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찬양 (행16:16~40)
한동대 형제 체험담) 하나님을 의지하면 자기 의지가 약해지는 걸로 생각함.
일을 할 때, 돈을 벌 때, 사역할 때, 전도할 때 잘 안될 때가 있다. 그때도 주님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잘 안되면 본능적으로 눌리기 쉽다. 기쁨을 잃기 쉽다. 그런데 그때도 생각하기를, “내 본성은 눌릴 수 있어, 그러나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은 결코 눌리는 법이 없으시다. 그분은 모든 능력이 있으시고 나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분명히 아버지 소원을 성취하신다.” 이런 식으로, 이때가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할 때다. 이때 사도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원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내 인생을 살지 않는 것이다. 내 동기 때문에 살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 내가 살고 내 동기에 의해 살고 있기에 일이 안 되면 주님을 의지했다가도 주님을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추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고 있다. 정말 여러분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에 일치가 되면 그야말로 그때부터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왜 인가? 방향 맞추었으니깐 그렇다. 그분이 책임자가 되신다.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일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걸 체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단계를 넘는 분깃점이 된다. 주님은 지금도 아버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다. 그 일에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 우리 속에 성령으로 와 계신 것이다. 성령님은 일이 잘 안돼도 기뻐하라고 하신다. 일이 잘 안돼도 네 동기 때문에 불만족하지 말고 이때도 주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게 사실 불가능하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성령님은 계속 하나님 믿게 만드신다. 그리스도 믿게 하신다. 여러분이 성령님으로 그리스도 믿으면, 그리스도께서는 또 성령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통치 인도해 주신다. 다시 영적인 힘을 주신다. 성령님은 모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일이 잘 안 된다고 해도 내가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걱정하는 이유도 주로 나 때문에 걱정한다. 일이 잘 안될 때 주님 때문에 속상한 게 아니다. 내 동기에 불만족하니깐 기쁨이 없어진다. 그런데 내 동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주님을 계속 믿고 기뻐하며 의탁하고 순종하면 영적 상태부터 회복시키신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여러분이 만약 걱정한다면 왜 걱정하는가?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걱정인지 자기를 위한 걱정인지를 점검해 봐라. 자식을 놓고 기도하는데 자식이 잘 안된다면 정말 주님 때문에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내 동기 때문에 걱정하는 건지 분별해 봐라.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데 걱정이 들어온다면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걱정이고 목사님을 위한 걱정인지 아니면 자기를 위한 걱정인지를 분별해 봐라. 대부분은 자기 동기에 대한 욕구 불만이다. 욕구가 센 사람은 뛰쳐나가게 된다. 그게 안 채워지면 그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 나가버리게 된다. 주님은 여러분 속에서 모든 진리, 생명, 지혜, 의, 사랑, 능력, 치유, 권능의 근원이고 원천인 성령으로 역사해 주기 원하신다. 여러분이 여러분 동기 때문에 불만족에 빠지지 말고 진짜 하나님의 소원에 방향을 맞추어서 믿음과 순종하기 원하신다. 그러면 그게 누구의 일이냐 말이다. 주님이 일이다. 주님이 아버지 소원을 위해서 책임지실 일이요, 주인 되시는 일이 된다. 그 일에 내가 도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안 맡긴다. 그만큼 주님이 확인되고 인정되어 있지 않다. 보통은 주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일이 잘되어야지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에 정말 방향을 맞춘 것도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자기 동기와 자기 방법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것 첸지가 어렵다. 예전에 김무철 집사님이 고백하기를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내 생각으로 하지 않고 항상 주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다. 그런 면에서 참 감사하다 인정이 된다. 그런 내면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인도받는 것이 자꾸 발전되어야 한다. 그래서 창 3,6,11장에서 올라오는 생각인지, 성령이 주시는 생각인지 구분하라는 것이다. 이것만 제대로 되어도 여러분은 자꾸 성령의 사람으로 바뀐다. 근데 기도를 제대로 못 하면 영적 상태가 안 좋으니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기도를 못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결정적으로 오판하기 쉽다.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이 안 되면 이런 저의 말씀을 못 따라온다. 이해는 하는데 체험은 안 된다.
일이 잘 안되고 문제가 생기고 전도가 잘 안돼도 그래도 감사했던 사람이 바울과 실라였다. 이런 삶이 체득된 사람이 3 응답을 받을 수 있다. 문제에 해답이 있고 갈등이 갱신의 기회가 된다. 이건 육신의 생각으로는 이런 생각 못 한다. 기도로 들어가니깐,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으로 된다. 그러니 위기가 큰 기회가 된다. 왜 그런가? 내가 안 살고 그리스도가 살고 계시니깐 그렇다. 바울과 실라가 실제 그런 삶을 살았다. 오늘 본문에 보니깐 바울과 실라가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혀 차꼬가 채워져 있는데도 한밤중에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문제나 갈등이나 위기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소원에 맞추었고 자기 동기로 안 살고 있다. 자기 방법으로 애쓰고 있지 않다. 완전히 주객과 체질과 동기가 다 바뀌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기 안에 모든 능력이 있으시고 책임자가 되시고 신실하신 그 주님이 믿어지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밤에 성령께서 자기 내면에 감동과 은혜와 기쁨을 충만히 주신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며 찬송했다.
1. 빌립보 전도 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 점하는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 나온다 (16~18)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은 우리나라 무당과 같다. 그녀가 번 돈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인집 사람은 다 이익을 보았던 것 같다. 귀신은 예수님도 알아 보고,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도 알아 본다. 귀신이 바울 일행을 보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면서 소리 질렀다. 이런 식으로 소리치며 여러 날을 쫓아다녔다. 이게 전도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방해 되었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랬더니 즉시 나갔다. 예수님은 직접 자기 권위로 귀신을 쫓아내시지만, 바울은 그 예수님 이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던 것이다. 바울 속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2) 간수와 그 가족 구원 (9~40)
귀신이 나간 일로 인해 여종은 점하는 능력이 사라져버렸다. 주인들이 이익이 끊어진 줄 알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고소했다. 그 지역 관리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많이 치고 옥에 가두었다. 복음 때문에 많이 맞고 옥에 갇힌 것이다.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에 차꼬까지 채웠는데 그 밤에 기적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죄수의 매인 것이 벗어졌다. 죄수들은 도망갔고 바울과 실라만 남았다. 본능적으로 보면 바울과 실라도 도망쳐야 할 텐데 안 도망친 게 이상하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과 생각을 잡아 계셨기 때문이다. 직접 음성으로든 말씀으로든 마음과 생각을 잡아주실 수 있다. 간수는 자다가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 하였다. 이때 바울이 크게 소리를 질러 막았다. 28~32절을 보라. 간수는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이 사람들의 어떤 권위를 느꼈을 것이다. 그 권위 앞에 엎드린 것이다. 30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온다.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그 가족들까지 바울의 말을 들었다.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 완전히 반전이고 극적 상황이 연출 되었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주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신 일이다.
2. 우리가 일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우리를 잡고 주님이 일하시도록 항상 믿음과 의탁과 순종의 방법이어야 한다. 주님은 인간의 능력과 방법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라고 하지 아니하신다. 회사에서는 인간의 머리로 철저히 합리성과 계획성으로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전도나 사람을 기르시는 일은 성령께서 주체시다. 여러분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철저히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부모가 첫 번째 통로가 되고 교회가 두 번째 통로과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는 잘 모른 채 합리성과 방법만 따져서는 안 된다. 성령의 사람이 계획을 짜고 일을 할 때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결국 프로그램이나 훈련 과정도 운영하는 사람이 모두 성령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초월성과 합리성과 지혜도 다 주신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도 이렇게 일해야 한다. 모든 불신자는 창 3,6,11장의 내가 주인이 되어 영이 죽은 인본주의 이성으로 일한다. 인본주의 이성으로 열심 낸다. 인본주의 기준과 (안전과 명예)동기와 (성공)목표와 (보이는 현실에 대한)믿음과 (자기 안간힘)방법으로 일한다. 우리도 기도 속에서 성령의 통치받는 삶을 배우기 전에는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걸 인식하게 될 때 여러분은 이런 내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죽었어야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교도소에 있는 흉악범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 자체가 영이 죽어 사탄의 함정과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죄된 존재들이다. 이걸 보게 되면 아이큐가 좋고 학벌이 있고 지혜가 있어도 정말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아직 인정이 안 되는 사람은 자기가 너무 잘 낫고, 자기 의도 센 거다. 그래서 자기 잘 난 것을 항상 얘기하는 거다. 자기 의를 가지고 의롭지 못한 사람 얘기하는 거다. 근데 내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기준부터 방법까지 틀렸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고 마귀에게 빠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의 죽음을 진정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기준도, 동기도, 방법도, 믿음도 다 바꿀 수 있게 된다. 다 내 안에 오신 그리스도로 바꾸게 된다. 그걸 믿음의 삶이라고 하는 거다. 이게 아닌 사람은 그냥 종교인과 같다. 인본주의인 내가 잘 믿으려고 애쓰는 거다. 그러면 교회에 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어요? 라고 물을 수 있다. 맞다. 거의 종교인으로 산다. 그렇다고 다들 그렇게 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다. 제자들도 자기 동기 충만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면, 한 자리 해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갔었다. 그때 예수님 뭐라고 얘기하셨는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라.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을 것이라 하셨다. 여러분 내면에 깔려 있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동기와 인본주의 방법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 믿음과 순종의 방법으로 행하면 주님이 아버지 소원을 위해서 여러분 속에서 성령으로 통치 인도 역사해 주신다. 다음 주도 얘기하겠지만 모든 문제는 내가 걸려서 문제이다. 주님의 일이 잘 안돼서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안전의 동기, 명예의 동기, 인정의 동기가 걸리니깐 싫고 뒤틀리고 불만족 한 거지, 주님이 정말 너무 마음 아파서, 주님이 영광을 안 받아서 내 마음이 죄송하고 아픈 그런 사람은 없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가서 실컷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서 차꼬에 채였는데 한밤중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거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게 내가 살면 불가능하다.
3. 우리는 세상 보는 렌즈도 바꿔 껴야 한다.
1) 보통 환경을 문제로 알지, 자기가 낀 렌즈가 문제인 줄 잘 모른다.
내 남편이 문제인 줄 생각하지 내가 끼고 있는 렌즈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한다. 물론 남편이 문제가 있다. 근데 내 렌즈부터 바꾸기를 주님이 원하신다. 아담의 모든 자손은 창 3,6,11장의 렌즈를 끼고 태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인식 잘 못한다. 정말 여러분이 성령의 통치받는 사람이 되면 될수록 이것이 인식된다. 인식을 잘 못하니깐 계속 나 중심, 육신 중심, 보이는 세상 중심의 렌즈를 끼고 산다. 이걸 그리스도 중심의 렌즈, 하나님 나라 중심의 렌즈, 성령 충만의 렌즈로 바꿔 끼고 세상을 봐야 한다. 문제를 봐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발생한 문제를 안다. 하와와 아담을 범죄케 한 사탄은 그 자손으로 창 3,6,11장의 렌즈를 끼고 태어나게 만들었다. 그 자손은 영이 죽은 인본주의 이성으로 태어난 거다. 이 렌즈를 끼고 산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래 살았다. 인본주의 기준, 인본주의 동기, 인본주의 목표, 인본주의 믿음, 인본주의 방법이 다 형성되는 것이다. 그게 정상인 줄 알고 참 오랫동안 살아온 것이다. 예수님 믿는데 은혜 좀 받는다. 그런데 일할 때는 이제까지 형성되어온 체질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성취감이 있다. 그 성취감 가지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고생하며 성취했으니 이제 쉬어야 하고 육신적인 삶을 보강해야 한다. 그러니 레저도 하고 좀 더 재미있는 생활도 하고 돈도 거기에는 팍팍 쓰고 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죽어주셔야 할 만큼 우리 인생에 문제가 와 있는지는 진짜 깊은 근본 문제까지 못 보는 것이다.
성장 배경 속에 겪었던 환경의 문제, 사람의 문제만 문제로 생각했다. 그게 아닌 것이다. 내가 창 3,6,11장의 태생으로 창 3,6,11장의 렌즈를 끼고 있는 것이 더 문제였다. 영이 죽은 이성과 창 3,6,11장의 본성으로 태어나. 인본주의 사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 누리기 전까지는 인본주의 기준, 동기, 목표, 믿음, 방법으로 자기 실현과 자기 성공을 위하여 살았다. 이것을 통찰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이 눈이 잘 안 열리니깐 믿음대로 살고 싶어는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형성되어온 것들은 그걸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못 느낀다.
요셉과 다윗은 그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승리했다. 왜 그런가? 그들은 복음의 렌즈 곧 언약의 렌즈를 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 렌즈를 끼게 만드신 것이다. 완전히 하나님 중심, 하나님 나라 중심,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동기로 사는 다윗이 되었다. 그러니 문제가 문제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문제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렌즈를 못 낀 사람들은 문제가 전부 자기한테 다 걸리게 된다. 창 3장이니깐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으니깐 기분이 나쁘지! 한다.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가 이렇게 돼지 안잖아, 그러니깐 문제지? 요셉과 다윗도 그냥 육적인 사람들이었다면 그 문제들 앞에서 다 넘어지고 자빠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들의 눈을 바꾸셨다. 복음의 렌즈를 끼고, 언약의 렌즈를 끼게 만드셨다. 그러니깐 문제 배후에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는 거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이루실 언약이 믿어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할 일은 믿음과 의탁과 순종밖에 없다. 이들은 정말 말씀 따라갔다.
2) 지금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렌즈를 바꿔 끼게 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셨고 보좌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으로 렌즈를 갈아 끼워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사실 성령의 렌즈를 받았다. 창 3,6,11장의 본성의 내가 주인 되었던 것이, 사탄의 함정에 빠져서 사탄의 통로 되었음을 알게 해 주신다. 환경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창 3,6,11장의 렌즈를 끼고 살았음을 알게 해 주신다. 이게 정말 인정이 될 때부터 렌즈를 바꿔 끼게 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렌즈로 바꿔 끼게 된다. 그러면 진짜 3 집중, 3 응답, 3 셋팅이 된다. 이 사람이 진짜 플랫폼 된다. 파수 망대가 된다. 이 사람은 자기한테 걸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성령의 통치를 받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된다. 일이 잘 안될 때도 걱정하지 않고 주님을 기뻐하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일이 잘 안되는 것은 하나님께는 문제가 안 된다. 우리가 갱신할 기회가 된다.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실 기회가 된다. 믿음을 훈련하는 기회가 된다.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그것이 돈의 문제든, 일의 문제든 주님께는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창 3,6,11장의 내가 주인되면 탁 불신앙으로 들어간다. 염려로 들어간다. 자기 동기에 안 맞는 거다. 그래서 문제가 문제가 된다. 주님을 기뻐하고 기뻐할 수가 없다. 누구 때문에, 어떤 문제 때문에 라고 말하게 된다.
바울과 실라는 매 맞고 감옥 갇혔는데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그들의 기쁨은 환경과 상황에 있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그들의 기쁨이 환경과 상황과 돈에 있다. 이게 안정되면 하나님 감사해요 한다. 안되면 하나님 왜 이러세요 한다. 아직 나의 렌즈도 안 바뀌었다. 내 동기도 안 바뀌었다. 예수님 믿는 것도 내가 잘 안되면 주님이 기분 나쁜 거다.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춘 그들은 주객과 체질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러니 감옥 상황 속에서도 창 3,6,11장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에 빠지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감사와 찬송을 할 수 있었다. 여러분 속에 보배 되신 그리스도가 계시다. 근데 가족 관계 때문에 왜 걸리는가? 왜 항상 남편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하는가? 왜 성도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하는가? 우리 교회가 이렇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가?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은 사도 바울이 누리고 계신 주님과 같은 분이시다. 신 33:29절에 모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이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민이 되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감격하는 것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깐 그렇다. 하나님이 칼과 방패가 되신다. 그러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 시대는 전쟁의 시대이다. 그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 삼고 전 세계를 향해 여호와의 증인,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문제가 전혀 없으시다. 근데 뭐가 문제가 있는가? 3,6,11장의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3,6,11장의 감정과 생각에 자꾸 빠지는 거다. 3,6,11장의 기준으로 자꾸 판단하는 거다. 3,6,11장의 동기 만족에 자꾸 마음을 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행복하신 거기에 동기가 있는 게 아니다.
결론
믿음과 순종의 체질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올해 목표 삼아라. 그리스도 렌즈로 바꿔 껴라. 문제 당할 때 내가 주님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지 점검해 봐라. 그런 주님을 누리는데서 참된 전도 동기가 나온다. 이런 그리스도를 내가 누릴 수 있게 되다니 하면서 인생 회복이 된다. 절대 망할 수 없는 인생이 된다. 절대 하나님 소원의 통로가 되는 인생이 된다. 진정한 제자가 된다. 맨날 사업 때문에, 일 때문에, 맨날 인본주의 동기, 인본주의 방법, 인본주의 믿음 속에서 허덕거리고 그래서 파김치가 되어서 예민하고 눌리고 그래서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통로가 되어주고 복의 근원이 되어줄 수가 없다. 내가 눌려 살고 내가 예민하게 사는데 뭘 하겠는가? 내가 욕구 불만으로 사는데 뭘 하겠는가? 옆에 있는 사람도 잘 못 도와준다. 진정한 전도의 동기를 못 가진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삶이 되면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사탄에게 잡혀서, 어떻게 형성되어져서, 지금 마귀에게 종 노릇 하며, 마귀가 속이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지가 보이게 된다. 저러다가 지옥까지 끌고 가겠구나 하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참된 전도 동기가 생긴다. 이번에 사전 캠프는 믿음의 전도를 배우는 기회 되기 바란다. 모든 것 되신 성령이 와 계시다. 그분의 소원과 관심에 맞추어서 그분의 동기와 그분의 기준과 믿음과 방법으로 들어가면 그분이 마음 것 쓰실 수 있는 역량이 날마다 길러진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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