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제자의 인간관계(골 3:17~4:1)
계속 나오는 메시지인데 한 사람에게 답을 주어서 그 사람이 사단 죄 저주 지옥 운명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입니다. 그 사람을 빠져나오게 해서 그 사람을 복음에 뿌리를 내려서 확립되게 해서 열매 맺고 승리하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전도 제자가 돼서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세울 수 있는 제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제자로 확립되고 세워지는 게 중요한 거죠. 그게 되면 교회는 계속적으로 생명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 안 하셔도 돼요. 그 부분을 이제 점검하기 바라고 이게 오래 믿고 내가 많이 알고 익숙해지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실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지는 삶, 그리스도의 능력을 실제 누리는 삶, 진짜 답 줄 수 있는 그런 제자로 내 한 사람이 똑바로 세워지면 됩니다.
오늘 제목이 전도 제자의 인간관계입니다. 지난주가 추수 감사절인데 생수에 강이 흘러나오리라 그런 말씀을 받았는데 오늘은 전도 제자의 인간관계에 대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24시 함께하시고 주인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인간관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사실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안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주로 나에게 잡혀서 내 필요로 대하고 다른 사람한테 내가 어떻게 인정받느냐 이런 거에 주로 신경을 많이 썼잖아요. 사실은 나의 영적인 문제도 잘 몰랐고 상대방의 영적 문제도 잘 몰랐습니다.
한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어릴 때 가정 환경은 좋았어요. 가정 환경 때문에 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항상 그 내면이 허하고 눌리고 목마른 영적 상태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공부 집중도 안 되고 그래서 학생 때부터 나돌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안 좋은 길에 빠졌어요. 소위 불량 청소년들과 몰려다니면서 사고도 치고 못된 짓도 하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게 그 모친의 속을 썩이는 원인이 됐어요. 이 사람이 중고 졸업하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됐는데 그 어머니가 암에 걸렸어요. 아머니가 암에 걸리니까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요. 그제서야 이 사람이 정신이 나는 거예요. 내가 학생 때부터 줄곧 어머니 속을 썩이지 않았냐? 죄책감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제 좀 착실하게 살아야 되겠다. 그게 동기가 됐어요. 그런데 그 모친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돌아가시게 되니까 이미 습관화된, 체질화된 그 체질이 정리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또다시 과거의 삶으로 빠져버렸어요.
우리는 이런 문제를 종종 볼 수 있죠. 이런 문제를 보면서 이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살았나? 이해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진짜 원인이 뭐겠습니까? 창 3장의 영적 문제가 가문과 부모를 통해서 이 사람에게까지 온 거예요. 사단이 어릴 때부터 마음과 생각을 지배했고 그래서 허하고 눌리고 목말랐던 거예요. 외부 요인이 없다니까요. 그 가운데 사단이 밖으로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도록 이끌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사고 치고 모친 속 썩이는 일을 계속 한 거거든요. 근데 그 모친도 부처님을 열심히 믿고 살았던 사람이에요. 부처님을 열심히 믿으면서 남편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않았어요. 이 모친도 그 마음과 생각이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던 거에요. 그러다 자식의 문제로, 이 아들이 사고 치고 문제를 터뜨리니까 계속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 암이 생긴 거고 생긴 거고, 결국 사망하게 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현장을 영적으로 보면서 답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이에요. 이 부분이 여러분이 정말 얼마만큼 되느냐가 관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들었어도 우리 속에 있는 작동하는 체계가 오랫동안 영적으로 사람을 안 보고, 양심 기준이나 사회 윤리 기준으로 딱 보는 거예요. 우리가 평가할 때 왜 저런 짓을 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람들한테 피해 주는 거야. 그러면서 화가 일어나잖아요. 그런 사람 보면 우리는 사실 오랫동안 양심 기준이나 사회 윤리 기준으로 봤어요. 그걸 가지고 한편에서는 자기 의를 세우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가 체질 되고 형성되어 있는 부분이 세요. 이제 우리는 사람으로 볼 때 진짜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진짜 창 3장에 운명에 빠져 있는 인생으로 본다면 윤리 기준으로 보는 것은 틀렸어요. 그 사람을 창 3장에서 어떻게 건져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이게 전도 제자가 가질 자세고 마인드예요. 그리고 눈이 되어야 하는 거죠.
1. 인간은 영적 문제로 인해 다 나 중심에 빠져 있잖아요.
1) 나 중심이라는 것이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거는 윤리적인 사람이든 비윤리적인 사람이든 똑같아요. 모든 인생은 출발부터가 잘못됐어요. 출생 때부터 다 잘못됐어요.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인본주의 기준으로 살았고 인본주의 동기로, 인본주의 방법으로 살았어요. 정말 사단이 어떻게 속였냐 하면 영이 죽고 하나님 떠난 것은 전혀 인식 못 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인본주의 기준의 의를 딱 갖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회 윤리 교육이 필요해요. 이게 없으면 뭐 완전히 짐승 판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에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된다. 윤리적으로 살아야 된다. 바르게 살아야 된다.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의로워야 한다 그런 걸 강조하잖아요. 또 그거에 합당한 사람은 의인상도 주잖아요. 그런데 영적으로 딱 죽게 되니까 하나님은 모르면서, 모든 선악의 기준을 인본주의 기준으로 딱 세우는 거예요. 세상 기준의 의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속는 거에요. 여러분은 이제 세상 기준의 의로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봐야 한다니까요. 지금 사단에게 잡혀 있는 인생이라는 거예요. 근데 나는 안 잡혀 있었던 것처럼 자꾸 생각해요. 우리는 창 3, 6, 11장의 본성과 두 가지 기본 욕구로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우리도 똑같이 이익을 위해서 살고 돈 벌기 위해서 살고 거기에 1차적인 관심이 있었고 성공하는 데 1차적인 관심이 있었어요. 또 사람 의식하면서 인정받으려 하고, 그거 인정 못 받으면 상처받고 우울하고 그랬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면서 보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공부가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 받아요. 회사에서 일이 잘 안되면 스트레스 받아요.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또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하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풉니까? 보통 다 육신의 방법으로 풀어요. 그것밖에 할 게 없으니까, 뭐 명상하는 사람도 있겠죠. 근데 대부분 다 육신적으로 풀어요. 여행 가고 맛있는 거 먹고 재미있는 거 하고 이런 것들을 추구한단 말이에요. 더 감각적인 것을 찾아서 좀 더 짜릿한 게 없을까? 이런 것들을 우리도 똑같이 추구했어요.
이번에 중독에 대한 공부를 좀 해보니까 중독 문제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스트레스예요. 뭐 당연하겠죠. 중독에 빠질 만큼의 마음 상태, 영적 상태니까 당연히 스트레스가 많죠. 그런데 스트레스가 와도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되죠. 그런데 그 능력이 없으면서 한 군데 탁 꽂히게 되면 거기에 계속 빠지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다행히 그 능력이 있어서 안 빠진 거고 그 부분에 있어서 취약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뭔가에 딱 꽂히면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중독자들이 마약하는 이유를 이렇게 얘기를 한 대요. 마약을 하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편안해, 그 시간에는 불안이 없어. 이렇게 얘기한데요.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마약이 사람을 잡는 거죠. 약효가 떨어지면 더 심한 불안감이 온대요. 편안했다가 약효가 떨어지면 더 심한 불안감이 와요. 그리고 더 허망함이 와요. 굉장히 못 견딜 만큼 그게 당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안 하면 금단 현상이 막 와요. 못 견디니까 또 하게 되는 거거든요. 결국 담배도 마찬가지고 술도 마찬가지예요. 반복적으로 하는 게 중독인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람을 양심 도덕 윤리 기준으로 보는 거예요. 보통 그렇지 않나요? 가정을 두고 왜 저래? 너무 저 사람은 사회적인 책임이 없잖아. 혼자만 저러면 되지 왜 사람들 괴롭혀? 우리는 이제 사회 윤리 기준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게 도덕 윤리고 사회 윤리였어요. 그 기준으로 본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또 자기 의의 기준으로 봐요. 나는 그 사람들보다 옳게 살았다 이 말이에요. 나는 성실하게 살려고 애썼고 나름대로 공부 열심히 했고 나는 내 마음을 지키려고 애썼고 그 의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의를 가지고 비판하면서 그 의를 딱 요구하는 거예요. “너희들 그렇게 살아야 되잖아. 왜 그렇게 안 사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 중독에 빠진 사람이 양심 윤리가 부족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영적인 문제예요. 뿌리가 인간이 하나님 떠나서 허한 거예요. 하나님 떠나서 불안한 거예요. 하나님 떠나서 일반적인 삶에서 더 못한 삶으로 무너지는 거예요. 이런 것을 우리는 영적인 눈으로 봐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은 사단이 이 영적으로 보는 것만 딱 안 되게 만들고 세상 기준의 의를 딱 세워놓은 거예요. 인간 기준의 의를 딱 세워놓고 우리가 하나님 떠나서 우리가 영이 죽고 사단에게 잡힌 거는 몰라요. 그거는 우리 알 필요 없어. 그거 누가 믿어? 이게 세상이 하는 말이에요. 그거는 저 기독교 종교인들이 믿는 거고 니는 인간답게 살아야지 합니다. 우리도 도덕 윤리 기준으로 참 많이 체질화가 됐다 이 말이에요. 우리는 이제 영적으로 봐야 한다니까요. 그럴 때 그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럴 때 진정한 답을 줄 수 있어요.
영적 상태가 중요해요. 저도 상태가 안 좋으면 재미난 거에 빠져요. 제 영적 상태 안 좋으면 숏폼 보면 숏폼이 다 재미있어요. 숏폼이 뭔지 알죠? 유튜브에 나오는 짧은 동영상. 재미있어요. 그러면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연결되니까 또 봐요. 그러면 30분 확 가요. 저도 상태가 안 좋으면 그래요. 그리고 목사님이 음란한 거 보면 안 되죠. 근데 간혹 그런 게 또 영상에 나와요. 영적 상태가 좋으면 딱 안 봐요. 안 좋으면 이건 뭐지? 키스하고 막 난리를 쳐요. 그러면 뭐지? 하고 본다고요. 19금 영상 제한이 있으니까 심한 데까지는 안 나와요. 그런 영상이 또 계속 또 연결돼서 나와요. 그럼, 그다음 걸 또 봐요.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그렇게 보다가 다윗이 걸린 거 아니겠어요. 밧세바 보다가 딱 걸린 거 아니에요. 우리 모두 다 습관성이 있어요. 우리 다 마음이 허하거나 꿀꿀하면 뭐 재미있는 게 없는가 눈 요기 할 거 없는가? 이쪽으로 들어간다니까요. 중독에 빠진 사람은 자기 상태가 아주 안 좋은데 뭔가 순간 딱 꽂혀요. 사단이 딱 역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약 같은 경우는 한 번 하고 또는 몇 번 하고 상태에 따라 중독에 빠질 수 있어요. 마약이 딱 들어가면 보통 뇌에서 나오는 도파민 이런 게 있어요. 이게 백배, 천 배로 올라간대요. 그러니까 완전히 사람이 붕 뜨는 거예요. 태국 같은 경우에 얼마 전까지 대마초는 허용이 했거든요. 한국 사람들이 여행 가서 핀 거에요. 그리고 한국에 와서 그리운 겁니다. 지금은 태국이 워낙 그게 심해져서 다시 단속을 한 대요. 근데 예전에는 그걸 풀어놨어요. 태국에 간 겸 마약을 해보는 거예요. 저는 습관성이 있거든요. 얼마든지 상태가 안 좋거나, 딱 꽂히게 되면 저도 중독에 빠질 수 있고 저도 다윗이 범한 죄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이 됩니다.
2) 우리는 영적으로 보고 현장에 답 줄 수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기 문제를 사단과 상관없는 문제로 생각한다면 결코 못 빠져나옵니다. 진짜 사단이 인간을 유혹해서 현실 문제와 함께 그 마음과 생각을 지배한다는 거를 진짜 인정하셔야 돼요. 진짜 원수가 사단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면 이길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어떤 영적 문제라도요. 그게 체질화된 문제라도 여러분이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 맞다면 남아 있는 문제는 그리스도께 뿌리내리라는 문제일 뿐이에요. 여러분이 오직의 체질이 되라는 거예요. 여러분 현실 문제만 좀 해결됐다고 여러분이 괜찮으면 얼마든지 또 세상에 빠져요. 그래서 체질을 남겨놓은 거예요. 오직의 체질이 되라고, 그래서 완전히 답 내서 여러분이 여러분 같은 사람에게 답 주라고, 왜? 그리스도 아니면 안 되는지 그 답 주라고 여러분 문제를 남겨 두신 거에요. 그것까지 선용하시는 거예요.
영적 문제도 알고 그리스도 아는데도 맨날 그 속에 빠져 있는 상태는 아니죠. 거기에 이제 심각한 싸움이 일어나는 거죠. 사실 이 싸움은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에요. 우리가 이긴 싸움이라니까요. 그리스도 앞에 사단 귀신은 벌벌 떨어요. 절대 굴복하고 항복하고 쫓길 수밖에 없어요. 어디? 피조물 주제에 감히 창조를 이길 수 있나요? 그러니까 내가 사단 분명히 알고 사단을 미워하고 사단을 대적하면 사단은 져요. 저게 날 싫어하네. 그러면서 사단이 꺾여요. 사단이 전법이 재미있는 거, 호기심 있는 거, 자극적인 거 그런 걸 이용해서 걸고 들어오잖아요. 여러분 진짜 이제 영적인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께 뿌리내리면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 성장이 일어나요. 여러분이 기도문이 열려요. 만약에 기도문 안 열리면 하나님 자녀 아니에요. 구원받았고 예수 생명이 있으면 무조건 집중하게 되면 성령님이 빌 바를 알게 해 주셔요.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서 빌어줘요. 예수님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빌어주고 계셔요. 기도 발전해요. 그리고 기도 싸움에서 흑암이 딱 꺾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계속 기도 문이 더 열려요. 그러니까 진짜로 여러분이 다 승리할 수 있고. 여러분이 이런 과정을 깊게 거치면 거칠수록 또 하나님께 쓰임 받아요.
여러분 대부분 자기 의를 갖고 사람을 봐요. 저도 아내에 대해서 내 기준으로, 사모는 이 정도 돼야 한다는 그 기준으로 보는 거예요. 초창기 때 오랫동안 그렇게 봤어요. 근데 이제는 어떻게 봐요? 아내도 창 3장에 영적 문제 속에서 주님이 건져내서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이고, 나도 그렇다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진짜 창 3정에 빠졌고 모든 사람이 창 3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눈이 있어야 해요. 이 눈이 열려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빠져나오고 다른 사람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만남, 가정, 직장, 지역에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전도 제자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2. 오늘 본문에는 다섯 현장의 중요한 두 현장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어떤 현장입니까? 첫째가 가정 현장, 두 번째가 직장 현장입니다. 가정 현장은 부부관계와 자녀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어요.
1) 부부관계
부부관계도 영적으로 봐야 해요. 영적으로 안 보고 그냥 편한 대로 육신의 기준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요. 가장 영적으로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안 보면 말씀을 따를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리라” 그랬어요. 주 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성령님의 통치받는 상황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주 안에서예요. 성령의 통치받는 상황에서 남편에게 복종해라 이 말이에요. 엡 5장에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렇게 돼 있어요. 남편만 복종하라는 게 아니고 피차 복종하라고 했어요. 남편 조건이 훌륭해서가 아니고 아내가 너무 훌륭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피차 복종하라는 거예요. 복종은 무조건 굴복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서로 존중하고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라 이 말이에요. 존중하고 나 중심으로 행하지 말고 유익을 끼치는 자세로 행하라 이 말이에요.
불신자는 철저히 상대 조건만을 의식합니다. 그 사람이 뭘 잘해야지 나도 잘하는 거고, 못 하는데 내가 혼자 잘할 이유가 뭐 있냐? 이렇게 얘기를 해요. 맞잖아요. 불신자는 주 안에서가 안 되잖아요. 주 밖에서 내가 주인이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주인끼리 부닥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남편이 악하다고 따라서 같이 악하면 안 돼요. “니가 그러냐? 난 더 하겠다.” 이게 세상 논리잖아. 그러면 그냥 참으라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냥 참으면 또 병들어요.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통치에 순종하면 저 남편은 못 떼게 해도, 내 안에는 계속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해요. 하나님이 나의 모든 배경과 원천이 되어 주셔요.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특별히 영적 문제가 심한 사람이 딱 걸렸다, 신자도 아니고 영적 문제 심한 불신자를 만났다 그러면 정말 갈등 오잖아요. 참아도 한계가 있지, 너무 힘들다. 저 남편, 저 아내 때문에 너무 힘들다. 그게 우리 육신의 본성의 한계예요. 우리가 참고 애써서 잘하려고 그러면 한계 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걸 뒤집어서 얘기하자면 그 남편 때문에 진짜 가장 영적으로 눈이 열릴 수 있어요. 그 남편 때문에 내 수준이 아니고 내 능력이 아닌, 주님의 성령이 주시는 눈과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그걸 가질 수 있는 오히려 기회에요. 내가 생각할 때는 상대를 죽어도 사랑할 수 없어. 근데 성령님이 “내가 사랑한다” 이래 말씀해버리면, “나는 그를 애통히 여긴다.” 이러면 사랑하는 게 가능해요. 내 심령에 말씀이 건드려지면 서 심령이 움직이고 감동이 와버리면 그 사람에 대해서 답답한 게 쑥 내려가 버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주십시오. 권능을 주십시오. 이 기도 많이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사람을 주님이 보는 것처럼 보는 눈과 마음이에요. 예수님의 나사로 죽음의 현장에 가셔서 통분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잖아요. 원수의 세력, 죄의 세력, 죽음의 세력, 불신앙의 세력에 대해서는 통분히 여기셨어요. 근데 인간을 향해서는 불쌍히 여기셨어요. 그 남편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우리 안에 지금 생명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결국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관계에서 모든 인간관계를 하는 거예요. 누구 때문에 나는 내 인생 조졌다. 이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또 남편에 대해서 19절을 읽어볼까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 당시에 많이 괴롭혔나 봐요. 엡 5장에도 부부관계에 대해서 말씀이 있잖아요. 엡 5:28~29절 같이 읽어볼까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서 한 것처럼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하라는 이런 말씀이죠. 근데 제가 해보니까 이 말씀을 금방 까먹어요. 현실에서 이 말씀을 안 잡아요. 그래서 오늘 여기 계신 남편들은 저 말씀을 기억하고 시인하고 되새기고 잡아야 해요. 신형상 잡기를 바랍니다. 근데 아까 피차 복종하라고 했으니까, 윤주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부간에도 영적으로 봐야 한다니까요. 부부관계는 영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 중심으로 봐요.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늘 그거 물어요. 그렇죠? 나 중심으로 보고 나 중심으로 대해요. 우리는 피차 치유 받아야 할 대상으로 봐야 합니다. 장로님 그렇게 보시기 바랍니다.
2) 자녀 관계
20~21절을 읽겠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하니라.” 여기 보면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랬죠. 근데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누구를 기쁘게 하는 걸까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자녀들 속에서 주님이 지금 주인이시거든요. 하람아, 지금 잘 들어라. 자녀에 대해서 지금 얘기하는 거야. 부모에게 순종해라. 엄마한테 순종해야 돼. 순종하는 게 뭐냐? 주의 가르침대로 엄마한테 하는 거야. 순종하는 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씀이 에베소서에는 있어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 뭐냐?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했는데 이 땅은 그냥 땅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장수하면 최고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땅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 아닙니까?
또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부모는 자녀에게 있어서 머리예요. 부모를 통해서 생명이 전수됐잖아요. 성장할 때 필요로 하는 양식이 공급됐잖아요. 그리고 중요한 언약이 부모를 통해서 전수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질서를 중요하게 여겨요. 이 질서가 있어야 가정이 세워지고 가정이 세워져야 사회가 세워져요. 그래서 가정의 질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시는 거예요.
반면 부모에게는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서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성나게 하지 말고, 마음 상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떨 때 성나요? 너무 부당하게 매질한다든지, 아이에게 함부로 하게 되면 아이에게 억울한 감정, 분한 감정이 생겨요. 상한 감정이 들어가요. 그럴 때 마귀가 얼마든지 자녀들에게 틈 탈 수 있는 거예요. 중독 강의를 보니까 이런 케이스가 있더라고요. 자기 아버지가
학교 교사에요. 근데 어느 날 자기가 잘못했어요. 근데 이 교사인 아버지가 매질하는데 너무 심하게 매질하는 거예요. 그때 마음에 어떤 생각이 딱 들어갔나 하면 내가 이 집에서 살지 말아야 하겠다. 집을 나갈 생각이 딱 들어왔어요. 평상시 환경이 좋은 집안이에요. 어렵고 그런 집안이 아니에요. 근데 애가 가출을 해버렸어요. 가출해서 마약에 연결돼 버렸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오랫동안 마약에서 못 빠져나왔다는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단이 틈 탄 거죠.
3) 주종 관계(노사 관계)
22~23절을 읽겠습니다. “종들은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노사 관계에서도 사장님이 주님을 경외함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인식해서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지를 주님이 보신다는 거예요. 밑에 있는 사람은 눈가림으로 할 수 있잖아요. 사람에게 하듯 할 수 있잖아요. 사람은 속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든지 보일 때만 좀 하고 안 보일 때는 놀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잖아요. 근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이유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을 앎이니라. 기업의 상을 주님께 받는다는 거예요.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거예요. 결국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먼저 상대를 영적인 눈으로 봐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을 이해가 되잖아요. 안 그러면 이해 안 돼요. 그리고 주님과 관계에서 하라는 거예요. 부부관계든, 자녀와의 관계든, 노사 관계든 다 그래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을 욕하고 막 흉보고 이 건 진짜가 아닌 거예요.
상전은 4장 1절이 상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에게도 상전이 계시돼요. 반면 세상은 주인 되신 그리스도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주인이고 내 기준의 의로 행하는 거죠. 조금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꼭 상대방에게 그 의를 요구합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데, 니는 왜 그렇게 안 사냐? 내 의가 있으면 항상 내가 심판을 해요. 내가 심판 다 해버리면 나중에 나도 심판받아요. “상대방이 해 준 만큼 나도 한다.” 보통 이런 논리거든요. 저 주인은 돈밖에 모르는데, 나도 제대로 일하나 봐라 이러잖아요. 우리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분 앞에 우리가 상 받기 때문에... 또 우리가 불신자와 다르다는 것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손해 아닙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럴 때 배경과 원천의 축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더 깊게 들어가는 거예요. 용서 못하고 있는 사람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용서했는데 용서 못 하면 어떻게 돼요?
결론
1. 전도 제자는 인간의 의의 기준으로 사람 봐서 안 됩니다.
영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에요.
2. 주 안에서 주께 하듯 하라는 거예요.
부부관계, 자녀관계, 직장관계 다 적용됩니다. 특히 전도 제자로 여러분이 서기 위해서 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베푸는 거는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베푸는 거를 참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게 어릴 때부터 안 해본 사람은 잘 못해요. 연습하셔야 돼요. 사랑을 베풀려면 돈도 들잖아요. 어제 인도 친구들과 인도 식당 가서 먹었거든요. 13만 얼마 나오더라고요. 제가 돈이 없으면, 생활비가 빠듯하면 13만 얼마 나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 들잖아요. 근데 저는 수없이 체험했어요. 이렇게 나가는 걸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할 수 있는 거예요. 정말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여러분 손해 좀 보셔야 돼요. 사랑을 베푸는 일에 여러분의 수고도 들어가고 돈도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배경 되어 주시고 주님이 원천 되어 주시는 것을 체험하셔야 믿음이 자라나요. 세상은 조그마한 사랑이나, 선에, 조그마한 도움을 그렇게 목 말라 하고 있어요. 근데 우리도 깍쟁이가 돼 갖고 우리도 얄짤 없어 아니요. 우리가 사람 살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이 말씀을 행하고 있는 우리 집사님, 권사님들 분명히 하나님이 더 귀중한 통로로 쓰실 걸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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