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행 4:23~5:11)
1장 – 언약, 승천, 사도충원/ 2장 – 성령강림, 베드로의 설교 / 3장 – 앉은뱅이 치유,설교
4장 – 체포, 공회 앞에서 심문과 경고받고 나옴
1. 성령의 재충만
1) 하나님 절대 주권에 대한 고백 -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난 뒤 교회는 핍박에 눌려 버린 게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면서 기도했다. 절대 주권을 안 믿으면 핍박 앞에 눌려 버린다.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핍박이 시 2편의 성취로 보았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들의 위협을 굽어보시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며,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그러자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거듭나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이지만 성령 충만은 반복적으로 필요하다.
2) 초대 교회는 2가지가 되었다. - 성령 충만의 결과 초대교회는 밖으로는 담대히 전도할 수 있었고 안으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생활을 했다.
- 주님이 명하신 새 계명과 전도 계명을 다 실천한 것이다. 성도가 문제 안 생기고 편안한 생활만 바라는 것은 영적으로 지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임하신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임하셔서 이 시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언약을 잡고 기도하니깐 주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시대 사명을 감당케 하였다.
2. 공유생활
1) 초대교회의 물건을 공유생활은 공산주의 것과는 근본이 다르다. - 좀 비교하자면 첫째 교회는 성령 충만의 결과였고 공산주의는 정치적 이념에 의한 혁명의 결과였다. 둘째 교회는 형제 사랑이 동기였고 공산주의는 자본가를 미워함이 동기였다. 셋째 교회는 이타적 삶으로 헌신하였으나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으로 자본가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일당 독재한다. 스위스나 덴마크, 스웨덴을 사회주의 민주주의(사민주의) 국가라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우수한 복지 제도를 실행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이 기독교 문화를 이어받고 있고 그만큼 많은 세금을 낸다고 한다.
2) 초대교회는 자발적인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 - 약 2:17~19 말씀처럼 죽은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을 통해서 행함을 보였다.
3) 이 일이 가능한 이유는 - 믿어지면 삶이 바뀐다. 성령께서 육신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욕구나 감정이나 생각을 극복케 해 주셨다. 영의 생각이 강해지니깐 완전 배경이 믿어지면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신 15:4~5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하였다.
3.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1) 출발부터 바른 동기가 아니었다. - 바나바의 소문을 듣고 시샘이 일어났다. 바나바를 따라했지만 그들의 본마음은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고 명예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자기 소유를 팔아 얼마만 내고 그것을 다 판 것처럼 말했다. 5:3절에 보면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하였다. 그들이 사탄에게 놀아난 것이다. 사탄은 직, 간접적으로 역사한다. 직접적으로 생각을 넣을 수도 있고 이미 형성시켜 놓은 체질을 이용하기도 한다.
2) 그들이 죽은 이유 - 하나님의 성령께서 충만히 임한 현장이 초대교회였다. 그만큼 초대교회에 주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는 싯점이었다. 그럴 때 교회 내부에 침입한 사탄의 역사를 막고 교회를 거룩케 하려고 불러 가신 것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죄에 대한 경종을 울리신 것이다. 교회가 조심할 부분은 경제 부분, 명예심 부분이다.
아나니아 내외도 은혜의 체험을 한 신자일 수 있다. 사탄의 통로가 되어주면 신자라도 지배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만 따르는 체질 훈련이 필요하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영이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마음과 생각은 오래 죽은 영으로 살았기에 무지와 왜곡과 거짓에 아직 많이 빠져있었다. 인본주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생각만 받아들였다. 이것이 치유되고 회복되야 한다. 마음과 생각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게 안 바뀌면 삶이 안 바뀐다
(1) 아간 사건 - 수 7장에 보면 아간이 물욕 때문에 여호와께 바쳐진 물건에 손을 데어서 그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다. 아간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룩한 현장에서 죄를 범하므로 이런 일을 당했다.
(2) 구약에 지성소 - 아주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은 제사장도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1년에 한 번만 들어가야 하고 규정을 어기면 대제사장도 죽는 일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도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져 가는 상황이었다.
(3) 삼손 – 13~16장 출생에서 죽음까지 나온다. 4장이나 할애한다.(12명 중 제일 김)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민감하시다. 죄와 성령님은 양립할 수가 없다. 죄는 사탄의 통로가 된다. 그래서 죄를 반드시 회개시키신다. 사탄이 우리가 받은 신분과 권세는 빼앗을 수는 없다. 그러나 축복은 빼았는다. 반복적인 죄, 습관적인 죄는 삼손처럼 만들 수도 있다. 여러분 자신이 사탄의 통로가 되는 죄를 먼저 회개해야 한다. 죄를 인정 안 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인격적인 교통이 안 된다. 백 번이라도 회개해야 한다.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십자가다. 신자는 십자가를 근거로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확신해야 한다. 그다음 사탄과 싸워야 한다.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싸워주시도록 주님이 주인되게 만들어야 한다.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한다.
→ 11절에 치리 결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 하니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죄에 대한 경각심, 사도의 권위, 교회의 권위를 한층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
1.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 5:4절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골 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남편과 싸웠다. 자존심 상해서 먼저 말하기 싫다. 그러나 자존심에 잡혀 있지 말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남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남편이라는 대상을 놓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행동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기본 원칙이다
2. 인간관계나, 부부관계, 사회관계가 다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이다(엡 6:5~8, 골 3:22~25).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남이 안 봐도 올바로 해야 한다. 왜 그런가? 주께 하듯 하기 때문이다. 사람 안 본다고 속여 먹고 그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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