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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3년 2월 12일 주일예배 - 25시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눅17:1~10)

by 별종외계오동 2023. 2. 12.

 

25시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17:1~10)

 

우리는 참 많은 시간 동안 내가 주인되어 살아온 인생들이다. 보좌 배경이나 우리 안에 성령의 통치를 누리지 못한 채 인본주의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성령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는 인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못 느끼고 산다. 거듭나고 영적 생활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마다 시간표의 차이는 좀 있겠지만 누구든지 영적 생활이 되면 변화가 일어난다. 이게 얼마만큼 변화가 되는가 하면 영적 상태에 따라 마음 상태, 생각 상태,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면 그동안 살아왔던 인본주의로 살아온 것이 더 확실히 보인. 인본주의 기준과 동기와 방법이 보이게 된. 보이게 되니깐 바꿀 수 있게 된다. 일상생활 똑같이 하는데 방법이 바뀌게 된다. 이것이 결국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 통하여 사시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 통해서 직장 일을 하시는 것이다. 경제생활, 인간관계도 하시는 것이다. 이게 경험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마음과 눈과 능력으로 사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하나님이 갑자기 은혜를 주셔서 25시의 능력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계속 바뀌게 되면서 25시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오늘 본문은 25시와 괸계된 말씀이다. 예수님이 처음엔 실족과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다가 나중엔 25시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이 주고자 하시는 교훈을 오늘 잘 잡기 바란다.

 

1. 실족과 용서

1) 먼저 예수님은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시키면 그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작은 자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 마태복음에서는 어린 아이를 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회적으로 저평가 당하는 사람이나, 교회에서도 영적으로 저평가 당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이 무시한 죄인, 창기, 세리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 본성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 거리끼고 무시한. 근데 2절에 이런 자들을 실족시키면 안 된다고 되어있다.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엄청난 경고이. 실족시키는 죄를 크게 보신 것이다.

그러면서 3~4절에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까? 바리새인이 무시한 죄인이나 창기, 세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또 잘못이나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럴 때 바리새인들은 비아냥거리면서 저것들은 안돼!라고 할 것이다. 우리도 그러기 쉽다. 그러면 이들이 실족하게 된. 실족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는가? 상처를 받게 해서 믿음 생활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피로 사신 자를 실족시키는 죄가 된. 거기에 엄청난 경고를 하신 것이다. 심 선교사님이 지난 주에 우리도 잘못하면 신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고 했.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하셨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회개하노라 하면 너희는 용서하라하셨다.

2) 저에게도 이런 창 3장의 죄성이 많다.

이런 작은 자를 불쌍히 여기기보다낮추어 보는 경향이 다분히 있다. 저는 오랫동안 3장의 자존심 속에서 나를 높이고 남을 무시하는 기준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기준과 동기로 사람을 보고 비판할 때가 많았다. 내 기준과 동기에 걸리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7번 잘못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 하셨는데 저는 못한다. 우리는 과거에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지금도 싫어하는 감정이 있. 답답한 감정을 갖는 경우가 많. 하나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안 된다. 제가 그랬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저는 이런 나를 깊이 발견하게 되었. 이런 나는 십자가에 죽은 나더 이상 이런 내가 주인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주인은 주님이시주님이 성령으로 주님의 눈과 마음을 주신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구분되고 바꿀 수 있게 하시고 아버지 관점으로 보게 하시는 것이다. 이건 성령의 실제적인 통치를 받아야 가능하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했다. 성령께서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3,6,11장의 내가 주인인 걸 거부하고 주의 성령께서 주인이신 것을 믿고 순종하길 바란다. 이게 발전하라고 자꾸 문제 사건을 붙이신다. 인간관계 문제를 붙이시는 것이다.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만 똑바로 구분해도 된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 살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 바란다.

예수님이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을 때 사도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5절에 보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실천할만한 믿음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한 답으로 믿음의 질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6절이.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하셨다. 참된 믿음의 질을 가질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17:20에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옳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하셨다.

 

2. 이것은 25시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25시의 능력을 무수히 나타내 보이셨다. 그런데 이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25시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길 원하신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25시 능력을 나타내신 이유가 뭐겠는가? 두 가지. 첫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입증해 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진정한 왕, 진정한 선지자, 진정한 제사장이신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둘째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들이 쫒겨 나가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하나님 나라를 말로 설명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기적들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이. 근데 왜 굳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셨는가? 기적들만 가지고는 우리의 창 3장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으셨기 때문이. 그래서 최종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의 운명과 신분을 바꾸셔우리도 주님의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신 사건이다. 그리고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실제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다. 권세는 영접하자마자 주어졌는데 문제는 이제까지 살아온 체질이 문제다. 체질이 인본주의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는 체질이 되어, 주어져 있는 권세를 누리길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제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해 25시 능력을 나타내기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3.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1) 모래 한 알만 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모래알과 겨자씨의 차이는 뭐겠는가? 모래알은 생명이 없고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그 속에는 생명력이 있다. 얼마만큼 작은 지 앞의 자막을 보라.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제자들은 믿음을 더 하소서 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믿음이 작아도 질적으로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게 자라 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 마치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해도 그것이 순종한다는 것이다. 저는 제가 신앙생활을 이성으로 했을 때는 이것이 잘 안 믿어졌다. 이성의 논리로는 기적을 믿기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믿는다. 그런데 제 인생의 주체가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이 되시고 제가 성령의 통치를 받는 체질로 바뀌다 보니깐 이게 자꾸 믿어진다. 자기 욕구로 자기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버리고 이제 진짜 언약을 붙잡는 것이. 주님이 왜 능력을 행하시는? 왜 예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서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 주님이 아버지 소원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구약에서 보면 가나안 정복이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하셨다. 거기에 믿음의 백성, 거룩한 백성을 세우기 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가나안 세력도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것이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아이 성, 아모리 족속의 5 , 7 족속 31 왕을 정복해 주셨다. 그리고 남아 있는 땅도 분배해 주시면서 이제까지 너희가 여호와께서 싸워주시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남아 있는 족속도 반드시 정복해 줄테니깐 너희는 율법책에 기록한 것대로 순종하기만 하라 하셨다. 믿음의 사람, 갈렙이 나타나니깐 아낙 산지까지도 정복하게 해 주셨다. 25시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가나안 정복 전체가 기적이었다. 지금도 우리의 능력으로 안 되는 일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해 주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이 삶의 주체와 체질을 바꾸게 되면, 자꾸 주님이 하시는 일이 믿어지는 기도가 된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성령님은 염려와 불안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확신과 기대와 희열과 자신감을 주신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소원과 관심과 생각여러분의 방향과 관심과 생각을 딱 맞추었다면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기 바란다. 안 맞추면 기대할 수가 없다. 육신으로 살면서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할 수 없다. 성령께서 소멸되기 때문에 믿음이 안 생긴다. 여러분 관심과 생각을 딱 맞추게 되면 여러분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 통해서 역사하시는 인생이 된다. 그래서 주님 자신이 증명되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여러분이 참여되통로로, 손발로 쓰이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추어 주님께 믿음과 순종할 것밖에 없다.

2)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

그다음 7절부터 보면 예수님은 한 종에 대한 예를 드셨다. 무슨 뜻이겠는가? 우리가 믿음의 역사로 큰 일을 하고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자랑삼을 수 없다는 것이. 뽕나무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지는 25시 능력이 나타났어도 종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왜 그럴까? 첫째는 자신이 어떤 창 3,6,11장의 인생인 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한다. 둘째는 25시 능력을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이 자신의 일을 이루는데 쓰신 것이지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다. 이걸 자기 공로 삼으면 안 된다. 자신은 믿음과 순종만 했을 뿐이고 주님이 25시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사회적, 영적으로 작은 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잘못했어도 용서하므로 실족시키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겠다. 질적인 믿음이 있으면 자라서 25시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25시 능력이 나타날수록 우리는 더욱 낮아져야 한다. 자기가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능력이 나타날 때 오히려 조심하는 자이다. 주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오히려 더욱 낮아져서 작은 자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가야 한. 이것의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죄인들과 창기와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을 위해 죽어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