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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3년1월22일 주일예배 - 탕자의 비유(눅15:11~32)

by 현상금 2023. 1. 22.

탕자의 비유(15:11~32)

 

 

 

류목사님이 종종 쓰시는 예화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목욕탕에 가면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세요, 맡기지 않은 물건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런 글귀가 있다. 신앙생활에도 너무 딱 맞는 얘기라고 생각이 든다. 여러분이 올해 모든 부분에 세밀하게, 정확하게, 완전하게 맡기기 바란다. 세상은 우연이 없고 하나님이 절대 주권으로 만물과 만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했다. 여러분이 분명히 확실하게 맡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잘 맡기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 그것은 인본주의로 살아왔던 창 3,6,11장 체질 때문에 그렇다. 맡길려고 해도 기도가 잘 안되는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평상시에 기도를 잘 안 했기 때문에 그렇거나 아니면 사탄이 눌러서 기도를 방해해서 그렇다. 저는 사탄이 누르는 것을 확실히 느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기도를 했다. “사탄아 고맙다. 눌러주어서 고맙다. 니가 그럴수록 나는 내 힘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십자가로 네 머리를 박살 내시고 너를 패배하고 내어쫒기게 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시간 나를 누르고 기도 못 하게 하는 사탄을 정복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성령으로 통치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를 하면 주님도 들으시고 사탄도 듣는다. 이 기도가 심령에서 되도록 반복해서 해라. 그때 기도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영적 싸움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이 나보다 더 내가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나보다 더 내가 회복되어 최고 자녀 되기 원하신다. 주님이 나보다 더 나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런 사실이 하나님 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언약 잡고 기도하면 승리하는 거다. 귀중품을 주인에게 맡기세요, 맡기지 않은 물건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탕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여러분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1. 세 가지 비유

15장에는 세 가지 잃어버린 것을 찾는 비유가 나온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 비유다. 세 가지가 다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교훈을 주는가 하면 7, 10절에 나와 있다. 죄인 하나가 돌아올 때 하나님이 어떻게 기뻐하시는지 보여 주신다. 이 비유를 하신 이유가 1~2절에 나와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종교인이었다. 세리나 죄인을 볼 때 경계만 했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보지 못했다. 종교인의 특징은 종교적 열심은 있지만 창 3,6,11장의 함정과 그 속에 빠져있는 자신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과 지금 어떻게 사탄에게 장악되어 12가지 운명 가운데 빠져있는지 알고 또 자기도 거기에 빠져있다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인생이라는 것을 안다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자기 나름 율법을 해석하고 자기 열심으로 그 규칙과 전통을 지키려고 애썼기 때문에 세리들과 죄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들과 식사를 같이 하자 그걸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세 가지 비유를 하셨다. 이 비유 중에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탕자의 비유다.

1) 아버지 마음

탕자의 비유는 어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살아계신 데도 상속을 미리 챙겨 집을 떠났다. 그는 먼 나라로 가서 돈을 허랑방탕하게 쓰고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가 그를 어떻게 맞이해 주었는지가 이 비유의 핵심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나갔지만 애타는 마음이 있었다. 아들을 정죄하고 처벌하려는 것이 그 마음의 중심이 아니라, 아들이 잘못을 깨닫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그 중심이었다. 이 비유에는 집에 있는 첫째 아들의 얘기도 나온다. 그는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일도 잘하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니 막돼먹은 동생이 집 나갔을 때 이해도 안 되고 괘심하고 미웠다. 그런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는 자기 율법 기준으로 본 것이었다.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까지 벌이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아버지 마음과는 달랐다.

여러분은 자식 때문에 마음 아파해 본 경험이 있는가? 부모는 자식이 학교생활 못 하거나, 방황하거나, 고통당하거나, 병들거나 하면 마음이 이상하게 아프다. 마음이 아리고 아프다. 왜 그런가? 나로 말미암아 세상에 나온 내 분신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 형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동으로 마음이 아픈 것이다. 이 마음을 누가 부모에게 주셨겠는가? 하나님 아버지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마음 때문에 우릴 살리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신데도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절규하는데도 외면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요3:16의 말씀이 와 닿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지금 말한 그런 아버지 마음으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독생와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5:8의 말씀도 가슴으로 와 닿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이걸 머리로 가진 심령으로 와 닿아야 한다.

2) 우리는 왜 복음 메세지를 반복해서 들어도 괜찮은 이유가 뭔가?

첫째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전달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더 깊은 사귐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둘째는 우리가 성령께서 더 깊게 복음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문제가 있어도 인간의 문제의 원인은 항상 같다. 한 가지 문제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가 왔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한 가지다. 그게 복음이다. 그런데 이것을 심령으로 받아야 되고 누리는 깊이(능력) 정도가 달라져야 한다. 성령께서 이런 효과를 주신다.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더라도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정도가 다르다. 우리가 이런 효과가 없다면 복음에 식상하고 새로운 지적 메세지를 욕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계속 들을 때 우리 인생 전체가 회복되고 현장 살리는 일꾼으로 바뀌게 만드신다. 4:13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다.

 

2, 첫째 아들의 마음

1)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과 같은 마음이다. 종교인들은 창 3장 문제를 영적으로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자기 행위나 종교적인 의를 갖게 된다. 바리새인만 아니라 세상 모든 종교가 그렇다. 내가 윤리적으로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딴 사람보다는 깨끗하게 살았고 이런 소리 하게 된다. 왜 종교인들이 속는 것인가? 그것은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속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도 마귀는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할 줄을 아심이라하였다.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몰고 인간을 꼬였던 것이다. 이 창 3장 사건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만물의 기준과 척도가 인간 이성이 되었다고 했다. 영은 죽어버렸다. 영이 살아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되면 절대 만물의 기준과 척도가 인간 이성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되었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 되었다는 말이다. 이때부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인본주의 자존심을 갖고, 인본주의 의를 세우는 것이다. 타락해놓고도 도덕적 의나 종교적인 의를 세우려 한다. 세상 종교는 인간의 의를 세워 구원받거나 응답받고자 한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을 못 알아듣는다.

2) 여러분은 의롭다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신 그리스도의 의로만 구원받은 것이다. 구원받고 나서도 내 의를 쌓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12가지 운명에서 빠져나와서 그동안 사탄이 체질화시켜 놓은 것들에서 치유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진리로 충만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예전에 없었던 마음이 자꾸 생긴다. 눈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진다. 체질이란 오랫동안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 형성된 것들이라 영적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체질화된 육신 습관조차 바꾸기 힘들다. 의지로 애써서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와 닿아서 감동되고 눈물이 나서 바뀌어지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3장에 빠진 인생은 보좌 배경과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린 상태다. 사탄의 욕심에 빠져 인본주의 자존심과 자기 의를 갖고 자기 노력으로 뭔가 이루고자 하는 인생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을 갖는다. 성령이 아니시면 이런 자기를 보는 눈도 못 가진다. 성령이 아니시면 우리가 완전 3,6,11장의 나 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노릇하는 인생인 줄 모른다. 여러분은 이걸 깨달아야 한다. 부끄러워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을 위하여 죽으셨고 성령을 보내시므로 완전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창 3,6,11장의 본성의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나로 인정하는 거다. 그리고 1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 24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인생으로 첸지하는 것이다. 그럴 때 전인 치유, 전인 회복이 일어난다. 그 결과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 살리는 자가 된다.

 

결론

구정 맞아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갖기 바란다. 저의 형제는 5형제라고 했다. 이제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자녀들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니깐 자연스럽게 명절에 만남이 끊어지려고 한다. 안 만나면 기도도 약해지기 쉽다. 그런데 이것만 생각하면 다시 기도가 된다. 불신 형님들과 형수님들, 조카들이 지옥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 기도가 된다.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 유황불 못에 산채로 떨어져서 영원히 불로써 고통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면 기도가 된다. 여러분은 오늘 첫째 아들의 마음이 아닌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부모, 형제, 친족, 세상 살리는 통로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