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엡 1:11~14)
오늘 부활 주일에 소명 찬양을 지금 했어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이 삶을 살도록 창세 전에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이 소명 가사처럼 여러분에게 이제 하나님의 소원을 알게 하셨고 현장을 영적으로 볼 수 있게도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이 현장을 영적으로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은 현장 전도 시간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도구로, 일꾼으로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복음으로 자기 문제가 극복되고 현장에 관심 갖게 되는 겁니다. 개인 전도와 또 다락방 다락방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런 계획 속에 여러분과 제가 있게 하시는 거예요. 지난주 수요 예배 때 얘기했지만, 대학 순회팀이 위덕대 들어가는데 김선영 집사님, 남인애 집사님 또 집사람과 저의 장모님도 같이 참여하고 계셔요. 위덕대는 불교 재단이잖아요. 전도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우니까 연등 다 달아놨거든요. 우리가 가서 전도하니까 안 좋아하죠. 행정실에서 비상이 걸렸어요. 근데 김성룡 목사님이 두 번이나 제지받았거든요. 김성룡 목사님이 많이 부담이 오죠. 그런데 지난주에 김 목사님이 1학년 새내기를 만났는데 그 여학생이 집이 안강이에요. 교회는 다녀본 적이 없는 여학생이고 복음을 전하는데 잘 듣더래요. 잘 듣고 나서, 여기서 영접 안 해도 된다. 집에 가서 해도 된다고 했는데 지금 영접하겠다 해서 영접했다고 합니다. 김성룡 목사님이 영접시킨 다음에 물었데요. 영접하니까 마음이 어떠냐? 그랬더니 마음이 시원하다 그러더래요. 그 여학생이 진짜 영접된 것 같아요. 우리가 다 끝나고 식사 하면서 포럼 하면서 박수를 같이 쳐줬어요.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저와 여러분을 쓰고자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으로 에베소서 말씀을 좀 보시면 좋겠어요. 에베소서 이 말씀 안에는 전도 메시지, 양육 메시지가 들어 있어요. 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여러분이 전도 메시지, 양육 메시지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에베소 지역은 유대인 회당이 있었지만, 불신 이교도들이 대다수였어요. 에베소에서 무슨 신을 섬겼다고 사도행전에 나오죠? 행 19장에 아데미 신전이 나와요. 아데미 신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우상을 만드는 직종에 있었던 사람들이 복음이 막 강력하게 전파되니까 데모를 일으켜서 바울이 쫓겨났잖아요. 그런 지역이 에베소 지역이에요. 그런데 이 에베소 지의 이교도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서 이제 한 권속이 되고 한 교회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교회의 일원이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내용이 에베소서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여러분이 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영접자에게 어디서부터 구원받았고, 어떻게 구원받았고 또 구원받은 자는 어떤 축복이 있는지를 바로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예정
지난주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었고 오늘 제목이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이에요. 지금 1장은 계속 그런 내용을 얘기하는 거거든요.
1) 1장 11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그랬어요.
그의 뜻의 결정대로 모든 일을 하신대요. 누가요? 하나님이요.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의 주권이죠. 우리는 이 절대 주권의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예정을 입어서 그의 기업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영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찾아오셔서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통치하셔서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염원입니다. 보통 성도가 천국을 가리켜서 ‘우리의 기업이다’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도 하나님의 소중한 기업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천국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치유 회복하시려는 노력이 더 크십니다. 여러분이 이 천국에 합당한 자로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바라시는 거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12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자로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뜻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은 여러분이 정말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여러분을 향해서 염원했다 이 말이에요. 물론 여러분이 이 구원받은 것은 결과적으로 알게 되는 거죠. 미리 사전에 아는 사람 없잖아요. 여러분이 결과적으로 구원받은 다음에 뒤를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역사하셨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이 어디서부터 구원받았고, 어떻게 구원받았고, 구원받은 자의 축복을 바로 알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사실 거의 가문이 우상숭배 가문이었고 또 여러분이 영이 죽은 인본주의 인생을 살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성의 능력으로 믿어낸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저는 전도하러 나가기 전에 그런 기도를 해요. 하나님 오늘도 연출하여 주세요. 만남을 연출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말 출생 때부터 그 인생의 사건, 문제, 배경, 모든 상황을 개입, 간섭, 주관 통치하시고 그래서 구원받도록 이끄시는 사람을 만나도록 연출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다고요.
2) 13~14절에는 우리가 복음을 받게 된 구체적인 경위를 밝히고 있습니다.
13~14절을 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보면 우리가 복음을 받게 된 구체적인 경위를 밝히고 있는 거예요.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의 경위를 순서대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이 먼저예요. 두 번째는 때가 찬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이 정확한 계획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속량해 주신 거예요. 우리가 알기도 전에 우리의 죄까지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두 번째가 때가 찬 경륜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속량해 주신 거예요. 세 번째는 여러분이 그 진리의 복음을 듣고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거예요. 이게 순서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문을 여신 겁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면 루디아 얘기 나오잖아요.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48절도 여러분 아시죠?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은 다 믿더라.”여기 보면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라고 돼 있잖아요. 성령께서 그 작정 된 자에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전도는 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거예요. 전도는 삼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구원받은 경위를 바로 알아야 하는 거죠. 여러분이 구원받은 그 경위를 알고 계속 기도를 하세요. 주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해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나를 향한 계획과 목표와 목적이 있음을 고백하세요. 여러분이 이 구원받은 경위를 바르게 안다면 여러분이 믿음의 전도할 수 있는 거예요. 믿음의 전도라는 말은 내가 하는 전도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전도할 때 내가 하는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께서 모든 영감과 감동과 계시와 충만과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걸 믿으셔야 해요. 전도 나갈 때 성령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할 때 부담이나 힘은 다 빼야 해요. 상대가 안 받아들일 때 많죠? 그럴 때도 눌리거나 낙심할 게 아니에요. 그게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문제예요. 그 사람 이 복음을 안 받았다. 내가 믿음이 적으니까 안 믿나 보다. 이 생각으로 들어가는 건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여러분 상대가 안 받아들일 때도 눌리거나 낙심할 게 아니라 오히려 상대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거예요. 그게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이에요. 그들이 지금 묶여 있잖아요. 듣는 귀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불쌍히 여기는 게 성령님이 전도자에게 갖게 하는 마음이에요. 내가 눌리거나 내 자신을 타박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은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을 계속 믿고 의탁하고 순종하는 것이 최고 잘하는 거예요. 이 일이 주님의 일이니까 여러분은 영적으로 눌려서 믿음을 놓치지 말고 “이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일이 오니, 주님을 믿고 의탁하고 순종합니다.”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밖에 없어요.
13절에 이제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렇게 돼 있죠. 인치시는 건 뭐죠? 도장 찍는 거예요. 우리가 성령으로 그리스도가 믿어져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신 게 되는 거거든요. 그때 인치심을 받는 거예요. 도장이 딱 찍히는 거예요. 이것은 영원한 도장입니다. 그래서 인치심에 대해 14절에 이렇게 또 설명해요. 14절 “그 안에서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러니까 성령님이 인 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에 보증 곧 보증 수표가 된다는 이 말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지금 모시고 계십니까? 천국 상속의 보증 수표를 갖고 있는 거예요. 도장이 찍혀있는 거예요. 그 얻으신 것은 여러분과 저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속량하시고 목적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거예요.
바울은 지금 누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에베소 성도들한테 이 편지를 쓰죠. 율법에 의거하면 이교도들은 상종도 안 했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가장 혐오하는 게 뭐예요? 우상숭배잖아요. 그러니까 우상숭배를 열나게 했던 이 이교도들인 에베소 교인들에게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말이에요. 이들이 주님께 돌아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지를 지금 분명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의 경위를 1장에서 설명한 거예요. 여러분도 언제 구원받았고,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이 확신이 있어야 해요. 언제 구원받았는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모태 신앙 같은 경우 그렇지만 언제부터 내가 확실히 믿어졌다는 것은 기억할 수 있어야 해요.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늘 확신 갖고 있어야 해요.
저는 대학교 1학년 때예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 다녔지만, 고2 때 하나님의 소명이 있어서 부르시면 목사 되기로 손을 들었고, 신학교까지 간 다음에 하나님은 저의 내면에 깊은 갈등을 주셨어요. 확신의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니가 하나님 복음을 전하고 천국 지옥을 말할 만큼 진짜 확실하냐?” 이거예요. 그 확신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비로소 처음으로 혼자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진짜 독대를 한 거예요.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만나달라는 거죠. 깊게 나를 확신이 차도록 만나달라는 그런 시간을 가졌어요. 그때가 1980년도 광주 사태 났던 그 해예요. 그때 저는 분명히 느꼈어요. 주님이 성령으로 제게 찾아오신 경험을 했습니다.
2.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구원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다고요? 하나님! 내가 이성으로 믿을 수 있으면 내가 믿어내는 거죠. 근데 이게 안 그렇잖아요. 사회 일은 내가 처리해 낼 수 있어요. 근데 이 구원의 역사는 그렇지 않아요. 렘넌트들이 듣고 있어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이게 정말 확 믿어지고 기도가 확 뚫리지 않아요. 이런 고민을 렘넌트들이 할 수 있어요. “선생님, 솔직히 내 속으로는 안 믿어져요”라고 몇 주 전에도 고백한 친구가 있거든요. 그런 렘넌트들은 목사님처럼 일단 갈급해져요. 목마름이 있게 돼요. 하나님이 내 안에 확실히 들어오신 것과 들어오시지 않고 그냥 사는 거랑 엄청 차이가 나는 거예요.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1)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데 그렇다면 창세기 3장 사건의 사단의 유혹은 하나님의 계획과 허락하심 속에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의 계획과 허락 속에 있지 않은 사건은 세상에 없죠.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죠. 전쟁도 누구에게 속했어요?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께 속했잖아요. 저와 여러분이 언제 죽을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알고 계셔요. 그렇다면 창세기 3장 사건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분명히 인간은 책임적 존재고요.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책임을 반드시 묻습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의 마음을 알려 함이라 이런 말씀도 있고요. 하나님께 그 마음에 합하도다 이런 표현도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셔서 우리에게 책임성과 자유 의지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거예요. 아담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 하셨고 인간의 절대 책임성과 또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신 거예요. 그런 아담에게 진짜 하나님의 공의가 뭔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뭔지를 알려주고자 하신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이 사단의 유혹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도 알고, 죄에 대한 무서움도 알도록 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막 바로 창세기 3장 15절 복음의 언약을 주신 겁니다.
2) 이 구원의 주권에 대해서 로마서 9장에 보면 아주 자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9절부터 24절까지를 읽겠습니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부르신 자들이 뭐라고요? 긍휼의 그릇이다! 이 말이에요. 여기 이 내용은 뭐냐 하면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에요.
하나님이 지금 구원의 주권에 대해 얘기하시니까, 19절에 반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 허물하십니까? 안 택해 안 믿는다면 그거는 하나님이 허물하실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지금 논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고 뭐 우리가 대적이나 하겠습니까? 이런 말이에요. 근데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지은 받은 물건이 지은이에게 왜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서 이제 토기장이 비유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 수도 있고 또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목적은? 22절에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죄 지었다고 단번에 심판하지 아니하고 회개하기를 오랫동안 기다린다 이 말이에요. 그다음에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그 구원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오 이런 말씀이에요.
3) 그런데 문제는 창세 전에 예정했다는 말이 걸린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 전이면 창세기 3장 사건 이전이잖아요. 여기에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은 단방에 걸려버려요. 이렇듯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 자유 의지 조화의 문제는 신학적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것을 답할 수가 없어요. 난제인데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이성은 합리적인 사고만 할 수 있는 틀이 딱 있잖아요. 이 합리성을 뛰어넘어버리면 모르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이건 우리의 이성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오는 문제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 다 담아낼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마치 바다에 물이 한가득 있잖아요. 근데 해변에서 물웅덩이를 파요. 거기다 바닷물을 다 담아 넣으려고 그래요. 담아 넣을 수 있어요? 바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에 비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의 한계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여기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하냐 하면 100% 하나님 주권, 100% 인간 책임 이 두 가지를 동시적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조화는 어렵지만, 이 두 가지를 그대로 믿음으로 받는 게 제일 좋아요.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의 공의가 뭔지, 죄에 대한 심판이 뭔지 그리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뭔지를 저와 여러분이 바로 알도록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거예요. 진노의 그릇으로 삼지 않고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하려 하심인 거예요. 신명기 29장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옛날 개혁 한글에는 감추어진 일을 오묘한 일이라고 번역했어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한 일, 곧 오묘한 일이 감춰진 일이에요.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의 영역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의 택함에 관한 말씀을 다 얘기한 다음에 마지막에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고 세상 끝에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리고 나서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합니다. 이 오묘한,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부분이고 신성에 속한 부분이에요. 이것은 여호와께 속한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도 몰라요. 나타난 일은 뭐예요? 하나님이 계시한 부분이에요. 복음도 나타냈어요. 율법도 나타내셨어요. 나타낸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우리가 지켜야 할 일이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몰라도 너희에게 나타내신 이 율법을 바르게 지키라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이 복음을 너희가 진짜 받고 믿고 그 복음대로 합당하게 살아라 이 말이에요.
결론
오늘 제목이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입니다. 지금 모든 사람이 원죄 가운데 있어요. 그거는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롬 9:29에 이런 말씀을 해요.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사실 하나님이 씨를 남기는 일을 역사 속에서 계속했어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택하셨기에 아브라함이 씨예요. 거룩한 씨예요. 이삭이 거룩한 씨란 말이에요. 약속의 자녀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씨를 남기신 역사가 지금까지 연결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그걸 안 남겼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소돔과 고모로와 같았을 것이고 세상은 이미 심판받고 끝난 일이 되었을 거에요. 제대로 심판하셨다면 세상은 골백번도 더 심판받아야 해요. 근데 하나님이 지금 심판을 작정해 놓고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신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 불신자 상태와 같은 거예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줬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그 내용 하고 같은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을 진노의 그릇으로 하나님이 삼지 않고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셨다는 얘기입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여러분을 구원하셨다 이 말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구원받은 자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 공의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해요. 지금 하나님 떠나서 막가파로 살고 있잖아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습니까? 맞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아무리 잘 살고 육신적으로 잘 되고 자기 영광 돌리고 있더라도 우리는요. 영적인 눈으로 보면서 공의로 현장을 보셔야 한다고요. 그러면서 또 어떤 눈으로 봐야 하나요? 아가페 사랑의 눈으로 봐야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현장을 보시면서, 무리를 보면서 불쌍히 여긴 것처럼 우리가 그런 성령이 주시는 그 눈으로 보라는 겁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하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보면서 여러분은 자신은 의를 행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해요. 찔러대는 사람 되라는 게 아니고 찔러대는 거는 우리에게 지금 명하고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에 원수 갚지 말라고 돼 있잖아요. 우리 보고 심판하라고 돼 있지 않아요. 세상은 심판하에 이미 놓여 있는데, 지금 구원의 때다 이 말이에요. 심판하고자 하는 건 우리의 죄의 본성이에요. 죄 본성을 가지고 자기 기준으로 사람 비판하고 찍어내고 그러거든요. 그렇게 하지 말고 여러분에게 이 아가페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반응하라 이 말이에요. 각각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니까요. 지금 여러분이 현장을 공의의 눈과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게 전도자의 눈이에요.
(간증 소개)
어떤 아들이 있었는데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갔어요. 그 아들이 감옥에 가서 부조리를 봤어요. 교도관이 아주 불공정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 화가 치밀어서 그를 계속 미워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감옥에서 계속 사고를 치는 거예요. 사고를 치니까 독방에 가둬요. 독방에 여러 번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아들에게는 어머니가 한 분 계셔요. 늙으신 어머니가 이 아들을 잊지 못해서 늘 면회를 오는 거예요. 근데 사고를 자주 치니까 면회 갔을 때 독방에 있으면 면회가 안 돼요. 면회를 안 시켜줘요. 근데 이 어머니는 나이만 많을 뿐만 아니라 또 심장병을 갖고 있었어요. 심장이 늘 안 좋아요. 어느 날, 면회 갔는데 그때도 아들이 사고 쳐서 독방에 있는 신세이기에 면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어머니는, 자기가 이제 돌아가면 다시 못 올 것 같은 마음이라. 그래서 사정 사정을 하면서 어머니 하는 말이 이번에 못 보면 내가 죽을 수 있으니까 면회시켜 달라 그렇지 않으면 나 안 간다. 여기서 죽겠다 하고 버틴 거예요. 어머니가 그러니까 소장이 할 수 없어, 10분 면회를 시켜준 거예요. 아들을 만나서 어머니도 울고 아들도 울고 면회 시간 10분 동안 둘 다 울다가 말아버렸어요. 그리고 돌아가셨어요. 모친은 항상 이 아들 때문에 가슴이 아파했고, 아들도 그 엄마의 사랑을 잊지 못했어요. 어느 날 교도소 소장이 바뀌었네요. 새로 들어온 소장이 제안을 하나 했어요. 무슨 제안이냐 하면 한자 공부를 좀 해라. 제소자한테 한자 시험을 봐서 100점을 세 번 받으면 특별 면회를 시켜주겠다고 했어요. 밖에 내보내는 거 아니고 정원이 넓단 말이에요. 정원에 나가서 마음껏 고기도 구워 먹고 마음껏 하루 그렇게 면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다. 이렇게 제안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이 아들이 솔깃해서 들은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공부 안 하던 사람이 그 면회 받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래서 세 번 100점을 맞았어요. 한자 시험 3번을 100점을 맞아서 특별 면회가 주어졌어요. 드디어 면회 날이 왔는데 미리 집에 다 알렸죠. 어머니 오시라고. 근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어머니가 안 오시네요. 끝내 안 오셨어요. 어머니가 오시다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 그 아들이 그 소식을 나중에 가르쳐줘서 나중에 알았어요. 왜냐하면 뭔 짓 할까 싶어서 안 가르쳐준 거에요. 근데 듣고 나서는 이제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는 거야. 평생 어머니에게 못한 죄, 자기가 인간답지 못하게 산 죄, 그걸 생각하면서 이 사람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때 누가 독방에다가 이 복음 메시지를 넣어준 거예요. 복음 소식을 넣어준 거예요. 이 아들이 그걸 보다가 성령님이 역사하신 거예요. 그걸 보다가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그 말씀이 콱 꽂힌 거예요. 자기가 죄인이잖아요. 이 사람이 진짜 그게 가슴에 꽂히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거예요. 자기 혼자. 그 후에 이 아들은 성경을 계속 읽었대요. 그 감옥에서 성경을 계속 읽으니까 이 사람이 계속 변화가 되는 거야. 빨리 변화가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모범수가 되고 출소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나와서 딴 데 안 가고 막바로 신학교 입학을 해서 목사가 됐어요. 그래서 이 사람은 교도소 선교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어요.
지금 이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죽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거든요. 여러분도 이런 구원을 받은 거예요. 이 사랑의 증인으로 서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통로로 쓰일 자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문제의 원인과 또 초래된 결과와 그 해결책에 대한 답을 주는 자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세우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나의 현장, 나의 전도 시간, 나의 방법을 정하라 이 말이에요. 그게 있음으로 말미암아 늘 자기가 점검되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성령 인도받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 목표가 없으면 여러분 현실 안주하기 쉽습니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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