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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4년 6월 30일 주일예배 - 성령인도 받는 사람(행 16:1 ~ 10)- 사도행전 16

by 별종외계오동 2024. 6. 30.

 

 

 

성령 인도 받는 사람 (16:1~10)

 

우리는 큰 문제나 위기의식이 오면 가만있을 수 없다. 자기가 빨리 해결하려고 뛰쳐나가게 된다. 그런데 잘 해결이 안 되면 굉장히 시달리게 된다. 이게 창 3,6,11장의 본성이다. 이럴 때 여러분이 이때도 주님을 신뢰하고 기도로 인도받는 영성이 있다면 참 승리한다. 구약과 신약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이다. 요셉, 다윗, 다니엘과 세 친구, 바울 이것이 가능했다. 모세나, 히스기야 왕이나, 여호사밧 왕의 경우도 이런 위기 상황을 겪었다. 이때 이들은 뛰쳐나가지 않고 하나님께 나갔다. 그때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하셨다. 신앙생활은 창 3,6,11장의 본성의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열심 내고 애쓰는 게 아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본성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으로는 미운 것은 그대로 밉고, 사랑 안 되는 것은 여전히 사랑 안 된다. 내가 애쓰고 노력하면 본성을 극복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줄 생각한다. 이게 착각이다. 오히려 성경은 창 3,6,11장의 내가 사탄의 함정에 빠진 나인 줄 알고 하나님 의지 안 하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아온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걸 모르면 맨날 창 3,6,11장의 본성에 빠지게 된다. 내가 성령의 역사를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도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방향이 하나님 소원에 정말 맞추었냐가 일단 중요하다. 그러면 내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다. 이걸 알고 아침, , 밤 이렇게 3 집중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떤 문제, 갈등, 위기 가운데서도 3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여러분도 일이든, 경제든, 사역이든 위기의식을 느낄 때 뛰쳐나가지 말고, 본능적으로 힘이 들어가지 말고 기도로 들어가라. 그래서 내 생각 말고 영의 생각 곧 주님의 생각으로 인도받기 바란다.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춘 사람에게는 주님이 그 문제의 책임자요, 언약 성취자요, 모든 능력을 가지신 주인이시다. 성도는 위기의식이 올 때 굉장한 집중의 시간표가 된다. 기도 안 하면 육신 생각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옥중에서 감사하고 찬양했다.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 팀을 성령께서 길을 인도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 상태이다.

 

1.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1) 불신자는 성령 인도라는 말 자체를 모른다.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다. 영이 죽은 이성으로 자신이 주인 되어 산다. 우리도 이 체질대로 워낙 오래 살았기에, 구원받았어도 영이 약한 사람은 창 3,6,11장의 본성을 극복하지 못한다. 내가 주인이고 주님은 그저 도우미가 된다. 또 자신 돼야 한다는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위기의식이 오면 가만 못 있고 뛰쳐나가게 된다.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성령의 사람들이다.

2) 본래 인간은 어떤 영적 상태였는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을 모신 상태로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최고의 영적 상태였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통치를 실현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누가 주인이신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그 왕국의 왕이시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전제로 아담 하와는 대리 통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하셨는가?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질서도 세우셨다. 자연 질서, 관계 질서, 도덕 윤리 질서, 사회 질서, 가정 질서 다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생사의 기준이 된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통치를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 된다. 사탄은 이것을 노려 하와를 꾀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서 에덴에서 쫓겨났고 화염 검을 지닌 천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나님 나라를 불순종의 죄에서 지키기 위함이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고 사탄에게 장악되었다. 아담의 모든 후손은 영이 죽은 인본주의 이성과 창 3,6,11장의 본성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원은 뭐겠는가? 하나님 나라 회복과 그 백성 회복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셨다. 구원받고 성령 인도는 인간은 영적 상태와 함께 모든 삶이 회복된다.

 

2. 오늘 본문에 바울과 실라가 성령 인도받는 내용이 나온다.

1) 바울과 실라는 육로로 소아시아 지방의 더베와 루스드라로 갔다.(지도)

루스드라는 1차 선교 여행 때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졌던 곳이다. 그런 곳에 다시 간다는 것은 부담과 눌림이 되지 않겠는가? 성령께서 바울의 심령이 강해지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극복하게 하셨다.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다. 16:2절에 보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라고 되어있다. 그는 1차 여행 때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다고 여겨진다. 바울은 그를 데리고 2차 선교 여행에 같이 갔다. 그는 바울의 영적 아들이요, 후로는 충실한 동역자요, 충성 된 제자가 된다.

2) 6절에 보면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셨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거쳐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다. (지도)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다. 어떤 방법으로 허락지 아니하셨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막으신다는 것을 바울이 확실히 인식한 것이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바울이 백 프로 성령의 인도받는 선교를 한 것이다. 전도, 선교는 사람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시고 성령께서 전도의 주체가 되신다. 이번 여름성경학교 사전 캠프도 믿음의 전도를 해라. 우연히 하다 보니 전도됐다가 아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면 사탄의 운명 속에 있는 사람을 건져낼 수 없다. 드로아에까지 와서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았다. 꿈이 아니고 생시인데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 것이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도우라는 환상이었다. 바울은 즉각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줄로 인정하였다. 바울이 생각지 못한 유럽의 문을 주께서 열어주신 것이었다.

 

3,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을 항상 인정해야 한다. 내가 주체가 아니다. 하나님 소원을 위해 언약을 이루시는 성령께서 계시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주님이 봉사하는 것처럼 행하라고 성경에는 돼 있다. 이것이 되려면 24 체질이 되어야 한다. 24 체질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3 집중이 먼저 되는 것이다. 아침, 점심, 밤으로 3 집중하면 성령께서 주시는 영의 생각, 영의 말씀으로 인도받게 된다. 우리가 창 3,6,11장의 본성으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으로 반응하는 체질이 된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 받으면 다음의 세 가지 발전 단계가 있다.

1) 첫 단계가 3,6,11장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 느낌, 생각과 성령께서는 주시는 감정, 느낌, 생각을 구분하는 단계다.

기도 생활이 안 되면 이 구분 자체가 안 된다. 예전에 수련회나 부흥회가 많았다. 부흥회 에 은혜를 받았어도 3~4일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간다. 신앙생활은 지식이 아니고 현재적 인 인격적 교제이다. 현재 주의 영이 내게 오셔서 통치하는 인격적 교제이다. 어제 충만했어도 오늘 성령님을 힘입지 못하면 영적 상태는 약해진다. 평상시에 영적 생활의 규모가 안 되어 있는 학생들이 수련회 때 은혜받아도 돌아오면 원점으로 돌아간다. 수련회 때 은혜받는 것은 집중이 되었기 때문이다.

3,6,11장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 느낌, 생각과 성령께서 주시는 감정, 느낌, 생각을 구분하라고 했는데 불신자는 이게 되겠는가? 영이 죽은 불신자는 이 구분이 안 된다. 물론 성도라도 기도 안 하면 창 3,6,11장의 본성에서 형성된 체질대로 산다. 문제나 갈등이나 위기 앞에서 염려하고 시험 들고 상처받는다. 불신자 때 우리는 창 3,6,11장의 본성 속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고 머리 돌려서 사는 것만 배웠다. 이걸 모르면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받았어도 그동안 형성된 인본주의 체질을 갖고 주를 위해 살고자 하게 된다. 여전히 창 3,6,11장의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열심을 낸다. 종교인들은 다 이런 식으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방법인가? 성령께서 영적 상태, 마음 상태, 생각 상태를 주장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 생각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의 인도 받으면 역발상이 되기 시작한다. 영적 상태가 안 좋으면 내가 육신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에 잡히는구나, 이렇게 분별이 되어진다. 그러면 본성에서 올라오는 대로 빠지지 말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영적 상태를 바꾸면 된다. 3,6,11장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 느낌, 생각과 성령께서는 주시는 마음, 생각을 구분할 수 있기 바란다. 이게 구분이 되어야 창 3,6,11장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에 안 빠질 수 있게 된다.

2) 두 번째 단계는 구분될 뿐만 아니라 극복하고 승리하게 된다.

물론 이게 한 두 번에 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삼 집중이 되어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추고 주님의 관심과 생각에 맞추게 되면 주님이 더욱 책임자, 언약 성취자가 되어 주신다. 지난번에 정명숙 집사님이 남편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했다는 것을 간증하셨다. 성령께서 하게 해 주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지 못한 영의 생각을 엄청나게 할 수 있게 하신다. 모든 진리, 지혜, 생명, 능력으로 통치 인도 역사해 주시길 원하신다. 이 맛을 보면 영적 생활이 기쁘고 재미있다.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승리와 응답을 체험하게 된다. 여러분이 기도에 집중하게 되면 성령님이 주시는 많은 생각을 받게 된다. 왜 부부싸움 하는가? 내가 답답하고 편치 않은데 거니깐 부부싸움 한다. 영적 상태가 좋으면 훨씬 안 하게 된다. 3,6,11장으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으로 반응하는 사람으로 바뀌면 하는 일에 승리한다. 혼자서도 살아남는다.

3) 세 번째 단계가 주객과 체질을 바꾸어 믿음과 순종의 24 체질의 제자로 발전된다.

2:20과 살전 5:16~18이 된다. 우리가 많은 메시지를 받지만 메시지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막히지 않는 통로가 되면 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성령으로 24시 강력한 통치 속에서 선교 여행을 하였다. 이게 다이다. 주님을 항상 인정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다. 그러면 주객이 바뀌니 믿음의 전도, 믿음의 사역, 믿음의 일, 믿음의 재정, 믿음의 인간관계, 믿음의 모든 삶을 살 수 있다. 믿음이란 말을 왜 쓰는가? 내가 주인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통치하셔서 아버지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6:33의 삶과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회복된 하나님 형상의 모습이다.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단계는 3 집중이 발전하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의 연수에 있지 않고 얼마만큼 성령의 인도 받느냐에 달려있다. 성령께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을 부어주는 사람이 있다. 성령 체험을 강하게 한 사람은 1~3단계가 굉장히 단축된다.

 

결론 신앙생활은 율법으로는 안 된다. 지식으로 안 된다. 성령의 인도로 된다.

여러분이 일이 잘 안될 때, 사역이 잘 안 될 때, 전도가 잘 안 될 때, 문제가 생겼을 때 이때도 기뻐할 수 있는가? 보통 기뻐 못 하고 창 3,6,11장의 본성으로 반응한다. 원망하거나 낙심한다. 3 집중 훈련이 잘 된 사람은 1~3번의 인도를 받게 된다. 이러면 뭔 일이 안 될 때 자기 본성은 눌리고 염려하고 답답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거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자기 안에 안 눌리고 안 염려하고 안 답답하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면 된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자녀가 믿음이 없고 기능적으로도 부족하면 부모는 본성상으로 걱정이 된다. 내가 부족한데 교회에 대해 바람을 갖게 된다. 내 안에 성령님은 내 자녀가 아직 잘 안돼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녀를 보게 하신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관점으로 본다. 신앙생활의 덕목이 믿음 소망 사랑이다. 이 세 가지 관점으로 우리 자녀를 바라보는 것도 된다. 안 되고 있는 사람을 볼 때도 원래 하나님 형상인데 지금 많이 망그러졌다 라고 본다. 그런데 주님은 얼마든지 회복시킬 수 있다. 그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내 자녀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소망을 가진다. 성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이 잘 안될 때 보통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한다. 짜증스러운 말, 불만스러운 말을 내뱉게 된다. 여러분 안에 주님은 걱정하고 있지 않으시다. 주님은 얼마든지 내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실 수 있으신데 내가 중요해.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게 중요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대부분 자기에게 걸린다. 자기 염려 동기나 욕구 불만에 걸린다.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 욕구 성취에 대한 불만족이다. 자기가 완성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일이 잘 안될 때 육신의 본성으로 반응한다. 기쁨이 없다. 주님을 기뻐하지 못한다. 성령님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은 이 일이 안 돼도 주님이 믿어지고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신다. 아버지 소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로 행복하고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