눌림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중보기도할 때도 방해받을 수 있다. 전도 대상이나 전도 현장에서도 그럴 수 있다. 왜 그럴까? 사탄이 자기 것 안뺏길려고 해서 그렇다. 여기에 눌리는 느낌, 상태에 속지 말고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을 정확히 알고 고백해라. 사탄이 자기가 내쫒기지 않을려고 여러분을 속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에게 땅끝까지 정복할 권세를 주셨다. 여러분 속에 그래서 성령님으로 실제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신 것이다.
결론
오늘 삿3장의 말씀을 잊지 마라. 여러분이 믿음과 순종하는 체질이 되면 지난 주 말씀 드린 것처럼 치유 성장 확립을 통한 누림의 단계가 된다. 더 나아가서 파송 사역의 단계가 된다. 매일 영적 시스템이 있게 되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구분이 되고 영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통치인 성령님을 힘입어 현안과 사탄의 공격을 이길 수 있다. 불안 염려 눌림 조임이 들어와도 괜찮다. 나는 그럴지라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했다. 오히려 모든 능력이 있으신 것이다. 그래서 문제처리, 일처리, 전도 현장에서 이기게 하신다. 이것이 발전해서 전도의 권세를 누리는 대로 나가게 된다. 여러분 안에 어떤 분이 계신가?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의 죄도 사하고 병도 고치시고 세리 레위도 제자로 부르신 주님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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