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시모를 제자로(몬 1:125)
오늘 제목이 오네시모를 제자로 입니다. 세상에는 오네시모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답 주고 또 치유 회복시켜서 제자 삼는 일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우리 수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겁니다. 그 능력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먼저 읽은 빌레몬서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빌레몬서는 1장으로 딱 돼 있는 편지예요.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는 굉장히 각별한 사이로 나타나 있어요. 빌레몬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은 걸로 여겨집니다. 그는 골로새서 지역에 살았고 부유한 편이었고 또 복음 받은 후에는 자기의 집을 개방해서 가정교회를 했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교회 형태는 전부 다 가정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가족 사항도 잘 알고 있었어요. 2절을 보면 자매 압비아가 나오는데 빌레몬의 부인이에요. 아킵보는 그 아들이든지 아니면 골로새서 교회의 사역자일 것이라고 여겨져요.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의 이름이 오네시모예요. 그는 어느 날 주인 집에서 금전적 손해를 끼치고 달아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마디로 도망간 노예예요. 그가 달아난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로마까지 갔던 거예요.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로 바울을 만난 거예요. 바울은 당시 가택 연금 당한 상태였고 사람들의 내왕은 받을 수 있는 상태였어요. 오네시모가 바울을 알고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고 누군가 오네시모를 복음 듣도록 바울에게 데려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복음을 듣게 됐고 믿어져서 진정으로 회심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겁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머물면서 심복 노릇을 한 거예요. 서신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사실 로마 법으로 한다면 오네시모는 중형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주인이 빌레몬인 줄 알게 됐어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죠. 그렇게 되니까 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편지를 쓰게 된 거예요. 그게 빌레몬서에요. 오네시모가 잘못했지만 이제 그를 용서해 주고 형제처럼 받아달라는 내용이에요. 그러면서 두기고에게 이 편지를 맡기면서 오네시모도 같이 딸려 보낸 거예요.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서 용서를 빌고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관계 회복하라고 딸려 보낸 겁니다. 그게 이 빌레몬서의 주 그 내용이에요. 여러분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초대교회 현황
당시 노예 제도는 매우 엄격했어요. 죽일 수도 있는 거예요. 노예는 재산이죠. 그런 시대에 교회는 어떻게 노예를 형제로 받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신분 차이가 현격하잖아요. 근데도 이 노예도 교회에서는 똑같은 형제로 간주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야 이 종들도 형제로 인정해라”고 직접 말씀하셨으면 몰라도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어요? 갈 3:28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하나라”했어요. 여러분은 그 당시에 살았다면 자기 집에 노예를 예수 믿었다고 해서 동일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1) 초대교회는 그러니까 결코 머리로 이해해서 이걸 실천한 게 아니었어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복음이 믿어져서 실천한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동일하게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하신 거죠. 창조 시에 신분과 계급을 나누지 않으셨어요. 아담과 하와는 질서는 있지만 신분 계급의 차이가 없었어요. 신분과 계급 구조는 창세기 3장의 범죄의 결과죠. 초대교회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성령으로 체험하면서 노예 제도가 죄악인 줄 깨닫게 된 거예요. 그렇다고 그 제도를 바꾸는 건 쉽지 않은 거거든요. 근데 교회 안에서는 중생의 체험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력히 일어나면서 사람의 고정관념과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자기 기준, 고집 이런 것들이 무너지는 거예요. 이건 성령님만이 가능한 거예요. 이들 생각의 전환과 고정관념이 깨지는 거는 사실 가히 혁명적인 거예요. 성령님은 인간의 본성 부분까지도 터치하시는 거예요. 본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그랬죠. 그렇지만 가장 깊은 인간 영을 감동하시고 그 심령이 움직이고 울림이 되도록 그렇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의 권위가 인정되게 만드시고 사도의 권위가 인정되게 만드시고 교회의 권위가 인정되게 만드셨어요. 사회 제도상으로 주인과 노예 관계였지만 교회 안에서는 동일한 형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중직자까지 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노예 중에서 감독까지 나왔어요. 바울은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노예와 상전과의 관계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제도를 바꾸라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바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 인간관계도 하라는 겁니다. 주인이라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노예를 대하라는 겁니다.
2) 복음은 제도를 바꾸는 게 아니라 인간을 먼저 변화시키는 거예요.
이 변화 받은 사람들이 제도까지 바꾸도록 하시는 거예요. 초대교회는 노예 제도까지 바꿀 여력은 아직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그 당시 로마 제도를 부정하면 오히려 반국가 세력으로 몰릴 수 있었어요. 당시 로마 사회는 기독교가 전파된 지 초창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수는 매우 소수였어요. 그러나 복음에는 능력이 있었어요. 사람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어요. 이런 영적인 힘이 사람을 먼저 변화시켰고 노예들이 법적으로는 종이었지만 교회 안에서는 형제로 받아들여지도록 한 거예요. 사실 이런 성령의 은혜가 통치하는 그런 교회가 맞는 교회죠.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는데도 노예 제도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그 이유를 한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요. 첫째는 거듭남 체험이 확실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명목상의 신자가 없었어요. 초대교회는 구원의 체험이 확실한 거예요. 두 번째는 이 복음과 함께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었던 겁니다.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했는데 성령의 역사가 보이는 거예요. 그게 초대교회의 특징이었어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어요. 사도들의 말이라면 상전들도 절대 복종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성도들은 다 순종했던 겁니다. 이것이 노예를 형제로 받을 수 있고 나중에 사회 제도까지 바꿀 수 있었던 기독교의 저력이에요. 아무튼 그 시대의 상황을 생각하시면서 오늘 이 빌레몬서를 여러분이 다시 한 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2. 그러면 우리는 오네시모를 어떻게 제자 삼을 수 있겠습니까?
오네시모 라고 한다면 전과자라든지, 중독자라든지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수 있는 그런 대상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우리가 제자 삼을 수 있냐 말이에요.
1) 사람을 영적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계속 강조하는 말씀이죠. 인본 기준의 의와 사회 윤리 기준에 의로 봐서는 안 돼요. 선악의 기준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 바뀐 것이 본질적인 죄입니다. 오늘 초등부에서도 이걸 강조했거든요. 양심성이나 윤리성이 부족한 게 죄의 본질이 아니에요. 사회에서는 양심 윤리 기준으로 저 사람이 착하다, 저 사람이 못됐다, 악하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잖아요. 근데 성경은 윤리성, 양심성이 부족한 것을 죄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중요한 거는 사단이 기준점을 바꿔버린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기준의 의와 사회 윤리 기준의 의를 가지고 자신을 의롭다 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 윤리를 배우잖아요. 근데 그거 배우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배웠습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어! 또 살아야 돼! 그렇게 살면 다른 사람보다 나는 의로워! 이런 식으로 배웠잖아요. 출발부터가 사실은 의를 갖고 우리가 사회 윤리를 배워요. 근데 이게 사단이 기준점을 아예 바꿔버린 거예요.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하고 있으면서도 그게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죄라는 인식이 전혀 없어요. 이게 속는 겁니다.
여러분 한 군데만 찾아보세요. 로마서 10장 2절에서 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하나님이 볼 때는 원죄와 영적 문제에 다 빠져 있어요. 이걸 아는 게 올바른 지식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는데 올바른 지식이 없었던 거예요. 무슨 지식이 없었어요? 영적인 지식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무슨 의예요? 종교적인 의라고 그러는 겁니다. 이들은 상당히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있고 그 의를 쌓고 있었어요. 그걸 예수님이 책망하시거든요. 예수님은 나를 믿는 것이 의롭게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들이 그걸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가지고 십자가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력히 부정하고 있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도 거듭나지 않고 영적인 문제와 복음이 뭔지 모르면 당연히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의를 기준으로 생각할 거예요. 이게 속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사단은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옮겨버렸어요. 이것이 본질적인 죄라는 것을 모르게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인간이 하나님 떠난 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안 하는 거, 하나님의 통치를 대적하는 거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 안 하는 것이 죄인데 그거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인간이 정한 선악을 주장하고 있으니까 그래요.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기준의 선악에 의거해서 판단하는 게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갖고 있는 선악의 기준대로 의롭냐 하면 그건 단지 상대적으로 의로운 거예요. 이게 사단에게 속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전부 다 보이는 것만 믿고 하나님 안 믿고 인간이 다 주인 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인간이 다 욕심에 빠져 있거든요. 니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욕심에 딱 빠졌기 때문에 인간은 불안함 속에서 그 욕심을 갖고 자기 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어요. 우리가 여태까지 배운 거는 그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단에게 대단히 속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은 지금 양심 기준의 의, 종교적인 의, 행위 기준의 의를 가지고 사탄에게 속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행위 기준의 의가 뭐예요? 내가 저 사람보다 선량하다 이거예요. 나는 저 사람보다도 낫고, 부모를 저렇게 모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는 저 사람들보다 성실하고 근면하고 나는 착실하게 살았다 이 말이에요. 이게 전부 다 행위적인 의예요. 누구 기준의 의입니까? 인간 기준의 의에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반역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진짜 인식을 잘 못하고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님 중심의 모든 기준에서 사단이 고단수로 속여 모든 기준을 사람 기준으로 바꿔버렸어요. 그러니까 내가 주인이니까 나를 커버하잖아요. 내가 죄의 본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양심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냐? 이 생각들 다 갖고 있잖아요. 영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이 영적으로 안 보면 오네시모가 불쌍히 여겨질 수가 없어요. “저 못된 처먹은 놈, 저 중형 받아야 돼” 안 그렇겠습니까? 오네시모가 주인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단 말이에요. 그러면 얼마나 괘씸해요.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면 중형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 범죄자들, 가정을 무너뜨린 사람들 보면 우리 수준으로 딱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라 “저런 못 돼 처먹은 놈들, 저것들은 없어져야 돼!”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이게 누구 기준의 의라고요? 인간 기준의 의라고요. 이걸 영적으로 봐야 주님의 눈과 마음과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원래 인간이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어떻게 원죄와 영적 문제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인간 이해가 돼요. 그러면 인간이 딱 주인이 돼서 인간 기준의 의를 가지고 인본주의 자존심의 자아가 주인 되어서 어릴 때부터 비교 의식 갖고 열등감과 교만 가운데 살아온 거가 이해가 돼요. 자기 욕구대로 안 되면 남 원망하게 돼요. 누가 나를 공격했거나 상처를 줬으면 당연히 상처받고 복수해야 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은 그 상처 속에서 살아남아야 되니까 굉장히 자기를 강하게 다듬어요. 이게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에요. 사단이 얼마나 속여먹고 하나님 떠난 불안 과 사단이 준 욕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처세하게 하는지 몰라요. 내게 잘해주는 사람은 사랑스럽고 내게 해를 주는 사람들은 밉고, 또 나에게 심하게 한 사람은 평생 원수 맺고 살아야 돼요. 지금 교회 와서 이제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되겠다. 이제 내가 좀 마음을 착하게 써야 되겠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되겠다. 그래 갖고 인간 본성이 안 바뀌어요. 바뀌는 거는 오직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을 살려서 말씀이 부닥치게 만드셔야 해요. 그러면서 자기의 모습이 보여야 해요. 오래 믿고 권사님이 됐어요. 기도도 많이 해요. 그러나 이런 내면을 잘 못 보면 권사님들 중에서도 늘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나는 다 내려놨다. 다 나는 버렸다고 해요. 제가 볼 때는 안 버렸는데 많이 잡혀 있는데 본인은 그렇게 얘기해요. 정말 우리가 종교적인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양심적인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행위적인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아니면 사회적인 기준에서 범죄자로 지탄받고 있고 실제로 죄인인 사람이라도 영적으로 보면 똑같아요. 종교적인 의인들은, 사회적인 의인들은, 행위적인 의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는 점에서는 똑같아요. 하나님 주권을 인정했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했습니까?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생명과 건강과 기능과 환경과 축복을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했습니까? “내가 잘했고 난 저 사람보다도 더 열심히 살았어” 라고 하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내가 다 가로채는 거예요. 그게 죄예요. 기준점이 틀려버렸기 때문에 지금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게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가 아니면 소망이 없다는 걸 아셔야 해요.
오늘 초등부에서 얘기했는데, 초등부 애들이 무슨 지옥 갈 만한 죄가 있나요? “너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어주셨어, 안 그랬다면 지옥 가는 거야”한다고 그게 와닿습니까? 그래서 애들한테 오늘 이 설교를 했어요.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인데 그 선악의 기준이 인간으로 바뀌고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자기 의를 나타내는 것이 죄고 반역이고 이게 지옥 갈 죄라고 설교해 주었어요. 만약에 이게 진짜 와 닿는다면 현장을 영적으로 보면서 “지금 모든 사람이 이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구원받을 수가 없구나”. 진짜 이 마음을 갖게 되는 거예요.
2) 박유리 목사님 간증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분인데요. 이번에 중독 예방 전문가 과정 공부하면서 이분의 간증을 들었어요. 젊은 여자분인데 박유리 목사라는 분의 간증이 나와요. 잠시 소개할게요. 이분이 제주도 목회를 하시는데 이분도 전문가 자격증을 딴 분이에요. 그러니까 교육청에서 허락을 받아서 문제 학생 위탁 교육을 교회에서 시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하대요. 어떤 애들이 오냐 하면 학교에서 벌점 많은 애들이 오겠죠. 교내 흡연, 수업 불출석, 학교 폭력 이런 이유로 벌점 받은 학생들이 교회로 교육받으러 오는 거예요. 오네시모 과죠. 그런 애들이 와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 이수 점수가 있어야지 그거를 학교에서 인정해 주니까 오는 거예요. 근데 와서 잘 안 들어요. 그 애들에게 박유리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를 한 대요. “니네 담배 피는 거를 피지 말라고 해서 안 피우겠니?” “또 끊는다고 해도 니네 인생이 갑자기 변하고 그러겠냐” 이렇게 묻는대요. 그럼 아무 대답 안 한대요. 피지 말라고 해서 안 필 놈이 어디 있어요? 여학생들도 피다가 많이 온대요. 그래서 이들에게 담배 피울 수밖에 없는 내면 상태를 말해준대요. “너희 속에는 불안과 외로움과 상처가 있지 않니?”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 속에서 현실 문제를 겪으니까 답답하지 않았겠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피고 누가 권해서 폈지만, 너희 마음의 상태와 맞물린 거야.” 이들의 상태를 공감해 주면서 말하니까 그때는 잘 듣는데요. “담배, 술, 도박에 중독된 상태가 실제 내가 너무 답답한 상태에서 내가 위로받고 싶으니까, 내가 너무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그걸 풀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니겠니?”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애들이 이제 잘 듣는 거예요. 그들의 문제가 외부 탓만 할 게 아니라 부모 때문에, 환경 때문에, 누구 때문에 가 아니고 자기 내면에 문제가 있었구나! 이걸 보게 하고 깨닫게 하는 메시지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게 누구 탓만 아니라, “내 속에 진짜 외로움이 있었네, 내 속에 진짜 상처가 있었네, 내 속에 정말 불안이 있었네”, 그런 걸 돌아보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진짜 인생의 문제가 뭔지, 그게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얘기하고 거기서부터 초래된 결과가 지금 현실에 나타나는 문제라는 걸 얘기해 주면서 그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얘기한다고 합니다. 이게 교육청에서 허락받아서 하지만 프로그램은 어떻게 하든지 별 상관하지 않는데요. 그냥 교육청에서 프로그램을 그냥 다 맡겨 놓는데요. 그래서 그런 프로그램을 짜서 하는 거예요. 복음도 전하는 거예요. 그럼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애들이 나온대요.
3. 세상에는 오네시모 같은 사람이 많아요.
그중에 범죄자도 있고 중독자도 있어요. 근데 우리가 영적으로 봐야 이해가 되고 공감되고 답 줄 수 있어요. 사실 영적으로 보면 사실 우리도 똑같다니까요. 우리의 3, 6, 11장의 본성이 다 똑같잖아요. 우리가 두 가지 욕구 똑같이 갖고 있잖아요. 그리고 기준점도 똑같이 잘못됐어요. 인간 내면의 상태는 성령의 지배를 받든지 아니면 사단의 지배와 영향을 받아요. 영적 문제가 마음과 생각의 상태를 지배한다니까요. 원래부터 불안하고 우울한 게 아니에요. 인간이 이걸 모르고 인간의 열심과 결단으로 마음과 상태를 바꾸고자 하면 실패해요. 우리도 해봤잖아요. 우리가 이해력과 정신력으로 바꾸려고 하면 조금은 바뀌지만, 본성이 바뀝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강한 욕구가 극복됩니까? 영적으로 죽은 게 살아납니까? 눌리고 불안하고 답답하니까 습관성에 빠지는 거예요. 그때 누가 그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느냐 이 말입니다. 사단이 못 빠져나올 만큼 체질을 형성시켜 놓은 거예요. 이걸 인간 책임만 강조하면 해결됩니까? 니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게 해결이 됩니까? 그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정확히 전달해 줘야 된다 이 말이에요. 영접 후에도 남아 있는 문제가 여전히 있다고 그랬죠. 그러나 이제 생명이 일단 주어졌기 때문에 남아 있는 문제는 그리스도께 뿌리내릴 기회라고 그랬어요. 맞죠?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있었구나를 고백하고 그리스도께 오직이 될수록, 오직이 되는 체질이 될 수 있도록, 이 사람이 성령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제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영적 상태가 안 좋으면 지난번에 얘기했잖아요. 솟트를 보다가 자꾸 넘기면서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다고 얘기했잖아요. 육신의 본성은 재미있는 거에 끌려요. 호기심이 있는 거에 끌려요. 한 번만 보자고 보는데 솟트는 계속 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보다 보니까 저도 한 30분 이렇게 근방 지나가요. 근데 제게는 계속 주님이 뭘 원하시냐 하면 “나의 관심과 생각에 너의 관심과 생각을 24시간 맞춰라.” 이걸 자꾸 원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육신적인 것에 관심과 생각을 두게 되면 성령을 거스르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기도가 방해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수십 번 제가 결단하고 주님께 나의 관심과 생각을 집중시키겠습니다. 아무리 결단해도 이거 잘 안 됩니다. 주님이 진짜 이 부분에 대해서 깨어 있도록 해 주세요 라고 저도 그렇게 기도를 해요. 근데 주님이 제 마음에 무슨 말씀을 하냐 하면 “너도 습관성이 있지? 지금 중독에 빠진 사람과 똑같다” 그러는 겁니다. “내가 너를 갈보리 십자가로 용서하고 네가 습관성에 빠지고 또 빠져도 내가 너를 용납하고 너를 떠나지 않고 계속 성령으로 너를 치유하고 너를 회복시키지 않니?” 맞죠? 그러면서 제 내면에 “니가 이 일을 해주지 않을래?” 중독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사람의 체질이 바뀌기 위해서는 참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근데 내가 하는 것처럼 그를 받아주고 기다려주고 그가 치유되도록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겠니? 내가 너에게 그걸 하기를 원한다” 이런 마음을 주시는 거죠.
결론
오늘 제목이 오네시모를 제자로입니다. 내년도 교회 방향이 주일 오후에는 전도 학교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개인 전도와 다락방 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절대 현장이 필요해요. 오늘 강미희 권사님이 기도했지만, 현장이 없으면 현장에서 방해하는 세력과 싸워서 이기는 역량을 못 배워요. 여러분의 능력으로 하라는 게 아니고 그 현장에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거를 배우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영접자가 나오게 되면 다락방을 하게 되잖아요. 이제 다다음 주부터 오후 시간에 전도 학교식으로 진행하는데 일단 교재를 보려고 해요. 복음 편지를 가져오기 바래요. 복음 편지가 없는 사람은 류성옥 권사님한테 얘기하세요. 구입을 좀 하기 바랍니다. 새롭게 하는 마음으로 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현장에서 전도하고 그 사람을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제자의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의 그림을 그리냐 하면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서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되냐 하면 복음이 나를 어떻게 사단의 함정과 그 속에서 형성된 것에서부터 빼내고 치유 회복시키고 나를 바꾸었는지 그 스토리가 있으면 돼요. 이해돼죠? 내가 실제 복음의 이론이 아니라 실제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내 눈을 여시사 나를 어떻게 함정에서 빠져나오게 만드시고 내가 안 보였던 부분을 어떻게 보이게 만드셨고 어떻게 치유 회복시켜서 내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지 체험하는 스토리가 있으면 딴 사람을 그렇게 키우는 일에 여러분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되도록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함께 인도받는 축복의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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