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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3년 9월 10일 주일예배입니다.“나사로 부활 사건”( 요 11:1~7,32~44) -요한복음 시리즈 11

by 별종외계오동 2023. 9. 10.

2023년 9월 10일 주일예배입니다.

“나사로 부활 사건”( 요 11:1~7,32~44) -요한복음 시리즈 11

 

 

 

나사로 부활 사건(11:1~7, 33~44)

 

오늘 본문에는 인간 이성과 경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 나온다. 나사로 부활 사건이다. 우리가 가진 인본주의 이성과 계산과 논리가 깨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인본주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이스라엘처럼 광야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자. 인본주의 이성으로 그 길을 잘 따라갔겠는가?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믿음과 인본주의 방법으로 잘 순종하며 따라갔겠는가? 광야 자체가 그 능력으로는 한계를 맞게 되는 현장이다. 더 나아가 가나안 정복은 잘 승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도는 이성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적 사실을 붙잡게 하고 영의 기도가 되면 괜찮다. 그러나 이것 안 되면 못 견디고 못 이긴다. 성령님만이 영의 생각을 주시고 강하게 만들어 주신다. 그러면 광야의 모든 상황이 다 기회가 된다. 광야의 한계를 만나도 기회가 된다. 광야는 창조주께 믿음의 뿌리 내릴 기회요, 하나님 영광 나타낼 기회가 된다. 오직 기도할 때만이 이렇게 되게 만든다. 그래서 신 8:3을 터득하게 된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영도 살게 만들고 육도 살게 된다. 그러나 현금과 카드가 있으면 훨씬 실제적이고 안심이 된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만 믿으라고 한다면 굉장히 불안해진다.

오늘 나사로 부활 사건은 나흘 된 시체가 살아서 걸어 나온 사건이다. 인간 이성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동서고금에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창조주요, 이 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신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러 예루살렘에 가시면서 행하신 사건이다.

 

1. 나사로 부활 사건 개요

1)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 키로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여기에 부모 없이 세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종종 그 집에 가셨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실 정도로 예수님과 관계가 돈독한 가정이다. 그런데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누이들이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했다. 주님은 이 전갈을 받았음에도 즉각 움직이지 않으셨다. 일부러 이틀을 더 유하셨다. 왜 그럴까? 죽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죽게 되니깐 그제서야 유대로 가셨다. 4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5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하셨다.

2) 예수님은 상가에 도착하셔서 우는 자들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33~35절예 보기 바란다. 왜 예수님은 비통이 여기셨겠는가? 과거 한글 개역 성경에는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고 되어있다. 사탄이 인류를 범죄케 하고 죄, 사망 권세에 빠뜨려 놓은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셨다. 그 사망으로 말미암아 죽기를 두려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이 인생이다. (2:15) 그래서 울고 있는 자들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마르다, 마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35절에 보면 그런 그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36~38절에도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또 나온다. 여기서는 유대인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비통히 여기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죽으면 그 영이 사흘간은 무덤에서 배회한다고 여겼다. 나흘이 되면 얼굴이나 시신의 색이 변하고 썩어지기 때문에 그 영이 떠나간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다. 39절에 마르다가 하는 말이 나온다. 주님은 마르다가, 예수님 자신이 지금이라도 오라비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40,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다. 창조주께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믿음이다.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해 주님은 역사하신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아무리 크고 불가능한 문제라도 주님 편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으시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내면에 주의 음성이 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살아나고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평상시에 기도하다가 어떤 중대한 문제가 온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으신 것이다. 그런데 기도 못하고 자기 이성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음성도 못 듣고 하나님의 역사도 체험 못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불신자와 다른 눈을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이다. 무슨 눈인가? 영의 눈이다. 우리가 영의 눈이 없다면 불신자와 똑같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를 먼저 하셨다. (40~42) 그리고 큰 소리로 부르셨다. “나사로야 나오라죽은 자가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얼굴은 아직 수건에 싸여있는 상태였다. 구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이 사건의 충격은 오병이어 이상이었다. 이걸 본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교권자들은 도리어 죽이기로 작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47,48절을 보라. 49~53절까지도 보기 바란다.

 

2.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겠는가?

1) 우리는 이성과 감각과 경험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삼위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의 진리를 성령으로 믿을 것인가 둘 중 선택해야 한다.

성령의 실제성을 날마다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성령께서 믿어지는 것이 실제 믿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감으로부터 오는 생각을 이기지 못한다. 11:1, 2절에는 믿음의 정의가 잘 나와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믿음은 아직 얻지 못한 것,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소유한 것처럼 믿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반복 강조하는 히브리식 표현이다. 그러니깐 이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아직 이걸 얻지 못했다. 아직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소유한 것처럼 믿는 것이다. 그걸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을 가진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소유했다는 증거가 된다. 성령께서 주시는 맏음이 주어지면 그게 이미 소유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믿음을 성령께서 주신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설명만 하신 것이 아니라 했다. 하나님 나라가 실제 임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체험시켜 주셨다. 능력을 나타내 주셨다. 병든 자는 낫고 귀신은 쫓겨나고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는 살려 주셨다. 복음에 대해 말로만 설명하신 것이 아니다. 실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체험시켜 주셨다. 실제 저주세력을 꺾어 주셨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에 묶여있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친히 보여주셨고 그러면서 주님의 일을 그들이 대행할 것을 말씀해 주셨다. 14:12,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하셨다. 이 말씀을 실현하시도록 여러분은 계속 기도하기 바란다.

2) 우리는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취해야 한다.

2000년 전에 하신 일이 지급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근거로 지금도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 구원받도록 하신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저주와 질병도 담당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영적 저주와 더불어 환경의 저주와 육신의 저주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환경의 저주, 육신의 저주도 답당하신 것이다. 저주와 축복을 다 줄 수 있는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53:4~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고,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값을 치루어 놓으신 것이다. 우리의 저주를 담당해 놓으신 것이다. 우리의 병도 담당해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갈보리산 언약을 믿음으로 취하라고 했다. 그러니 체험 역사 실현되게 하옵소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걸 끝까지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는 못 고치시는 병이 없댜. 예수님이 어렵다고 여기신 병은 없다. 몇 번 기도해 보고 안 고쳐지면 이것은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가 봐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이것이 병만 아니라 여러분이 당면한 모든 문제에 적용이 된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어놓으신 것을 지금 적용 역사 성취 실현시키시는 일을 하고 계시다. 예수님은 지금도 죄도 사하시고 병도 고치신다. 예수님의 능력이 지금은 약해지셨거나 필요 없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탄 죄 저주 지옥 운명 가운데 빠져 있다. 그래서 전인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시다. 여러분의 동기나 욕구 충족을 위해서 이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 속에 성령의 믿음을 주신다. 여러분의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극복케 하신다. 환경의 저주, 육신의 저주를 해결하신 주님을 믿고 기도케 해 주신다. 병도 내 병이 아니요, 주님의 병이요, 주님이 주인이시다. 이미 십자가에서 짊어져 주신 병이다. 이걸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기도해라.

 

3.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당해도 창3,6,11장의 본성에서 입각한 느낌 감정 생각 논리 판단으로 반응하지 마라.

우리 본성은 문제나 일이 잘 안될 때 눌리고 우울하고 낙심한다. 그리고 불안의 동기 때문에 빨리 자기가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충분히 기도하지 못한다. 충분히 기도할 자세를 가져라. 여러분은 불안하고 눌려도 여러분 안에 주의 성령께서는 결코 눌리거나 우울하거나 낙심하거나 그러는 법이 없으시다. 모든 능력이 있으시다. 그분에게는 돈이 문제가 안 된다. 여러분이 문제가 된다. 육신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이성적 계산을 하지 말고, 성령의 생각을 해라. 광야길 인도와 가나안 정복이 백 퍼센트 주의 일인 것처럼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춘 여러분의 경제, , 취업, 가정, 자녀 문제, 질병 문제가 백 프로 주님의 일이다. 이런 주님을 실제 체험하지 않고는 전도자가 되지 못한다. 이론으로 전도자가 안 된다. 주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고 언약의 주님을 기뻐하고 기뻐해라. 신뢰하고 의탁하는 체질로 바꾸어지기 바란다. 그러면 불안이 꺾이고 문제를 주님이 처리해 주신다. 주님은 단번에 해결하지 않으시고 때때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인도네시아에 2만 명 수용하는 세계 최대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 아들이 있는데 뇌성마비로 태어났다고 한다. 하나님의 종의 아들이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어서라고 했지만 아들만 보면 낙심이 되었다. 의사가 하는 말이 뇌성마비는 21세기 의술로도 못 고친다고 한다. 그러나 이분은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저주와 질병을 다 담당하신 것을 믿고 기도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값을 치러 놓은 것이 나타나도록 기도했다. 이성에서는 자꾸 안 된다는 생각이 올라오지만, 성령의 생각을 갖고 기도했다. 1년을 기도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2년이 돼도 그대로였다. 힘이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 갈보리산 언약을 실제 믿고 기도했다. 3년째 기도했는데도 그대로였다, 그러다 4년째 1월에 아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몸이 펴지는 것이었다. 온몸의 균형이 돌아왔다.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4년째 뇌성마비가 치유되었다. 그 아들이 성장해서 인도네시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장교가 되었다. 그후 신학교 졸업해서 지금 목사가 되었다.

 

결론

오늘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창조주시다. 이런 믿음을 갖고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복이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시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였다. 창조주를 믿기 바란다. 육신의 생각은 하면 할수록 손해다. 도움이 안 된다. 생각은 계속 하면 하면 할수록 손해다. 빨리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생각만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창조주를 믿어지게 하는 생각을 주신다. 그러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적당히 살다 죽으면 되지, 하는 비젼도 없고 꿈도 없고 세상 살릴 사명도 없고 그렇게 살다 가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란다. 도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