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끝까지 함께 한 제자들(골 4:12~18)
오늘 제목이 바울과 끝까지 함께한 제자들입니다. 끝까지 함께했다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있습니다. 전도자에게는 은퇴가 없어요. 정년퇴직이 없어요. 세상일은 어느 정도 일하면 또 연세가 들면 은퇴가 있죠. 그런데 은퇴하면 새로운 일이라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만약 일이 없어지면 비전이 없어지기가 참 쉽습니다. 비전이 없어지면 사람이 연약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직종과 상관없이 전도자로서 직업을 갖거나 산업을 갖고 살았다면 전도자는 은퇴가 없습니다. 전도자로 산다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의 소원에 방향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주님의 눈을 갖고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품는 거예요. 이게 뭐 연세 많고 적음에 관계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우리는 골인 지점에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와 세계 복음의 비전을 가진 제자로 사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골인 지점으로 여기는 사람이지요. 저는 우리 권사님 장로님이 이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육신적인 인생을 산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았어요. 골로새서에 분명히 내가 직분을 맡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얘기했어요. 여러분도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한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을 치유 회복시켜서 다시 말해 확립시켜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 누리게 만들고 그래서 재생산할 수 있는 제자로 세우는 비전을 가지기 바랍니다. 장로님 권사님들은 이 비전을 더 분명하게 붙잡고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여기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에 방향 맞추는 삶을 살게 될 때 여러분 인생은 끝까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래서 늘 강조하지만 마 6장 31~33절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이 너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이 말씀을 꼭 붙잡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확실한 망대로서 사실 전도의 여정을 살았잖아요. 그리고 전도 이정표를 따라서 그 걸음을 걸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 바울의 여정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바울의 여정
1) 그의 연대표(AD)
5~10년 길리기아 다소 출생, 0세
30~33 스데반 순교에 관여, 교회 박해, 25~28세
33~35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 29~31세(약 30세)
35~46 아라비아 체류, 예루살렘 방문, 다소 준비기 30~41세(10년 이상 준비기)
47~48 1차 선교여행(소아시아 중심), 42~43세
50~52 2차 선교여행((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중심), 45~47세
53~57 3차 선교여행(에베소 중심), 48~52세
58~60 가이사랴 2년 투옥, 53~55세
60~62 1차 로마 투옥(옥중서신), 55~57세
62~64 석방 후 재선교 활동(마게도냐, 크레타 섬, 에베소, 스페인?) 57~59세
64~67 2차 로마 투옥 — 디모데후서 기록(죽음을 예감), 약 59~62세
67년 로마에서 순교(네로 치하 참수), 약 62세
2) 여러분도 개인 비젼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도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언약의 여정이 있습니다. 또 언약의 이정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개인 비전이 있어야 해요. 먹고 사는 비전 말고 그건 수단이고 진짜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사는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개인 비전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서 여러분이 교회 비전의 방향을 맞추는 거예요. 교회의 비전은 뭡니까? 전도 제자 선교 비전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전도해서 제자를 세워서 성경적인 전도 운동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까지 하는 겁니다. 다섯 나라 세 가지 동역하고 237 5천 종족 선교하는 비전을 우리 교회 비전으로 지금 삼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단에 들어왔을 때 이 다락방 전도 운동은 복음 회복 운동이다 이게 딱 와닿았어요. 왜냐하면 다락방의 강점이 뭐냐 하면 복음을 바르게 정립시키고 확립시키는 것이 강점이에요. 그러니까 야 복음이 진짜 회복되면 “사람이 변화된다. 치유가 되고 갱신되고 회복이 된다.” 이게 정말 믿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교회가 회복된다. 복음 회복돼서 개인이 회복되죠. 그래서 교회가 갈등 안 하고 전도 선교하는 데 딱 준비되는 교회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교회 회복 운동이에요. 그렇게 되면 따라오는 것이 전도 선교 회복 운동이에요. 그게 처음부터 제게 와 닿았던 부분이었어요. 하나님이 이 흐름에 동참하게 하신 것이 정말 감사하다 이런 생각을 가졌고요. 저는 지금까지도 그 흐름 속에 제 여정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 회복 운동, 전도 선교 회복 운동이 되니까 이거는 또한 하나님 나라 통치 회복 운동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맞죠? 여러분이 불신 현장에서 세상과 구분되고 세상에 답 주는 일에 쓰임 받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 실현하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최근 교단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일들이 있었잖아요. 이것들은 사실은 지금 말하는 복음 회복 운동, 교회 회복 운동, 전도 선교 회복 운동, 하나님의 통치 실현 회복 운동에 부합하지 않아요. 이런 일들은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갱신시키시는 문제점으로 주셨다 라고 여겨져요. 이런 부분은 참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끝까지 본질에 충실하기 바래요. 본질에 충실하셔야 해요.
다락방 전도 운동의 첫 번째가 복음 회복 운동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복음이 희미하다” 이런 말을 많이 써요. 또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많이 쓰잖아요. 사실 교회 안에 종교인이 엄청 많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인생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모르면 진짜 복음을 아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내가 지금 어떤 문제 빠져있는지를 모르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외쳐도 치유가 안 돼요. 진짜 치유되고 답이 되려면 하나님 떠난 상태가 얼마만큼 문젠지 이게 정확하게 보여야 한단 말이에요. 정통 교회에서는 이런 걸 강조합니다. 죄를 강조해요. 그래서 회개를 굉장히 강조하잖아요. 나쁜 게 아니고 맞는 거죠. 그리고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성화를 굉장히 강조해요. 그러면서 인간 책임성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근데 약한 게 뭐예요? 정작 영적 문제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약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맞다 틀리다 이렇게 가르지 말고 보완하는 겁니다. 보완하는 게 올바른 거예요. 그리고 기존 교회를 향해서 우리가 섬기려는 자세, 진짜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섬기고 기여하려는 자세를 갖는 게 옳은 거란 말이에요. 그게 옳겠어요? 아니면 저거 다 틀렸다고 까고 “우리는 복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익할까요? 전자가 훨씬 유익해요. 자세를 바꿔야 해요.
여러분, 영적 문제가 어떻게 인간 전인격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인간 노력으로 죄 안 지으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진짜 문제의 본질과 그 해결책을 모르게 되면 올바른 신앙생활 안 돼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 문제의 본질을 알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믿고 의지하고 주인 되게 하면 치유되고 회복되고 열매 맺고 살리는 사람까지 되거든요. 영적 문제 잘 알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답이라는 것을 진짜 믿고 그리스도를 주인 되게 하는 게 승리하는 방법이거든요. 이게 정확하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사람 열심으로 한단 말입니다. 그거를 우리는 “종교 체질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오래 믿어도 자기 영적 문제를 잘 모르고 신앙 생활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열심은 있는데 영적 문제를 잘 몰라 그래서 그 사람의 열심으로 주님을 믿다가 보면 또 자기 의를 갖게 돼요. 그래서 그 의를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니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이 확실해야 오직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진짜 내면에서부터 갱신 치유되어서 복음의 증인으로 전도 제자가 되는 거예요.
2. 문제의 본질과 함께 복음이 얼마나 완전한 지를 아는 것이 관건입니다.
1) 보통 구원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성화는 인간의 노력과 결단으로 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 노력과 결단이 자기 열심내는 결단이 아니고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결단이 돼야 해요. 내 힘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노력과 결단을 하게 되면 실패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보려고 굉장히 애쓰거든요. 근데 잘 안 돼요. 안 되니까 기도 행위와 성령 충만을 많이 강조하게 돼요. “기도를 더 해야 돼! 그리고 성령 충만 받으면 돼!” 이렇게 보통 강조하는데 문제는 뭐냐? 기본적으로 늘 신앙생활의 주체가 내가 된다는 거예요. 아직도 창 3, 6, 11장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어야 할 나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 자존심과 의를 갖고 있는 내가 주체가 돼서 잘 믿어보려고 노력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기도 행위와 성령 충만을 열심히 구한단 말이에요.
사단은 인간을 속여서 영적 문제에 빠뜨려 놓고 지금까지 인본주의 체질이 아주 정상인 것처럼 살게 만들었어요. “네가 노력해야지, 네가 이루어야지, 네가 열심히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들었던 얘기 아닙니까? 근데 내가 사단에 의해서 아담이 범죄에서 영적으로 죽었고 죄의 본성을 타고났고 그리고 실제 눈에 보이지 않게 사단이 누르고 마음과 생각에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이걸 알게 된다면 이건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으로만 깨뜨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걸 잘 모르면 성화를 인간의 의지력과 노력 중심으로 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오늘 확실히 좀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도 그렇고 성화도 자기의 의지력과 노력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이걸 애쓰고 노력하는데도 계속 죄를 범하게 되는 수가 참 많거든요. 그러면 이런 종교 체질인 사람은 갈등하고 죄책감에 빠져요. 믿는데도 왜 안 되냐? 그러면서 안 되면 답답하잖아요. 답답하니깐 열심을 내는 사람일수록 교회 문제도 많이 일으켜요. 답답하니까 비판의 날 선 눈을 뜨고 있어요. 한 사람을 진짜로 답 줘서 살리고 치유 회복시켜서 그리스도 누리게 만들고 재생산할 수 있는 제자로 세우는 일이 나부터가 안 되는 겁니다. 자기는 하려고 하는데 안 되니까 갈등 생겨요. 이게 종교 신앙이고 종교 체질입니다.
지지난주 수요 예배 때 조성준 성도가 교회에 왔어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저는 조 성도가 제 마음에 늘 있어요. 왜요? 제가 전도를 해서 교회를 오게 했으니까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저는 조 성도를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보고 그를 끝까지 하나님은 이끌고 계시다 이렇게 보고 있어요. 그날 제게 와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목사님 늘 회개 기도하고 있습니다.”이러더라구요. 그러면서 사모님 옆에 가서 조 성도님이 한 말이 있어요. “사모님 왜 나는 안 되죠?”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때 사모님이 한마디 딱 했어요. “체질” 그랬대요. 우상 숭배하는 집안에서 출생했고 영적 문제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조 성도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태반이죠. 그래서 그 마음이 어릴 때부터 안 잡히고 뭔가 편치 않고 답답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돌아다니면서 조 성도님도 어릴 때부터 술 많이 하셨거든요. 지금 듣고 있으면 인정할 겁니다. 그러니까 습관성으로 빠지는 거예요. 인생을 자유형으로 산 거죠. 누가 그 마음을 지배하느냐 이 말이에요.
오늘도 초등부에서 얘기했지만, 인간이 지금 사회 범죄 문제, 수많은 사고 사건이 양심, 윤리, 도덕 수준 미달의 문제가 아니에요. 양심을 못 지키고 너무 악한 짓도 한다는 건 양심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다 양심 윤리적인 문제로 봐요. 이게 양심 윤리적인 문제 전에 영적 문제예요. 하나님 떠난 원죄에다가 영이 죽고 사단의 욕심 속에서 인간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죠. 성장하면서 자기 안전의 동기와 자기 성공의 동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욕심부리고 투쟁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창 3장의 이기적인 죄에 더 빠진다고요. 답답하니까 육신적 타락으로 더 빠진다고요. 그리고 전부 다 세상 성공을 위해서 무한 경쟁을 해야 하니까 적을 만들고 미워하고 대적하고 전쟁까지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영적인 걸 모르잖아요. 이게 양심 윤리 도덕 문제로 본다고요. 저와 여러분은 영적인 문제로 봐야 하고 한 사람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걸 분명히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영적인 문제가 정신에 영향을 주잖아요. 그 정신에 마음과 생각이 있잖아요. 그게 신경을 통해서 육신과 연결돼 있잖아요. 결국 마음과 생각이 병들면 육신도 병이 와요. 그게 생활로 연결되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만들어 놨다 이 말이에요. 사단이 못 빠져나갈 만큼 체질을 형성시켜 놓은 거예요.
이걸 인간의 죄성과 책임만 강조하면 해결됩니까? 정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렇게 지금 형성된 문제인데 이거를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며, “니가 이렇게 죄 지으면 되냐?” 강조한다고 그게 해결이 됩니까? “니가 열심히 안 해서 그래!” 그렇게 얘기하면 해결이 됩니까? 늘 강조하지만, 우리가 어떤 불신자 상태 상태에 있었고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았고 구원받은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문제가 뭐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아야 되는 겁니다. 구원은 절대 우리 조건 때문에 허락된 축복이 아니었어요. 구원받고 나서 이때까지 사단이 빠뜨려 놓은 함정과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이 이제부터 치유돼야 돼요. 근데 “내가 구원받고 이렇게 은혜받았으니까 이제 내가 더 노력해서 죄 안 짓고 주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보통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럼 안 된다고요. 속는 거예요. 남아 있는 문제는 없어진 게 아니에요. 죄의 본성과 체질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이게 그리스도께 뿌리내릴 기회입니다. 이것은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 오직이 되라는 겁니다. 내 힘은 빼고 주님이 남은 문제까지 해결하실 것을 믿는 거예요. 넘어져도 이게 내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힘이 약해서 넘어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그리스도께서 붙잡아주시는 성령의 힘이 없으니까 넘어지는 거거든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더 열심히 안 믿어서, 내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뭘 모르는 거예요? 영적 문제를 모르는 거예요. 그게 얼마만큼 남아 있는 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게 수십 년 된 문제인데 단지 깨닫고 애쓰면 될 줄 알아요.
인본주의 체질이 믿음의 체질로 완전히 바뀌어야 됩니다. 그간 하나님 떠나서 영이 죽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체질이 인본주의 체질이에요. 항상 내가 염려하면서 내가 이루려고 애쓰는 겁니다. 내 머리로 내 능력으로 내 방법으로 하는 게 인본주의 체질이에요. 안 되면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거죠. 갈등에 빠지는 거죠. 근데 믿음의 체질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보좌 통치하시면 내 안에 성령 통치하는데 이 성령의 임재, 통치, 인도의 역사를 실제로 맛보는 겁니다. 실제로 성령님이 평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말씀의 깨달음을 주시고 여러분 속에 기도가 되게 만들면서 일 처리가 되게 만드시는 거예요. 근데 이걸 잘 몰라요. 그리고내가 일하는 건 자꾸 내 힘으로 하려고 해요. 주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주시려고 여러분 안에 지금 성령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이 확실히 체험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 살아주시려고 오신 주님을 늘 인정하고 의탁하는 것이 발전돼야 해요. 그러면 성령님으로 여러분의 영과 마음과 생각을 훨씬 더 강하게 잡아주셔요. 지속적으로 잡아주셔요. 그러면 죄의 본성을 극복하게 만들어요. 이게 방법입니다. 습관성을 이기는 것이 내 힘으로 정말 잘 안 돼요. 그런데 성령님이 자꾸 깨닫게 해 주시고 회개시키고 성령님을 힘입어서 그 부분이 극복되게 만들어요. 조성준 성도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2) 하나님 자녀는 진짜 대적을 분명히 알아야 해요.
목회 현장에서 사단의 공격을 언급 안 하는 목사님이 많아요. 마귀의 전략을 교리로만 알지 실제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영적인 메시지 하는 그런 교회 목사님들도 많죠. 실제 사단과의 전쟁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하는 목사님들도 많아요. 그렇지만 또 이걸 교리적으로만 아는 목사님들도 많아요.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의 능력보다 인간 열심에 강조점을 둬요. 지식에 강조점을 둔다고요. 이것 가지고는 이 싸움에서 집니다. 이 문제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실제로 그리스도 성령의 통치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믿음의 현주소를 딱 두면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회복돼요. 그렇게 되면 마음과 생각의 상태가 회복된다고요. 말씀의 인도를 받게 된다고요. 그게 진짜 치유예요. 그러면 개인이 회복됩니다. 개인이 회복되면 교회 회복이 돼요. 이렇게 회복이 된 교회가 현장을 살립니다. “지금 진짜 그리스도가 완전한 답인데 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못 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불신자는 예수 생명을 얻어야 되겠고, 신자는 진짜 복음이 확립되고 뿌리내려서 복음이 체질화되어야지 승리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성도들이 많단 말이야.” 이렇게 깨달아지는 사람은 이제 사역자로 길러질 수 있어요. 그냥 이게 들은 메시지 이해했기 때문에 전달하는 것 가지고는 힘이 없어요. 내 것이 돼서 내가 실제 치유가 되고 회복되고 승리하는 삶을 맛봐서, 내가 이렇게 많이 바뀌는 거를 맛봐서 말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실제 맛보고 체험하고 그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고 행복하고 이렇게 들어가야 해요. 이러면 따라오는 것이 전도 선교 회복 운동이에요. 이 전도 운동이 따라오면서 내 삶에서 진짜 하나님 나라 통치 실현시키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의 배경과 하나님의 능력이 믿어지잖아요. 그러면 내가 손해 안 보기 위해서 막 미워하고 사람들하고 갈등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내가 섬길 수도 있고 베풀 수도 있단 말이에요. 조그만 금전적인 문제가 와도 서로 돈 때문에 싸우고 끝까지 미워하고 이러지 않는다 말이에요. 여러분이 할 일은 100%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거예요. “항상 믿음으로 여러분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옵시고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하게 하시고 지식의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알기를 원하느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이게 뭐예요? 치유 회복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내가 선악의 기준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았던 내가 있거든요. 그 나를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힌 나로 인정하셔야 해요. 나를 부인하셔야 해요. 그러면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항상 깊게 인정하시는 거예요. 그게 되면 진짜 많이 치유되고 회복이 돼요. 제가 이 과정을 거쳤고 지금 내면에서부터 이런 부분들을 확인하고 체험하고 맛보면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성경적 전도 운동 모델로 나갈게요. 여러분은 그 본을 본받아서 믿음의 체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여러분도 전도자가 됩니다. 개인 전도부터 되고 그다음에 다락방 말씀 운동의 사역자가 될 수 있어요. 우리 교회 전체가 이 말씀 운동이 되고 전도 운동이 되면 시찰과 노회의 모델이 돼요. 안 되고 있는 교회가 지금 많거든요. 근데 우리는 한 거 없잖아요. 우리가 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믿고 의탁하고 순종한 것밖에 없어요. 그것만 제대로 하면 돼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시찰과 노예의 모델이 되면 필리핀 현장에도 성경적 전도 운동에 영향을 주고 섬길 수 있게 됩니다.
3. 바울과 끝까지 함께 한 제자들 소개
오늘 제목이 바울과 끝까지 함께한 제자들이에요. 그 제자들을 좀 소개합니다.
1) 첫째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 에바브라예요.
12~13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너희에게 온 에바브라가 너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이 에바브라가 누구냐 하면 골로새서 지역의 출신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사도바울을 만나게 된 거예요. 언제 만났냐 하면,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서에서 두란노 운동하거든요. 바울이 3간 에베소에서 말씀 운동하면서 제자를 키웠는데 그때 소아시아 지역에서 에베소 방문해서 말씀 들었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어요. 그래서 온 아시아가 말씀을 다 듣더라 이런 말씀 있잖아요. 학자들은 이 에바브라도 그때 에베소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라고 봐요.
복음 받고 사도바울과 교제가 이루어진 다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교회를 개척한 겁니다. 골로새 그 옆에 라오디게아 다음에 히에라볼리 이 세 지역을 다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에바브라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교회를 세운 거예요. 그랬는데 골로새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게 됐어요. 율법주의, 헬라 철학, 천사 숭배 이런 것들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에바브라가 위기를 느낀 거예요. 그래서 로마에 가택 연금 당하고 있는 바울에게까지 찾아간 거예요. 에바브라가 교회의 문제점과 일어나고 있는 이단의 문제를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급하게 편지를 썼는데 그게 골로새서란 말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그리스도론에 확실하게 서도록 서신을 보낸 것이 골로새서라 이 말입니다. 바울은 이 에바브라를 12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라고 얘기하잖아요. 이거는 전도자에게만 붙이는 말입니다. 전도, 제자, 재생산 이런 일을 지금 에바브라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는데 사실 사도바울 자신에게 붙이는 말이잖요. 지금 에바브라에게도 이 말로 호칭한다 이 말입니다. 12절에 보면, 이 에바브라는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2)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
14절에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한 사람입니다. 짧게 지금 얘기하고 있지만, 이 누가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굉장히 애정을 많이 갖고 있죠. 왜냐하면 누가는 직업이 의사잖아요. 근데 2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을 만났어요. 3차 여행 후반 때부터는 계속 따라붙었어요. 어디까지 따라붙었냐 하면 바울이 예루살렘 올라갔을 때 같이 올라갔어요. 체포됐죠. 가이사로 내려가서 2년 동안 있었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안 떠났어요. 가이사라에서 로마로 갈 때도 호송선에 같이 탔어요. 의사 누가가 끝까지 함께 했어요. 그래서 지금 골로새서를 쓰고 있는, 가택 연금 상태에 있을 때도 옆에 있었어요.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같이 해요. 대단하죠. 그래서 바울과 끝까지 함께한 제자다 이 말이에요.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여러분 인생에 언약의 여정이 있어요. 언약의 이정표가 있다고요. 여러분은 이 언약의 백성으로,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 여러분은 은퇴가 없어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골인 지점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거예요. 골인 지점에 설 때까지 은퇴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거는 뭐죠? 하나님의 소원에 방향을 맞추어서 사는 게 세월을 아끼는 겁니다. 방향 안 맞추고 육신적으로 살면 세월 다 소비하는 겁니다. 제가 성경적 전도 운동의 모델이 되고 여러분이 그 본을 따르는 교회 제자, 현장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종교 체질 되지 말고 믿음의 체질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아 있는 문제는 어떻게 하라는 문제라고요?
계속 그리스도께 뿌리내리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본성과 욕구와 체질이 여러분의 이해력이나 여러분의 정신력보다 훨씬 세요. 그래서 이해력과 정신력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하면 실패한다니까요. 여러분 내면에 성령님이 심령을 감동하고 심령에 딱 은혜가 오게 되면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을 건드리며, 마음과 생각을 움직여 버린다니까요. 그렇게 바뀌도록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계속 뿌리내리라는 거예요. 뿌리내리는 것이 하루에 세 번 정시 기도도 안 해. 그러니까 나머지 전부 인본주의 생각으로, 인본주의 체질로 다 살잖아요. 그것 가지고 여러분이 그 센 그 본성과 체질을 이기려고 하면 이겨집니까? 그 습관성이 이겨져요? 생각도 안 바뀌잖아요. 남아 있는 문제는 계속 그리스도께 뿌리내려야 될 문제고 여러분이 체질이 바뀌어야 할 문제고 여러분 속에서부터 되어야 할 문제예요. 속에서부터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자유를 누리고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 나를 이렇게 치유시키고 이렇게 회복 시키셨네요” 하는 감사가 나오게 돼요. 그렇게 될 때 눈이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가요.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된다고요. 개인 전도와 개인 다락방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것이 시찰과 노회의 모델이 될 수 있고 또 필리핀 성경적 전도 운동에 기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쓰고자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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