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시의 믿음(눅 17:1~10)
1.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행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방식으로 직장 일도 하고 경제생활도, 인간관계도 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님이 우리 안에 현재 적 통치하시는 방법이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것이라 했다. 이게 경험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했다. 이것이 되어야 그동안 창 3,6,11장의 내가 주인 되어 인본주의로 살았던 체질이 치유되고 역전된다.
2.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문제였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빠진 영적 문제를 몰랐기 때문에 이성과 의지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율법을 가지고 종교적 규칙과 삶의 규칙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고통당했던 역사적 경험도 이렇게 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심령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선인데 그것 보다는 규칙을 지키는 행위를 강조하다 보니깐 외식주의에 빠졌다. 사람을 옭조이게 되고 오히려 율법의 정신과도 안 맞는 규칙도 많이 만들어 냈다. 바리새인이란 말이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율법을 거룩히 지키므로 세속과 죄에서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영적 문제를 몰랐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이들을 율법주의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실한 종교인은 어떨까?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오늘 실족과 용서에 대한 말씀은 1차 적으로 바리새인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다.
본론)
1. 실족과 용서
1)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시키는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말씀하셨다. 작은 자란?
(1) 마18:1~10 - 어린 아이를 두고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단순성, 순수성, 순종성, 의지성 이런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능력이 없으니 부모를 의지한다. 예수님은 그런 점을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평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반면 어린 아이는 어른들의 무시의 대상도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셨다. 6절에는 이런 나를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하셨다. 마10:8~9 실족시키는 죄를 절대 범하지 말 것을 재차 강조하신 말씀이다. 10절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2) 눅17:1~2 - 여기서 작은 자의 의미 속에는 사회적으로 저평가 당하는 사람이나, 교회에서도 영적으로 저평가 당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이 무시한 죄인, 창기, 세리 같은 사람들이다. 이런 자들을 실족시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죄고 그 죄값이 얼마나 큰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눅17: 3~4절 – 작은 자(네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까? 바리새인들은 죄인이나 창기, 세리의 죄를 지탄만 했지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또 잘못이나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럴 때 비아냥거리면서 저것들은 “안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실족하게 된다. 실족시킨다는 말은 상처를 받게 해서 믿음 생활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주님이 피로 사신 자를 실족시키는 죄가 된다. 그래서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회개하노라 하면 용서하라” 이 말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건 비단 바리새인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이다.
2) 우리 3장의 본성은 어떠한가?
(1) 창 3장의 자존심은 나를 높이고 남을 무시하는 기준의 자존심이다. - 자기는 방어하고 남은 공격하는 자존심이다. 창 3장에 빠져 있지만 자기 의를 갖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걸리면 내 의가 올라온다고 했다. 내 기준과 동기로 사람을 보고 판단한다. 과거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있으면 지금도 싫어하고 답답해 한다.
(2) 이제 이런 자존심의 내가 십자가에 죽은 나로 알고 더 이상 이런 나를 주인으로 받아드리지 말아야 한다. - 인본주의 자존심의 나, 불신앙 불순종의 나, 세상 기준을 좇아가는 나는 십자가에 죽은 나로 알고 이런 내가 주인 되는 것을 부인해야 한다. 이건 성령의 실제적인 통치를 받아야 가능하다. 이제 나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주님이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받아드려야 한다. 내가 주인 되지 말고 성령께서 주인 되는 것이 발전하라고 자꾸 문제, 사건을 붙이신다. 인간관계 문제를 붙이신다. 영적 감각 있는 자는 이것이 기회가 된다. 그래서 영의 사람으로 발전한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 살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 바란다.
2.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예수님이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을 때 사도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했다.
7번이라도 용서할 만한 믿음이 없다는 생각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했다.
1) 이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은 6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셨다.
2) 이것은 참된 믿음의 질을 가질 때 25시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이라 했다. - 우리는 구원받을 때 이미 완전한 신분 권세를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되어진 것이다. 이미 권세가 주어졌고 가나안 정복할 이긴 싸움을 보장 받은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믿음만 회복되면 된다.
3)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1) 아주 작지만 그 속에는 생명력이 있다. - 이것은 현재 믿음이 작아도 질적으로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게 자라 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뽕나무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해도 그것이 순종한다는 것이다.
2) 저는 제 인생의 주체와 체질이 바뀌다 보니깐 이게 자꾸 믿어진다. - 창 3장의 욕구와 동기는 부인 되어져야 한다. 대신 하나님의 소원과 관심과 생각에 맞추고 하나님 아버지 소원을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3) 구약 가나안 정복의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 가나안 정복이 주는 교훈을 잘 잡기 바란다. 이제는 주님이 영적 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아버지 소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결론)
1.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 - 믿음의 역사로 25시의 능력이 나타나고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해도 그것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이유는 자신이 어떤 창 3,6,11장의 인생인 줄 잘 알기 때문이다. 25시 능력은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25시 능력이 나타날수록 우리는 더욱 낮아져서 작은 자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가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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