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4일 주일예배입니다.“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 17)- 요한복음 시리즈 13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17)
성경의 믿음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신 언약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셔서 쓰실는지 더욱 확신하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지난 주에는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말씀을 드렸고 그 전주에는 나사로 부활 사건을 말씀드리면서 제가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보이는 환경과 경제와 현실에 믿음이 좌우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세계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왜 그런가? 영이 죽어 육신의 눈만 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는 환경만 보고 판단하고 계산한다. 우리의 믿음은 보이는 현실에 강력히 있다. 과학이란 보이는 것만 관찰하고 법칙을 발견해서 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 창조주께서는 보이는 세계를 창조, 보존, 주관, 통치하시며 그것을 얼마든지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민족을 어디로 이끄셨는가? 극한의 광야로 이끄시면서 신 8:3절을 배우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말씀으로 영혼도 살고 육신도 살고 환경도 복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터득되는 것이 진짜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오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전하고자 한다.
1. 성경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좌의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다 승리했다.
1) 그들은 현실의 곤경을 당해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승리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가? 히 11장의 인물들이다. 요셉, 다윗, 다니엘, 세 친구 같은 사람은 인생의 큰 역경과 위기를 겪은 사람들이다. 역경을 겪으면서 심적인 압박감과 조임과 놀람과 불안과 공포가 들어오면서 언약적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요셉이나 다윗은 단회적 역경이 아니라 십여 년을 환경과 사람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사실은 모르고 현실과 환경만 바라보았다면 반 죽었다. 그들이 기도의 비밀을 가지지 못했다면 절대 승리 못 했다. 그들은 사실 얼마나 급박했는지 기도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간 것이다. 그때 성령의 임재와 영감과 감동과 내면의 말씀을 그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이다. 만물과 모든 상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들 속에 감동과 말씀과 믿음을 주셔서 기도가 되므로 극복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지식적으로 깨닫고 이해력으로만 말씀을 받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내면의 체험 없이 “나는 안다, 나는 믿는다” 하면 안 된다. 실제 문제가 오면 못 이긴다. 창3,6,11장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합리적 이성과 감정과 느낌이 얼마나 세게 역사하는지 못한다. 합리적 이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영성이 있어야 한다. 다니엘 같은 경우는 영성 충만하게 되니깐 초월적인 하나님도 믿어지면서 자기 하는 일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었다.
2) 다니엘과 세 친구는 눈에 보이는 환경이나 현실보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더 믿었다
누가 자기 민족과 강대국의 흥망성쇠까지, 인간사를 다스리시는지 알았다. 이런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과 계시, 영감과 내면의 말씀을 얻었기 때문에 이들은 승리했다. 그러니 보이는 왕과 보이는 대적들과 굶주린 사자를 생각할 때 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바울 사도는 환경과 상황이 좋고 나쁨에 기쁨과 행복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기 안에 환경과 상황을 주관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 오직 기쁨과 행복이 있었다. 그는 풍랑 속에서도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배 밑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환경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게 되면 수단을 위해 살지 않고 목적을 위해 살게 된다. 그걸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신다. 마 6:31~33이 적용된다. 어쩌면 이런 환경을 한 번 통과해 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가 합리적 이성으로 살만하면 우리는 우리 머리로 산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상황이 오면 성도는 기도하게 된다. 여러분에게 혹시 기막힌 문제가 왔는가? 그러면 그게 이런 것을 배울 수 있는 중대한 기회가 된다. 환경과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이 여러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여러분 속에 성령으로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믿음을 주기 원하신다. 우리가 전도 운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창조주를 주관적으로 체험할 필요성이 있다. 간증에 많이 나오는 것처럼 불치병 치유나 굉장한 문제 속에서 은혜 체험을 했거나 삶 속에서 믿음이 요구되는 문제를 허락하셔서 창조주 체험을 한 사람들이 전도하게 된다. 합리적 이성은 깨지게 만드시고 창조주를 체험하게 되면 눈이 열리게 된다. 그러면 하나니을 더 이상 이론으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그냥 잘 되게만 하면 교만해지지 창 3,6,11장이 안 깨진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2. 오늘 내용은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1)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1절에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되어있다. 2절에는 마귀가 벌써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 팔 생각을 넣었다고 했다. 주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기 사람과 마귀가 지배하는 사람, 이 두 종류가 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에 얼마든지 생각과 느낌을 집어넣을 수 있다. 생각과 느낌을 집어넣을 수 있으니깐 지배할 수 있다. 처음엔 틈타고 속이다가 나중엔 지배하고자 한다. 그래서 술 귀신이 있고, 거짓말하게 하는 귀신이 있고, 미워하게 하는 귀신이 있다. 음란의 귀신이 있고, 더럽게 만드는 귀신이 있고, 정신병 주는 귀신도 있다. 이 귀신들은 인격적 존재로 대화가 가능하다.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 귀신이 말을 한다. 대부분은 못 느끼게 들락거리고 지배하는 일을 한다. 회당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자 귀신들린 사람이 발작을 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았음을 놀랜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이 말할 때는 이 귀신이 가만히 숨어있다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깐 견딜 수가 없어서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여러분이 이상하게 눌리고 우울하고 중독에 빠지고 그렇다면 귀신의 역사를 생각하여야 한다. 지난주에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했지만, 마귀는 불신자에게는 지금도 왕 노릇 하고 있다. 사탄은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역사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여기는 사실은 사탄이 지배한다. 합리적 이성으로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불신앙하게 된다. 인간을 보이는 환경, 경제, 현실 조건에 오직 관심이 꽂혀 합리적 이성으로만 살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 사탄이 어떻게 창 3,6,11장의 함정에 빠뜨려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로 살게 만드는지 잘 알아야 한다. 모르면 당하는지도 모르면서 속는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표적과 메세지를 그렇게 많이 보고 들었지만 하나도 자기 것이 안 되었다. 마귀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탄, 귀신의 실체를 알고 대적해야 한다.
2) 요일 3:8과 히 2:14에서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성육신 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다. 자기 양을 사랑하사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성찬식 제정의 사건은 생략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 다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다.
3. 예수님이 발 씻기신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1) 발을 씻긴다는 것은 성도가 매일 짓는 죄를 사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눅 22:24에 보면 또 제자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하는 말씀이 나온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제자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고 여전히 창 3,6,11장의 본성에 충실한 그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분위기에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었다. 4~10절까지 다시 읽자. 베드로가 “절대로 내 발을 씻지 못 하시리이다” 하자,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없다”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러면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했다. 이에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몸이 깨끗하니라” 하셨다. 요 5:24에 보면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다. 그러니 목욕했다는 말은 믿음으로 중생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매일 발만 씻으면 된다. 발은 매일 더럽혀진다. 예수님은 우리가 매일 짓는 죄도 씻어 주는 분이 되신다. 14~15절을 읽어 보자. 그러니 너희도 나를 본받아 발을 씻겨 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겨(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 전부 주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 우리는 함께 마귀와 싸워야 하고 사탄 죄 저주 지옥 운명에 빠진 자들을 구하는데 같이 인생을 걸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 계속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발 씻기는 일을 하기 전에 또 하면서 우리는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부터 회복되어야 한다. 실제적인 믿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봐야 한다. 히 11:3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했다. 보이는 것과 환경과 상황을 대할 때 합리적 이성과 논리 계산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제외시켜 놓고 이성적 셈법과 계산으로 들어가기 쉽다. 그러면서 염려하고 있다. 합리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성이 있어야 한다. 왜 그런가? 보이는 것에만 묶여 버리면 인본주의 이성에 갇히기 때문이다. 회사 일은 잘하는데 믿음은 없을 수 있다. 영적 고백과 성장은 안 된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는가? 사막에 강을 내시고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불신자가 가진 생명, 건강, 재능, 돈, 지위까지도 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세계와 그중에 충만한 것을 만드신 내가 건설하였도다. (시 89:11) 이런 하나님을 믿기 바란다. 또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게 하시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런 분이 우리 몸도 씻어 주시고, 발도 씻어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 분이 우리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고 지금 보좌에서 만유와 만물과 만민 만사를 주관 통치 연출하시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성령으로 현재적 통치하시는 분을 믿어야 한다. 상황을 허락도 하시고 해결도 하시는 분이 우리로 문제에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주님의 생각, 주님의 말씀, 주님의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 그래서 승리가 된다. 내면의 말씀 따라 가면 신 8:3이 성취된다. 근데 성도는 빨리 문제 해결되어 안전하게 되어 그걸 의지하고자 한다. 안전한 것을 의지하지 말고 이제 안전한 삶이 되어 복을 흘러 보내는 삶을 살기 바란다. 내가 많이 돈 많이 모아서 자식들에게 주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것을 흘러 보내기 위해서 저축하게 하옵소서. 세상에는 우리가 받은 영육의 복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복음과 함께 흘러보내야 한다. 우리는 염려에 묶여있으면 창조주께 대한 믿음이 없다. 환경에 믿음이 너무 묶여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행하면서 항상 염려끼가 내면에 남아있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염려가 내 행동을 제한해 버린다. 그래서 헌신도 안 되는 것이다.
결론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어야 진정한 누림이 되고 그래야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게 된다. 내 코가 석자면 누구 발을 씻겨주겠는가?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그분이 문제 사건에서 승리하게 만드시며, 여러분 하는 일에 성공하게 만드시며, 그러면서 복을 흘러 보내고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게 하신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됩시다.
'본교회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10월1일 주일예배 - 새 계명(요 13:21~36) (0) | 2023.10.01 |
---|---|
2023년 9월27일 수요예배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 13:1~17) (0) | 2023.09.27 |
2023년 9월20일 수요예배 -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2 (요 12:1~19) (0) | 2023.09.20 |
2023년 9월 17일 주일예배입니다.“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 12:1 ~ 19)- 요한복음 시리즈 12 (0) | 2023.09.17 |
2023년 9월13일 수요예배 - 나사로 부활 사건2 (요 11:33~44) (0) | 2023.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