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재림(눅17:20~18:8)
인자의 재림(눅 17:20~18:8)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왜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겠는가? 그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에서는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였고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도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니깐 그렇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니깐 천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땅도 원래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통치받는 백성이 있고, 하나님이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면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일에 실패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내쫓김을 당한 것이었다.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음란이 우상숭배했고 자기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뜻에 실패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아들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 백성을 세우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이 전 인류 가운데서 마쳐지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그때 신자는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되고 이 땅에 남은 불신자는 불심판을 받게 된다. 그 후 이 세상이 재창조 된다. 정말 이 사실이 맞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오늘 본문은 인자의 재림 때 되어질 일들을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에게 적용 역사 성취될 말씀을 붙잡기 바란다.
1.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현실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메시아가 와서 다윗 시대와 같은 국가를 재현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다윗 시대가 그들이 이상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정부가 타도 되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에 그들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다. 이 말은 구원받은 자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사람만이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이것을 맛보는 사람이 결국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사람이다. 그래서 요3:3에 보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셨다. 내면의 하나님 나라를 먼저 체험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나서 22절부터 보면 따로 제자들에게 인자의 재림 시 되어질 일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2. 이 땅에 세워지게 될 완성된 하나님 나라
1) 24절, 그 하나님 나라는 인자의 재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 그 인자의 재림은 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적으로 목격하게 된다. 마치 번개 칠 때 빛이 이쪽에서 저쪽까지 번쩍하면서 동시적으로 비추는 것처럼 재림을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비밀스럽게 오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2) 25절, 그 전에 인자의 고난과 버림당함이 있다는 것이다. - 지금 우리가 볼 때 이 사건은 2000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3) 26~30절 그 인자의 재림 직전이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와 같다는 것이다. -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일상생활이 똑같이 진행된다고 하신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을 계속된다. 그러다 갑자기 홍수가 나서 다 멸망했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경우도 같다는 것이다. 롯이 소돔에서 나오기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나오는 순간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였다는 것이다. 멸망이 언제 일어났다고 했는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날, 롯이 소돔에서 나온 날이다. 30절, 인자의 날에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4) 34~35절 휴거 사건이다. - 여기 보면 두 가지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밤에 두 사람이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는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인자가 재림하실 때다. 그러면 데려감을 당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살전 4:16~17, 고전 15:51~52, 마 24:30~31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걸 근거로 말하자면 한 사람은 휴거 되고 한 사람은 이 세상에 남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상은 불로 심판을 당하게 된다. (벧후 3:9~13, 히 12:26~29 참고) 가공할만한 불 심판을 받게 되는데 계시록 19장의 표현으로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다고 되어있다.
3. 그렇다면 신자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는가?
1) 그 대답이 다음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와 연결된다.
이 비유를 하신 이유가 1절에 나와 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불의한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부가 와서 하도 밤낮으로 간청하니깐 그만 시달리기 위해 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비유는 끈질긴 기도에 대한 메시지로 많이 들었다. 그것도 중요한 교훈이다. 여러분 기도할 때 끈질기게 응답받을 때까지 해야 한다. 끈질긴 기도를 할 때 성령의 역사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성령께서 임재 통치 충만케 하시는 기도의 단계까지 들어가야 한다. 똑같은 기도를 반복해도 괜찮다. 성령께서 감동하심으로 기도하면 깊이가 달라진다. 끈질긴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7~8절의 결론의 말씀이 중요하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다. 택하신 자의 원한은 무엇인가? 사탄을 좇아가는 불신 세상에 대한 원한이다. 성도를 핍박하고 죽이는 세상에 대한 원한이다. 계 6:9~10에 보면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우리 피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나온다. 성도가 당한 고난에 대해 신원의 날을 구하는 것이다. 그 날이 인자의 재림의 날이다. 근데 8절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다. 성도들도 세상 잠에 빠지기 쉽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 세상 죄악에 대해 진노를 쌓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이 이 불신 세상에서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살면 안 된다. 이 세상이 얼마만큼 심판받을 죄악의 세상인지 분별 못 하고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 사사기에 보면 여호수아 이후 세대가 타락하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하나님 나라가 가나안화 되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변 나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 그 이유는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회개하면 사사를 보내서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죄악에 빠져서 결국 가나안과 똑같아 지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 땅이 그들을 토해낸다는 표현을 썼다. 토해낸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것이다.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했는데 이것은 성도들도 말세지말에 세상 잠에 빠져 산다는 말이 된다.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며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열 처녀 비유 보면 다 자다가 신랑을 맞이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이루신다. 성도들이 질적인 올바른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난다. 겨자씨 한 알만 믿음이 있으면 25시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성도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씨 안에는 이미 겨자 나무가 들어있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 놓았다. 성령의 믿음으로 우리가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 약속의 성취가 나타나며 내 것으로 확인된다. 믿음으로 바라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플랫폼과 파수 망대와 안테나가 되어 1, 3, 8의 인생을 확실히 살기 바란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 나라, 오직 성령이 되기 바란다. 거기에서 3,9,3의 축복이 나온다. 날마다 여러분 속에서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이것이 된다. 성령의 통치 받는 것이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확장되어야 이것이 된다. 신앙생활은 내가 많이 깨달아서 정신력과 의지력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보통 내가 많이 알면 살 것 같은데 아니다. 많이 알아도 여러분이 힘쓰고 애쓰는 것 가지고는 여러분의 3,6,11장의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영의 생각과 영의 믿음과 영의 능력이 와야 살아진다.
2) 두 가지 계열의 싸움
인자의 재림을 두고 두 계열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진행되겠는가? 두 계열의 싸움은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의 싸움이라 했다. 유럽 교회는 다 정복 당했다. 그래서 이건 영적 싸움이다. 주님은 감사하게도 이긴 싸움을 보장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이겨놓으신 것이다.
여러분, 구약 출애굽의 역사, 광야 여정,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봐라. 출애굽은 피 바른 사건 곧 구원을 의미한다. 광야는 체질훈련이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은 죄악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걸 위해 하나님은 오직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3,6,11장의 본성 때문에 불순종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전 인류를 향한 영적 정복과 구원역사를 이루고 계시다. 우리를 그 일에 쓰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싸움이다. 우리에게도 오직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소원을 위해 성령의 권능으로 싸워 주신다. 그래서 24시 체질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주님의 정복과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고 25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결론
1. 주님은 체질 훈련된 교회를 통해 25시의 능력을 나타기를 원하신다.
체질훈련이 안 되면 다 보장되어 있는데도 지게 된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성도의 권세가 주어져 있다. 땅끝까지 정복 가능한 이긴 싸움이 보장되어 있다. 여러분 체질만 바꾸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집중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번 13차 전교인 집중훈련을 여러분 자신 위해 선용하기 바란다.
2. 오늘 인자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기억해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된다.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 하셨다. 여러분은 이긴 싸움이 보장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 생각이 아닌 주님의 생각을 받으면 승리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면 보통 과거에 잠식되었던 불안한 감정, 눌렸던 생각이 올라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과거 경험에 근거한 합리적 계산을 하면서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거짓말이고 속는 생각이다. 이것이 나의 3,,6,11장의 반응임을 알아야 한다. 이때 내 생각이 아닌, 내 육신의 반응이 아닌, 정말 주님이 주시는 영의 생각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생각을 받기 위해 주님께 집중하는 사람은 뒤집기가 된다. 승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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