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의 마인드와 관점(고후 5:13~6:2)
우리는 지난주에 제자 야손에 대한 말씀을 보았다. 오늘은 베뢰아 지역 전도에 대해 볼 차례지만 사역자의 마인드와 관점에 대해 한번 더 말씀드리고자 한다. 요즈음 날씨가 최고로 더워지고 있는데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굉장히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제가 지지난 주에 영업 다니는 아들에게 이런 문자를 했다. “아들, 네가 일할 때 계속 주님께 의탁하고 있는 줄로 안다. 잘하는 일이다. 이제 한 단계 더 나가기 바란다. 이제 창 3,6,11장의 본성의 네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인을 바꾸거라. 이거야말로 최고 분수령이다.”했다. 왜 주인을 바꾸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겠는가? 우리 속에 두 주인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 되어 내 동기로 내 방법으로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면 주님이 주인으로 못 사시게 된다. 내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바다.
오늘 본문 14~ 15절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주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어주신 이유가 나와 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죽어주신 자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어떻게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살 수 있겠는가? 창 3,6,11장의 본성의 내가 애쓰면 이렇게 되겠는가? 아니다. 3,6,11장의 본성의 내가 주인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된다. 보통 자기에게 걸리고 마음 상하고 하는 게 왜 그런가? 3,6,11장의 내가 애쓰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실 주님이 사시는 것을 막고 있다. 주님이 나를 통치하시도록 주님이 주인이신 것을 진짜 인정하고 믿고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통해 사시는 것이다. 이게 터득되어야 한다.
제가 2018년에 말초신경장애가 왔는데 그때부터 집중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성령께 집중하다 보니깐 영의 생각과 영의 말씀으로 자꾸 인도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깐 제가 많은 전환을 체험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뒤집혀야 한다는 생각을 주셨고 그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해 주셨다. 여러분도 이렇게 될 때 실제 파수 망대가 되어진다, 여러분이 실제 7 망대, 7 여정, 7 이정표를 갈 수 있게 된다.
1. 16절,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한다고 했다. 왜 그런가?
1) 첫 번째, 사람의 겉 사람을 볼 게 아니고 그 사람 속에 그를 위해 죽어주신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15절처럼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자 속에 계신 분은 안 보고 그 사람의 겉 사람만 볼 때가 참 많다. 외모, 소유, 재능, 능력, 인격 이런 것들을 보고 평가한다. 겉 사람만 보는 것이다. 우리는 또 나 중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좀 떨어지는 사람을 보면 무시하기 쉽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는 것과 무시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무시하는 마음으로 본다. 영적 문제자, 정신 문제자, 육신 문제자(장애자), 생활 문제자라면 더욱 그렇게 보게 된다, 그 사람 속의 그리스도를 보는 게 아니라 육신을 따라 본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자신이 과거에는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한다고 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다. 목수의 아들이고, 학벌 없고 가난한 자, 유대교 전통을 무너뜨리는 자, 신성 모독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에 올리우신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요 하나님의 본체와 동등 된 분으로 알게 되었다. 이 눈이 열리다 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이신 것을 알았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그를 모시고 있는 모든 신자는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신자는 아무리 질그릇이라도 보배를 가진 자다(고후 4:7).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다. 우리의 기능을 최고의 것으로 회복시키실 수도 있고, 없는 것을 더해 주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잊고 살 때가 많다. 어떤 신자라도 그의 외모, 소유, 재능, 능력, 인격 같은 것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들어와 와 계신 존재이다. 사탄도 귀신도 이걸 안다. 정작 본인이 잘 모른다. 이걸 모르고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 간에 서로 육신을 따라 판단했다. 파당을 만들어 서로 잘났냐, 싸움을 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이 오늘 메시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육신을 따라 알지 말아야 할 둘째 이유는 신자는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였다. 새로운 차원으로 재창조 되었다는 말이다. 죽은 영이 살아난 것을 말한다. 마귀의 소유가 되어 죄, 저주, 지옥 운명이었는데 이제 주님의 소유로 의, 축복, 천국의 운명으로 바뀐 것이다.
요즈음 북한 고위층 외교관들이 탈북 러쉬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왜 북한 고위층 외교관들이 탈북하는 걸까? 탈북 동기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다. 숙청에 대한 두려움,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죽음을 각오하고 탈북하는 것이다. 북한 탈북 상황과 우리의 구원을 대조하면 유사점이 많다. 하나님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롬 8:15의 말씀을 보면 신자도 과거에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잡혀 있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양자의 영을 받아 창조주의 배경과 보장과 사랑과 인도하심을 누릴 수 있는 아들이 되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인해 소속 신분 운명이 완전히 통째로 바뀐 것이다. 사탄, 죄, 저주, 지옥 운명에서 이제는 성령, 죄를 이김, 축복, 천국 운명을 바뀌었다. 남아있는 체질도 역전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 들어와 계시다. 여러분이 할 일은 여러분 속에 계신 분을 확인해야 한다. 영계와 만유와 만사를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분이 여러분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신 것이다. 육신의 본성에 입각한 생각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영이 죽은 사람은 절대 영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성령님은 말씀이 생각나고 가르침 받고 깨닫도록 하는 일을 하신다. 이게 되면 나도 영의 눈으로 보고 남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
우리는 신자를 육신을 따라 볼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한 신자라도 보배를 모시고 있다. 보배가 그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연약한 신자에게라도 영적 사실과 그리스도에게 대한 믿음을 계속 말해 주어야 한다. 자꾸 믿음을 독려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셨다. 우리도 신자를 볼 때 이런 사역자의 마인드와 관점을 가져야 한다.
신자는 17절의 결과 18,19절에 해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보배 되신 그리스도를 누릴뿐만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까지 부탁받은 자 되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불신자 운명 가운데 있는 자의 소속과 신분과 운명을 바꾸는 일에 쓰임 받는다. 불신자를 육신대로만 보고 있다면 나를 보는 눈도 그만큼 안 열렸다는 말이 된다.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자유를 누리면 한결같은 소원이 뭔가? 가족을 데려오고 싶은 것이다. 북한 동포가 속히 저 감옥 같은 곳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들이 철저히 속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우리도 불신자 때 철저히 속았다. 영이 죽은 사람은 사탄이 인본주의 합리적인 생각에 가두고 3,6,11장의 본성에 지배받게 만들었다. 이것을 알 때 사역자의 마인드와 관점을 갖게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과 화목케 하는 말씀을 주셨다.
2018년 그 당시 한주에 2~3번 현장 나갔다. 기독 병원 주차장에서 한 기도가 생각난다. 그때 지금까지 나의 전도해온 삶을 회고하였다. 전도는 많이 했지만 재생산이 안되었다. 나 같은 전도하는 제자가 재생산이 안 되면 교회 문 닫게 된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집중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주객과 체질을 180도 바꾸고 믿음과 의탁과 순종의 체질로 바꾸는 일을 지난 6년 동안 하게 하셨다. 항상 일이나 사역할 때 긴장이나 불안이 들어왔던 제가 내 일이 주님의 일인 줄 알고 맡기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일이나 사역 앞에서 본능적으로 내가 어떻게 할까가 하는 생각으로 빠지지 않는다. 내 속에서 주님이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의탁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게 저로서는 엄청난 변화였다. 내 동기로 안 들어간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이해력으로 받을 수는 있지만 그건 실제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경험으로 알아져야 한다.
2. 여러분은 주체와 동기와 방법과 렌즈를 계속 바꿔야 한다.
인본주의 내가 주인이었고 인본주의 동기와 인본주의 방법으로 되게 하려고 하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있구나. 이것이 깨달아져야 한다. 인본주의 동기가 만족 안 되면 자기 욕구 불만이 일어난다. 그래서 기뻐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내 동기를 위해 살지 않게 되면 일이 안 돼도, 주님은 모든 능력을 갖고, 반드시 하나님 소원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다. 성령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다.
1) 주의 일은 창 3,6,11장의 본성의 내가 애써서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주객과 체질을 바꾸어야지 한다고 해서 바뀌어 지지 않는다.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실제 눈울 열어주셔서 자신이 보여야 한다. 창 3장의 렌즈를 끼게 되면 자기는 안 보고 주로 남의 문제만 말하게 된다.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 비판하고 판단한다. 자신이 끼고 있는 렌즈를 인식 못하고 자기 동기와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의로 살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가 죽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창 6장의 렌즈를 끼게 되면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알게 된다. 영적으로 못 보고 육신을 따라 보게 된다. 창 11장의 렌즈를 끼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 기준으로 사람의 성공 여부를 평가한다. 바울 사도는 집 한 채도 없었다. 금은 보석도 없었다. 딤후 4장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고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주님은 심판날에 여러분의 재산, 학벌, 성공해서 얻은 것들 보지 않으신다. 성공해서 얻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주를 위해 살았느냐를 보신다. 어떻게 청지기로 살았느냐 그걸 보신다. 우리는 세상 기준에서 어떤 업적과 보여줄 것이 없으면 막 속상해 한다. 지금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마음 것 쓰실 수 있는 통로가 되었느냐를 기준 삼지 않는다.
3,6,11장의 렌즈를 끼게 되면 대인 관계에서 주로 저 사람 때문에 걸렸다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걸린 것이다. 자기 동기에 안 맞아서 걸린 것이다. 주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자기에게 걸리는 사람이 아니고 사역자의 마인드와 관점을 가져야 한다. 주님이 보시는 것 같이 현장도 보고 성도도 봐야 한다. 이런 면에서 계속 주체와 동기와 방법과 렌즈를 바꿔야 한다.
2) 사역자(전도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영적으로 보며, 사탄이 나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또 다른 사람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지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래야 자기에게 걸리지 않고 상대에게 답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상대가 복음을 안 받아도 내게 걸리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사역자라고 하면서도 대부분 자기에게 걸린다. 우리는 계속 중보 기도 할 수 있다. 이번에 우리 교단에서 나간 사람이나 류 목사님이나 교단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락할 수 있는 소양을 갖고 있다. 항상 깨어서 사탄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
3) 마 9:35~39 주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세상에 전도하러 오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하나님 떠난 영적 문제에 빠져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현장을 보신 것이다. 시급히 필요한 것이 추수할 일꾼인 것을 말씀하셨다. 18~19절에 화목케 하는 직분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맡겨 주셨다고 하였다. 여기에 아멘하는 시림이 추수할 일꾼이다. 20절 이하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다. 이것이 여러분의 정체성이다. 지금은 은혜 베풀 때요, 구원의 날이다.
결론
이번 리더 수련회 메시지를 살펴보았더니 24시를 강조하셨다. 우리 강단과 흐름이 똑같다. 저는 여러분이 실제적으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안 되고 있는 내면의 것들을 계속 말씀드리고 있다. 영적 사실과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주님은 여러분의 체질까지 뒤집기 원하신다. 주님이 마음것 쓰실 수 있는 통로 삼기 원하신다. 사역자의 마인드와 관점을 가져라. 그러면 진정한 파수 망대, 플랫폼, 안테나로 쓰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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