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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4년 1월 21일 주일예배 - "교회 정화 사건"( 행 4:23~5:11 )

by 별종외계오동 2024. 1. 21.

 

 

 

교회 정화사건(4:23~5:11)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이 골리앗을 만났는데 그게 문제가 안 되고 기회가 되었다. 기도가 되어지는 사람이 문제를 만나면 기회가 된다. 위기를 만나도 그렇다. 깊은 기도가 되는 사람은 기회가 된다. 성령께서 영의 생각으로 잡아주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문제나 위기를 만나면 원망이 되고 고통이 되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럴까? 내 생각에 잡혀서 그렇다. 기도 못 하면 내 생각에 잡힌다. 기도 못 하고 있으면 시험 들고 정신적 고통당한다. 기도를 어렵게 생각지 말고 복음을 그대로 고백하면 된다. 적어서라도 하길 바란다. 노회에서 코로나가 괜찮아졌으니 캠프를 다시 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저는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화되고 개인 역량이 길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교회 역량이 된다. 설명 들어서 따라 하려고 해서는 능력이 없다. 주님이 내 안에 임해서 통치하셔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의탁해야 한다. 임해서 하는 거지 내가 설명 들은 것을 익혀서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말씀 포럼, 기도 포럼, 삶의 포럼, 전도 포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네 가지 포럼이, 올해 여러분이 해야 할 포럼이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내용이 나온다. 첫째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교회가 성령의 재충만을 받는다. 둘째 초대교회 물건 공유생활이 다시 소개된다. 셋째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나온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다. 오늘도 주신 교훈을 잘 받고 적용, 실천하기 바란다.

 

1. 성령의 재충만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서 교회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겪은 얘기를 교회에 하였다. 교회는 이런 핍박의 상황이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핍박에 눌려 버린 게 아니고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23~26절까지 다시 보자. 2:1~3의 인용하며 기도하였다. 2편은 메시아 시편으로 유명하다.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했다고 하였는데 시편에서는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으로 나온다. 군왕은 헤롯왕을, 관원은 로마 총독 빌라도로 간주할 수 있다. 27~31절을 읽어보자. 어떻게 기도했는가? 그들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면서 기도했다. 절대 주권을 안 믿으면 환경 앞에 눌리게 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위협을 굽어보시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그러자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거듭나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반복적으로 필요하다. 성령 충만의 결과 초대교회는 외부로는 그런 상황임에도 담대히 전도할 수 있었다. 교회 안으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생활을 했다. 32~35절을 다시 읽자. 이것은 주님이 명하신 새 계명과 전도 계명을 다 실천한 것이다. 성도가 문제 안 생기고 편안한 생활만 하기 바라고 주일 메시지로 귀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임하신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임하셔서 이 시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언약을 잡고 기도하니깐 주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시대 사명을 감당케 하였다. 그다음 절에 바나바가 소개된다. 바나바가 구제한 내용이 나오고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나온다.

 

2. 공유생활과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

1) 초대교회 공유생활

초대교회가 물건을 통용한 것은 자발적인 형제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 행함을 통해서 자기 믿음을 보이라고 하였다(2:17~19). 믿어지면 삶이 바뀐다. 불신앙과 염려로 묶여있었던 것이 풀리게 된다. 자유케 된다. 초대교회는 공유생활은 어떤 법적 강요로도 된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성령께서 육신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욕구나 감정이나 생각을 극복하게 해 주신다. 영의 생각이 강해지니깐 완전 배경이 믿어지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다. 주님이 주신 것들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된다. 성장배경 속에 돈에 묶인 사람들은 흘려보내지 못한다. 3장에 돈이 딱 잡힌 것이다. 초대교회는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되어있다. 초대교회 때는 가정에서 모였기 때문에 아직 건축비나, 시설 유지비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헌금이 식사 제공과 구제비와 사도들의 생활비로만 쓰였다.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들어보니깐, 울산 임마누엘교회에서는 몇 가정이 자기 집을 팔고 전세로 돌리고 그 돈으로 건축 헌금했다고 한다. 예원 교회는 건축할 때 1억씩 낼 수 있는 300명 기드온 용사를 모집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5, 4억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신명기 15:4~5에 보면 네가 민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게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하였다.

2)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곳에 마귀도 틈탄다.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그것을 사도들 앞에 두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극을 받았다. 그들의 본마음은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고 명예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자기 소유를 팔아 얼마만 내기로 부부가 의논하였다. 그러면서 판 것을 다 낸 것처럼 말했다. 5:3절에 보면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하였다. 그들이 사탄에게 놀아난 것이다. 사탄은 직, 간접적으로 역사한다. 직접적으로 생각을 넣을 수도 있고 이미 형성시켜 놓은 체질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죽어야만 했을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충만히 임한 현장이 초대교회였다. 그만큼 초대교회에 주의 영이 역사하시는 싯점이었다. 그럴 때 교회 내부에 사탄의 역사가 침입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를 막고 교회를 거룩케 하려고 그들을 불러 가신 것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죄에 대한 경종을 울리신 것이다. 사탄이 교회를 가장 잘 공격하는 부분이 경제 부분과 명예심에 대한 부분이다. 목사님들도 깨어 있어야 할 부분이다. 모 교회 임직식에 안수집사 세우는데, 정신 문제 있는 사람을 세운 것을 보았다. 그게 헌금 때문이 아니길 바랬다.

7장에 보면 아간이 물욕 때문에 여호와께 바쳐진 물건에 손을 데어서 그와 그 가족이 돌에 맞아 죽었다. 그 죽은 골짜기를 아골 골짜기라고 한다. 아간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룩한 현장에서 물욕에 빠져 죄를 범하므로 이런 일을 당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거룩한 군대였다. 초대교회 공동체와 상황이 유사하다. 아간과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시간표에 사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때 사탄의 통로가 되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5:9절을 보자. 이건 아나니아가 죽어 나간 다음에 삽비라에게 한 말이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이들에게 역사하는 사탄의 역사를 간파하였다. 사탄의 꾀에 넘어가 주의 영을 시험한 것이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영이시다. 바람과 능력 같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시다. 삼위 되신 하나님이시다.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만 따르려고 하면 된다. 육신의 생각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불안하거나 염려하거나 불신앙 하는 생각은 전부 육신의 생각이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구분이 안 된다. 구원받은 자는 신분과 권세가 있기 때문에 기도를 배우면 영의 생각으로 인도받는 성령의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아나니아 내외도 은혜의 체험을 한 신자일 수 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생애에 성령님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요 8:44 출신이다. 그러나 사탄이 구원받은 자의 신분 권세는 절대 바꿀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요 8:44의 옛 체질로 끌어 드릴 수는 있다. 사탄의 통로가 되어주면 신자라도 지배한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고전 5:5에 보면 이런 자(음행한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으로는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영이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마음과 생각은 죽은 영으로 살았기에 무지와 왜곡과 거짓에 아직 많이 빠져있었다. 인본주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생각만 받아들였다. 이것이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한다. 마음과 생각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게 안 바뀌면 삶이 안 바뀐다. 사탄의 통로가 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경종을 울려야 한다. 죄는 사탄의 통로가 된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민감하시다. 죄와 성령님은 양립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탄의 통로가 되면 반드시 회개시키신다. 사탄이 우리가 받은 신분과 권세는 빼앗을 수는 없다. 그러나 축복은 빼았는다. 반복적인 죄, 습관적인 죄는 삼손처럼 만들 수도 있다. 여러분 자신이 사탄의 통로가 되어주었던 죄를 먼저 회개해야 한다. 죄를 인정 안 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인격적인 교통이 안 된다. 반드시 죄지은 것은 회개해야 한다. 백 번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십자가다. 성령님이 와 있는 사람은 죄짓고 평안할 수가 없다. 영적인 은혜 잃으면 성도는 살 맛이 없다. 불신자는 이런 감각이 없다. 신자는 십자가를 근거로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확신해야 한다. 그다음 사탄과 싸워야 한다. 요놈이 넘어지게 해 놓고 정죄하고 눌러버린다. 회개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다음에 사탄과 싸우는데,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싸워주시도록 주님이 주인되게 만들어야 한다. 주님이 성령의 역사로 싸워주시는 것이다.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한다.

 

3. 기독교 윤리

5:4절에 보면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하였다.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3:23~25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로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하였다.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남편과 싸웠다. 자존심 상해서 먼저 말하기 싫다. 그러나 자존심에 잡혀 있지 말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남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남편이라는 대상을 놓고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다른 사람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고치라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고쳐 놓고 나를 통해 상대도 고치기를 원하신다. 기독교 윤리란 마땅히 지켜야 할 기독교 규범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행동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기본 원칙이다. 인간관계나, 부부관계, 사회관계가 다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이다.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남이 안 봐도 철저히 해야 한다. 왜 그런가? 주께 하듯 하기 때문이다. 사람 안 본다고 속여 먹고 그래서는 안 된다.

 

결론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 하니라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는 정화되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한 경각심, 사도의 권위, 교회의 권위를 한층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는 주께서 성령으로 다스리고 계신 곳이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