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동기, 방법, 렌즈를 바꿔라 (행16:16~40)
목회 시 성도 때문에 걱정하는 경우가 있다. 성도가 결석하거나 갈등에 빠졌거나 말씀에 은혜를 못 받거나 할 수 있다. 목회자는 그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목회자 동기 때문에 걱정할 수도 있다. 그것이 창 3,6,11장의 본성이다.
(질문) 일이나, 사역이나, 전도나 잘 안될 때도 주님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이때도 잘 안되면 본능적으로 나 때문에 걱정하기 쉽다. 눌리기 쉽다. 그래서 자기 힘이 들어가기 쉽다. 이때 고백이 중요하다. “내 동기, 욕구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할 때다. 이것이 가능한 원리가 있다.
1) 내가 내 인생을 살지 않고 내 동기 때문에 살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 내가 살고 내 동기에 의해 살고 있기에 일이 안 되면 주님을 의지했다가도 주님을 기뻐할 수가 없다.
2)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맞추지 못하면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한다. 맞추면 주님이 책임자가 되신다.
3) 주님이 반드시 아버지 소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령님은 일이 잘 안돼도 기뻐하라고 하신다. 네 동기 때문에 불만족하지 말라고 하신다. 보통은 자기 동기 때문에 염려하고 주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일이 잘되어야지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이 창 3,6,11장의 본성이다. 여기에 빠지지 말고 나를 수단으로 드려라.
→ 이런 삶이 체득된 사람이 3 응답을 받을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실제 그러했다.
1. 빌립보 전도 시 일어난 사건
1) 점하는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 나온다.
바울은 전도를 방해하는 귀신을 성령님을 힘입어 예수님 이름으로 쫓아내었다. 바울 속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의 힘, 영적인 힘이 있었다.
2) 감옥에 간 사건이 나온다. (9~40)
바울과 실라는 삶의 주체와 동기와 방법이 바뀐 사람이었다. 많이 맞고 깊은 옥에 갇혔지만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때 지진이 일어나서 묶였던 것들이 다 풀렸다. 죄수들이 도망갔을 때 바울과 실라는 안 도망갔다. 직접 음성으로든, 말씀으로든 성령님이 지시한 것이다. 자다가 놀라 깬 간수는 이 사람들의 권위를 느끼면서 그들 앞에 엎드렸다. 완전히 반전이고 기적적인 상황이 연출 되었다. 간수만 아니라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모든 일은 주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신 일이다.
2. 우리의 주체와 동기와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1) 삼위 하나님께서 구원역사의 주체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자세는 주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과 의탁과 순종의 방법이어야 한다.
2) 우리가 불신자 때는 철저히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았다.
모든 불신자는 창 3,6,11장의 내가 주인이 되어 영이 죽은 인본주의 이성과 창 3,6,11장의 본성으로 살았다. 인본주의 사상과 가치관을 근거로 한 인본주의 기준과 (안전과 명예)동기와 (성공)목표와 (보이는 현실에 대한)믿음과 (자기 안간힘)방법으로 살았다. 항상 긴장이 필요하다. 흉악범만 큰 죄인이 아니고 우리 존재 자체가 영이 죽어 사탄의 함정과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대로 살아 온 심히 죄 된 존재들이다. 이걸 알게 되면 아이큐가 좋아도 공부 잘해도 선행을 해도 정말 내가 왜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하는지 인정할 수 있다. 이것이 인정이 안 되는 사람은 너무 잘 낫고, 너무 자기 의가 세고, 너무 자기 자존심으로 산다. 근데 내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기준부터 방법까지 틀렸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고 마귀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의 죽음을 진정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럴 때 진정한 전환이 일어난다. 기준도, 동기도, 목표도, 방법도, 믿음도 다 바꿀 수 있게 된다. 다 내 안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것으로 바꾸게 된다.
3) 우리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동기와 욕구와 인본주의 방법이 세다.
이걸로 모든 사람을, 심지어 주님조차도 내게 끌어당긴다. 그래서 모든 문제는 내게 걸려서 문제이다. 주님의 일이 잘 안돼서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안전의 동기, 명예의 동기, 인정의 동기가 걸리니깐 싫고 불만족 한 거지, 주님이 정말 너무 마음 아파서, 주님께 영광을 못 돌려서 내 마음이 죄송하고 아픈 그런 사람은 없다. 내가 십자가에 왜 죽어서야만 하는지 알 때 비로소 주체와 동기와 방법을 바꿀 수 있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 속에서 아버지 소원을 위해서 성령으로 통치 인도 역사해 주신다.
3. 세상 보는 렌즈도 바꿔 껴야 한다.
1) 보통 환경을 문제로 알지, 자기가 낀 렌즈가 문제인 줄 모른다.
2) 아담의 모든 자손은 창 3,6,11장의 렌즈를 끼고 태어났다.
영이 죽은 인본주의 이성과 창 3,6,11장의 렌즈를 낀 것이다. 그런데 이 렌즈를 끼고 산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래 살았다. 인식을 잘 못하니깐 계속 나 중심, 육신 중심, 보이는 세상 중심의 렌즈를 끼고 산다. 어릴 때부터 인본주의 기준, 인본주의 동기, 인본주의 목표, 인본주의 믿음, 인본주의 방법이 형성 고착되었다.
3) 성장 배경 속에 겪었던 환경의 문제, 사람의 문제만 문제로 생각했다.
외부 문제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창 3,6,11장의 태생으로 창 3,6,11장의 렌즈를 끼고 있는 것이 더 문제이다. 영이 죽은 이성과 창 3,6,11장의 본성으로 태어나. 인본주의 사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 누리기 전까지는 나 중심과 육신 중심의 기준, 동기, 목표, 믿음, 방법으로 자기 실현과 자기 성공을 위하여 살았다. 이것을 통찰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자신도, 타인도 사탄이 형성시켜 놓은 것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이 눈이 열릴 때 진정한 운명 전환이 된다. 이걸 그리스도 중심의 렌즈, 하나님 나라 중심의 렌즈, 성령 충만의 렌즈로 바꿔 끼고 자신도 보고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한다.
4) 요셉과 다윗은 성령의 깊은 통치 속에서 다른 렌즈를 끼게 되었다.
복음의 렌즈 곧 언약의 렌즈를 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승리했다. 이 렌즈를 못 낀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전부 자기한테 다 걸리게 된다. 요셉과 다윗도 육적인 사람들이었다면 문제 앞에서 다 걸려 넘어졌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들의 눈을 바꾸어 주셨다. 복음의 렌즈를 끼고, 언약의 렌즈를 끼게 만드셨다. 문제보다 크시고 문제를 연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셨다. 그러니 믿음과 순종으로 말씀 따라갈 수 있었다.
결론 - 지금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렌즈를 바꿔 끼게 해 주신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렌즈로 바꿔 끼게 되면 진짜 3 집중, 3 응답, 3 셋팅이 된다. 자기한테 걸리는 사람이 아니다. 일이 잘 안될 때도 걱정하지 않고 주님을 기뻐하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믿음과 순종의 체질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올해 목표 삼아라. 주체, 동기, 방법, 렌즈를 다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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