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대를 향한 신앙생활(빌 3:1~14)
여러분은 매주 심령에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드는가? 내가 복음 알았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가? 그래서 나는 하나님 소원을 위해 살아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가? 이런 것들은 주님께 집중이 되는 사람이 누릴 축복이다. 이번 집중훈련이 여러분의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살려면 그 소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빌 2:13절에,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로 자기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 되어서 내 소원도 올라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이게 하나님 소원이다. 이걸 위해 그들을 출애굽 시켰고 광야 40년 훈련도 시키신 것이다.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시킨 것이었다. 그래야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 통치를 실현시키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다. 단지 땅을 차지하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제사장 나라로 세워 영적 문제에 빠져있는 전 세계를 건지시려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적이 실패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삶이 평안해지고 부요해지자, 그들은 근방 육신의 체질에 빠졌다. 가나안 사람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신과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버렸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커녕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추방되었다. 언약적 축복이 아닌 그토록 경고한 언약적 저주를 받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것이다. 이게 여러분이 아는 바 이스라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진정한 하나님 백성을 회복하고 이땅으로 부터 우주적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가 지금 비밀스럽게 이 세상 나라 속에 임하는 것이다. 누룩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개개인에게 성령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신자는 불신 세상에 살지만 이중 국적자라고 했다. 그는 이 불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고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사명이다. 이스라엘은 국가적 사명을 받았지만 우리는 개인적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제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하나님 소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아주 버린 것이냐?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돌아올 기회가 아직 남이 있다고 되어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소원을 위해서 살며,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걸 위해 집중 훈련하는 여러분 되기 바란다. 오늘 제목이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이다.
1.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은 첫 번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이 돼야 한다.
그 방법은 내 안에 성령으로 통치 인도 역사하시는 삶을 매 순간 맛보는 것이다. 주님이 보좌 통치만 하시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 성령으로 통치 인도 역사하신다. 나의 불가능을 아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이 나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서 성령으로 살아 주신다. 블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서 주의 성령님이 내 삶의 주체가 되시고 책임자가 되시고 언약 성취자가 되어 주신다. 이걸 믿고 의탁하고 순종하는 체질이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모든 진리와 생명과 지혜와 의와 사랑과 능력과 치유와 권능의 근원으로서 여러분이 하나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러니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종교인이나, 율법주의자들은 주 안에 있지 않다. 삼 단체도 주 안에 있지 않다.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성실과 근면과 착하며 정의를 주장해도 그 운명이 요 8:44 소속이다. 인간은 영적 존재기 때문에 어떻든 영적 지배를 받는다. 영적 상태가 진공 상태는 없다. 성령의 통치를 못 받는다면 악령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성적인 사람도 그렇다. 중요한 판단과 결정에 역사할 수 있다. 얼마든지 감정과 마음에 역사할 수 있다. 이게 실제 영적 사실이다. 여러분은 주 안에서 왜 기뻐해야 하는지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환경이나 내 몸의 컨디션에 따라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언약을 이루시는 주의 성령님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삶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의 삶의 작동원리가 주 안에서 항상 성령님의 통치 인도를 받은 것이다. 이게 가능하도록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주인이 되시고, 책임자가 되시고, 언약 성취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3절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2절은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들이 개들이고 행악자요 몸을 상해하는 할례를 하는 자들인 것이다. 여러분은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가 되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과거 불신자 때는 육체를 신뢰한 자들이었다. 영이 죽었기에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과 선민의 표식으로 할례를 자랑했다. 혈통과 할례라는 육체적 조건을 자랑하고 신뢰한 거다. 우리도 불신자라면 자신의 가문, 학벌, 가진 것, 가진 자리 이런 걸 자랑하고 신뢰할 거다. 이런 걸 신뢰하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오히려 해가 된다. 이것은 주님이 쓰실 도구만 되어야 한다.
2. 두 번째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은 버린 것과 얻은 것을 확실히 아는 삶이 돼야 한다.
1) 버린 것
바울은 4~6절에 보면 자기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 7가지 조건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7절,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했다. 8절에는 오히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이라고 한다. 단순히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성령으로 알고 성령의 체험에서 나오는 지식이다. 그리스도 말고는 사탄의 운명과 그 영적 문제에서 빠져나오고 치유 회복되어 사명까지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없다. 그는 실제 사탄에게 잡혀있었던 자기 운명을 안 것이다. 자신이 어떤 영적 문제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그 어떤 의지의 대상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와 양립할 만한 다른 것이 있는 한 그만큼 그리스도는 약화 된다. 돈을 벌고 일이 잘되고 건강도 필요하다. 이걸 의지이 대상이 되지 말고 전부 그리스도의 수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수단이 의지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 바울에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다였다. 여러분도 이런 결론이 나야 한다.
2) 얻은 것
그러면 얻은 것은 무엇인가? 8절 하~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다. 그는 율법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의라고 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 사실에 모든 축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의롭게 되므로 신분과 권세를 다 보장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 삶은 날마다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버린 것과 얻은 것을 확실히 느끼는 삶이 된다. 요 15장의 삶이 되는 것이다.
3. 세 번째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은 최종 종착점을 향해 경주하는 삶이 돼야 한다.
1) 바울은 최종 종착점을 알았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고자 했다.
10~11절에 보면 그리스도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여 그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 이것이 그의 살아있는 동안 최종 목표였다. 그는 이미 1:23, 2:17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했다.
2) 푯대를 향한 그의 여정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했다. 신자의 구원의 여정은 이미 와 아직 사이에 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요 1:12, 엡 2:1), 하늘 시민권도 (빌 3:20) 이미 얻었다. 그러나 아직 몸의 부활까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빌 1:6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했다. 아직 이루어야 할 부분이 남아있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 잡혔다. 그리스도에게 잡혀서 선교 여행을 했고 지금 로마에까지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했다. 그의 최종 종착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다. 세상에서 목표했던 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람은 그걸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골인 지점으로 살았고 그의 살아서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얻는 의의 면류관을 사모했다(딤후 4:7~8). 바울이 쓴 서신이 성경의 텍스트가 되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모델 삼기 위해서 주의 죽음까지 본받도록 하는 소원을 주셨다고 여겨진다.
결론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영의 생각이 약해질 수 있다. 노년이 될수록 후회가 많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어떤 과거도 발판 삼게 하고, 현재 문제를 기회 삼고, 위에서부터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살게 한다. 여러분의 여정을 확인하기 바란다. 이번 집중훈련에 더욱 주의 은혜에 잡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오늘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 세 가지(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버린 것과 얻은 것을 확실히 하고, 최종 종착점을 향해 경주하라는 것)를 붙잡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 집중훈련의 자기 목표를 세워라. 자신의 전도 규례를 세워라. 시간, 장소, 방법을 정해라. 오늘 2인 1조 팀 구성을 하도록 하길 바란다. 이게 망대가 세워져서 여정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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