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교회메세지

2023년 12월 25일 성탄절예배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 눅 2:22 ~ 35 )

by 별종외계오동 2023. 12. 25.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2:22~35)

 

2: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였다. 우리가 성탄절에 가장 많이 애용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성탄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육신적 삶에 빠져 살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이다. 기뻐하신 사람이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러분이 오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사도행전의 축복 속으로 들어가기를 간구해야 하겠다. 우리 속에는 구속 사업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령으로 와 계시다. 우리가 이 성탄에 해야 할 일은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의 통치가 나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의 통치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인간관계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주님이 나로 인해 막히지 않고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1. 주님은 구원 사역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1) 오늘 본문에 보니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27절에 보니깐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를 만났다. 그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언한 내용이 나온다. 30~32절에 보면 아기 예수님이 하실 일을 예언한다. 그는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했다. 34~ 35절은 주의 모친 마리아에게 특별히 주는 말이다.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악한)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패하거나 흥하거나 하는 운명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생애에 그대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지만 백성이 저를 영접지 아니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므로 그의 죽음은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자였다.

2)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세례부터 받고 시작하셨다.

요일 5:6에 보면 예수님은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라고 했다. 여기서 물이란 분명히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의미한다. 피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데 세례를 굳이 받으신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동일시 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죄인의 대표자로,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위에 임하셨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죄인의 대표자로 세례를 받는 일에 순종하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는 음성이 들렸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께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1) 왜 그리하셨겠는가?

먼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그것은 아담이 실패했고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을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지금도 사탄이 인간을 가장 많이 시험하는 대표적인 시험이다. 첫째가 먹을 것 가지고 시험했다. 생존과 안전과 직결되는 것 가지고 시험한 것이다. 돈은 없고 빚은 늘고,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면 사탄이 이런 시험을 거는 거다. 여러분이 이런 시험에 승리하는 것에 대해 참 감사하다. 예수님은 신 8:3절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 왜 말씀이 중요한가?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불신자가 가지고 있는 생명도, 건강도, 기능도, 부도, 지위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고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말씀 순종 여부에 인간 생사화복이 달려있다. 이것이 이론이 아닌 이스라엘처럼 진짜 광야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체험해야 한다. 성도가 심령에 성령께서 주시는 레마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환경에 속지 말고 말씀 따라 행하는데 하나님이 환경을 움직여 주시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아니면 늘 이 시험에 공격당한다.

둘째 시험은 누가복음에서는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하였다. 이것은 부귀 영화를 가지고 시험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부귀 영화가 목적이다. 첫째는 생존과 안전 확보고 두 번째가 좀 더 부자가 되어서 마음껏 누리면서 살고 자랑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하셨다. 6:13의 말씀이다. 6;12~13에 보면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했다. 이것은 구원하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라는 말씀이다.

세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케 하시리라였다. 이번에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시험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든 뛰어내리므로 명예와 영광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명예심에 대한 시험이다. 돈의 유혹에서 이기고 가난한 것도 이기는데 명예에 대해서는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과 직결되어있다. 명예심에 예민한 사람이 많다. 창피하고 무시당하는 것은 못 견딘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자살한 분도 계시다. 다윗도 하지 말라는 인구 조사를 해서 이 명예심에 넘어갔다. 인구 조사를 하므로 그 백성이 염병으로 7만 명이나 죽었다. 가만보면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시험한 내용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하였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 명예심으로 시험하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죄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고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에 빠진 세상은 지금 사사기처럼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다. 인본주의 자존심, 명예심이 근본적인 죄이다. 자기 생각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도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타락이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으니라하셨다. 6:16의 말씀이다. 명예심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인간이 기본 생존욕, 부귀 영화욕, 명예욕을 갖고 불신앙, 불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예수님은 사탄을 이기시는데 능력으로 이기지 아니하시고 전부 말씀으로 이기셨다. 사탄의 시험을 이겨놓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이렇게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모르고 있다. 온 우주의 통치자의 권위를 모르고 살고 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한 결과 인간은 죽게 되었다. 지금도 인간은 자기 경험과 인본주의 이성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있다. 교인들도말씀을 판단 취사선택하고 있다. 사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 말씀을 판단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통치자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면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셨는데도 마귀의 말에 넘어간 것이다. 그 말씀에 순종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창조자 말씀의 권위를 그만큼 인정하는가 생각해 봐라. 말씀 따라가다가도 현실 위기가 오면 자기 판단 따라가지 하나님 말씀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말씀 따라가다가 문제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우리가 수없이 말씀을 들었어도 이것이 레마의 말씀이 되도록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진짜 믿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본성에서 올라오는 느낌 감정 생각에 빠져 버린다. 자기 필요에 따라,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으로 사탄을 다 이기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다 이겨놓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다.

청년들은 자기 욕구와 자기 하고 싶은 것이 더 많다. 청년들이 자기 육신대로 살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 비로소 하나님 찾는 경우가 많다. 왜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는가? 역시 경제 문제 곧, 헌금에 시험 드는 문제든지 아니면 인간관계 명예 자존심이 걸리는 경우가 제일 많다. 지금 사회에서 왜 끊임없이 범죄하는가? 예수님이 시험 당한 이 세 가지 문제에 빠져서 그렇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 가지 문제에 안 빠지도록 우리의 배경과 보장과 복의 원천이 되신다. 광야에서 이 훈련을 이수해야지 가나안 정복이 가능하다. 설사 가나안 정복을 했더라도 이 훈련이 안 되면 들어가서도 하나님 통치를 실현시킬 수 없다. 전도가 중요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도록 하길 원하신다. 그러면서 전도 명령도 준행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사셨고 그리스도임을 입증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기진한다고 하셨다. 인생을 영적으로 통찰하셨다. 사탄에 속아 범죄하므로 영이 죽은 상태가 되었다. 영이 죽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가 없다. 전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꽂혀 살고 자기 안전과 생존을 위해 투쟁하며 살고 있다. 여러분도 투쟁하며 살고 있지만 여러분은 믿음이 있으니깐 때로는 내려놓을 수 있다. 주님 주시는 믿음이 있으니깐 주신 돈을 갖고 선한 일에 쓸 수 있다. 근데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이것을 경험해야 한다. 내가 돈 다 벌고 나서 헌금한다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 좋아지는 사람 못 봤다. 하나님이 지금 어려워도 헌금하면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는 것을 경험한다. 이 사람이 돈 벌면 진짜 헌신한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잡혀 있는 사람들의 근본문제를 아시고 숨은 문제인 정신문제를 아시고 그 결과로 실패와 가난과 병듬과 고통과 같이 드러난 문제를 아신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쳐 주셨다. 환경의 저주, 육신의 저주를 해결해 주셨다. 죽은 자를 살리며 죄를 용서하시고 먹을 것 없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능력을 보이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 제사장, 선지자이심을 입증하셨다. 제자를 부르시고 주님의 삶을 살게 제자들을 훈련, 준비시키셨다. 제자란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사람이다. 예수님 믿는다고 다 그렇게 안 산다. 제자들에게 승천 전에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자기 일을 대임시켜 주셨다. 승천 후 성령의 능력으로 세례를 베푸시면서 그때부터 제자들이 그의 일을 대행하게 하셨다.

 

3. 그 일을 지금 우리에게도 대행하도록 하길 원하신다.

1) 우리는 왜 행 1:8의 약속을 하셨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나는 행 1:8의 능력을 많이 구했으나 주님이 허락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 약속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허락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능력의 성령의 세례가 왜 필요한가?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 소원 때문에 필요하다.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시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길 원하신다. 12가지 운명에 빠진 자들을 건져내기 원하신다. 아무리 운명에 빠져있는 사람일지라도 건져내길 원하신다. 땅끝까지 구원의 역사가 필역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자기를 증명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이 성장하길 원하신다.

주일 강단 말씀을 받아도 주중에 삶이 똑같은 패턴으로 산다면 여러분 바뀌지 않는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절로 삶이 바뀔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령님과 동행해야 바뀐다. 성령님께 집중해야 바뀐다. 이런 체질로 점점 발전되어야 한다. 안 그러고 육신적인 패턴 그대로 산다면 발전되지 않는다. 티비 보는 생활, 유투브 보는 생활, 여러분 평안할 때는 육신적인 삶을 살고 문제 있을 때만 주님 의지하면 발전이 안 된다. 성령님과 동행이 안 된다. 주님이 우리 속에서 통치해서 자신을 나타내길 우리보다 더 원하신다.

2) 문제는 이것을 막고 있는 것이 창 3,6,11장에 빠져있는 나인 것이다.

불안의 내가, 염려의 내가, 나 중심의 내가, 육신 중심의 내가, 보이는 세상 기준의 내가 주인 되어 있으면 안 된다. 이런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면 될 줄로 알면 그것은 속는 거다. 성령의 역사 아니면 우리는 다 육신에 빠진다. 성령의 통치를 받을 때만 우리의 육신의 본성을 극복하게 된다. 머리 좋은 것 가지고 안 된다. 말 잘하는 것 가지고 안 된다.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창 3,6,11장의 내가 애쓰면 오히려 주님이 주인 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그간 인본주의 동기와 기준과 믿음의 현주소와 방법과 자기 실현의 욕구로 살았던 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도 이런 인본주의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런 내가 계속 주인 노릇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내가 회사 가서도 열심히 일한다. 이런 내가 열심히 살면 주의 계명도 지킬 줄로 생각한다. 문제는 자기 죄의 본성이 말씀과 상충이 된다. 자기 중심성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런데 착각한다. 내가 열심히 살면, 내가 애쓰면 주님을 위해 좀 더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한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이해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3, 6,11장은 이제 주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해야 한다. 3, 6, 11장에서 올라오는 느낌, 생각을 받아드려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과 마음은 이것과 다르다. 다르다는 것이 느껴져야 구분이 된다. 구분이 되니깐 극복이 된다. 구분이 안 되는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의 생각이 약해서 그렇다. 구분이 안 되면 육신의 생각에 잡혀 버린다. 이게 구분이 되면 아, 3, 6, 11장의 나는 희망이 없구나. 3장은 나는 자기 실현 욕구의 나 이구나. 이게 깨달아진다. 내 실현의 욕구의 나는 다른 사람 사랑하는 것이 안 된다. 실현 욕구는 센 데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애써서 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 아가페 사랑의 감동을 주셔야 된다. 이것은 출처가 다르다. 여러분이 영적 생활을 하는 것은 전부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의 통치로 말미암는 삶이다. 그걸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세상 도덕 윤리는 이성과 양심의 능력으로 지키려고 애쓰는 거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이것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 죽음을 인정하고 따라오라고 하신 거다. 3,6,11장의 본성이 올라올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미움이 올라올 수 있다. 그럴 때 올라올 수 있다고 인정하는 거다. 내 본성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라. 근데 그 본성이 나의 주인이 아니야. 네 속에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께서 주인이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령님 나를 통치해 주옵소서. 이렇게 해야 극복이 가능하다. 이런 싸움이 하루에 수십 번이라도 해야 한다. 이것이 되는 사람은 계속 발전할 수 있다. 성탄의 목적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모신 존재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영혼과 몸을 통해서 나타나도록 지음받은 존재였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성품을 나타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였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 버렸다. 영이 죽어버렸다. 창문에 불이 꺼져버렸다. 영적으로 아무 감각도 없게 되었다. 육감으로만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여러분 속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생명이 들어왔다. 만물을 복종시키시는 분이 들어오셨다. 귀신을 이기시는 분이 들어오셨다.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신 분이 들어오셨다. 그분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계속 주인으로 바꾸는 것이 기도 생활이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 망대를 세우는 거다. 내 안에 보좌의 통치가 들어온 거다.

 

결론

지금 여러분 속에는 그리스도가 와 계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면 된다. 그러면 주님이 주인 노릇을 하시게 된다. (복음 성가 나 잠잠히 주님 앞에) 주님의 희열이 올라온다.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삶이 되도록 삼년 훈련 시키셨다. 자신이 부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도록 훈련 시키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케 하셨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하셨다. 완전 충격 받았다. 감동과 환희가 가득 찼다. 그래서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덮쳐버리신 것이다. 성령께 장악된 것이다. 박해시대에 전도 운동이 일어났다. 이번 사도 행전 말씀을 통해 이것이 정말 가능하구나. 그러니 내 삶을 드려야 하겠구나, 이렇게 간주 되는 여러분 되기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 속의 생수가 흘러나와 여러분을 채우고 밖으로 흘러나가게 된다. 능력의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다. 7 망대의 축복을 누리는 교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