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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6년 1월 4일 주일오전예배 - 절대 이정표 (딤후 1:6~11)

by 현상금 2026. 1. 4.

절대 이정표 (딤후 1:6~11)

 

 

 

 

올해 우리 교회는 실제 전도 운동 시간표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 예배 때부터는 전도 학교를 하면서 복음 편지부터 하고자 합니다. 전도 그러면 육신의 본성은 부담스럽습니다. 왜 잘 아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만나야 하고 또 아는 사람이라도 복음을 환영하고 있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게 내 본성의 느낌 감정과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을 분리하라는 거예요.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 본성은 염려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안에 성령님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담스러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성령님은 전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뭐예요? 내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 느낌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성령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을 받는 거예요. 이게 전도만 그렇습니까? 모든 영역에서 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와도 괜찮아요. 들어올 수 있잖아요. 육신의 생각을 받지 말고 여러분은 주님의 생각으로 돌릴 수 있으면 돼요. 그게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이 결국 이 싸움이거든요. “내가 사냐 그리스도가 사시냐? 내 본성으로 행하냐 아니면 성령의 통치로 행하냐이 싸움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전도 현장에서 이 부담이 다 올 수 있어요. 전도하러 간다고 하면 아침부터 부담이 올 수도 있어요. 그런 사람도 있죠. 제가 많이 그랬던 사람이거든요. 근데 제가 지금 매주 나갈 수 있는 이유는 계속 바꿀 수가 있어요. 바꾸는 역량을 더 주님이 길러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생각으로 보는 게 발전이 되는 거예요. 이제 영적인 눈으로 현장을 너무나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근데 부담이 된다고 여러분이 현장을 기피하고 또 자기 방식의 전도를 찾지 않으면 거기에 필요한 전도 역량을 못 얻어요. 믿고 의탁하고 순종할 때 그 역량을 얻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계속 골 26~7절에 네 단계를 인도 받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계속 여러분이 강단을 통해서 또 여러분 스스로 말씀을 통해서 복음 진리의 교훈을 받는 거예요. 그것을 내면화시키고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 기도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깨닫고 은혜가 됐다고 해서 여러분의 정신력과 의지력으로 이루려고 하면 집니다. 지난주도 얘기했잖아요. 본성과 욕구가 더 세기 때문에 여러분이 알아도 그거를 극복 못 하는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누가 극복하게 만들어요? 성령님이 여러분 내면에 말씀이 와닿고 감동되고 울림을 주고 움직임을 주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아직 목사님, 저는 성령의 인도가 뭔지 모르겠어요. 성령님이 제 마음에 와 계신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되면 참 안타까운 사람이에요. 아직 생명이 없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이 계속 이 골 26~7절의 단계를 가시기를 바라고요. 이게 전도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이 삶이 되면 모든 삶에서 영향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계속 가장 관심 있는 게 자기 하는 일이잖아요. 자기 하는 일이 안 풀리면 여러분이 행복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자기 하는 일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성령의 임재 통치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기도가 되면서 내 일이 주님이 주인이시다.” 이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이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을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모든 일을 주님으로 말미암아 처리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장로님이 기도하셨던 골로새서 317절 말씀이죠. “무슨 일에나, 말에나, 일에나 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이렇게 돼 있죠. 계속 주님이 내 안에 행하시는 삶의 역량을 기르는 올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을 계속해서 인도해 가시는 이정표를 보여주십니다. 예전에 안 됐던 게 이제 되어지면서 다음 단계에 또 이정표를 보여주는 거예요. 마치 우리가 포항에서 서울 가려면 곳곳에 이정표가 나오잖아요. 똑같아요. 신앙생활도 이정표가 계속 나와서 목표 지점까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최종 이정표도 있어요. 절대 이정표가 있어요. 절대 이정표가 뭘까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삶이 계속 되어서 치유 회복되고 다시 주의 형상이 회복되는 거예요. 그거는 주님의 눈과 마음과 생각이 회복되는 삶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능력을 힘입어서 여러분의 일 처리도 되고 전도자의 삶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절대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입성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거, 이게 지금 절대 이정표예요. 이렇게 가는 데 믿음과 의탁과 순종만 잘하면 여러분을 통한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기도 없이 막 일을 이루려고 하는 거는 인본주의 체질이 강화되는 거예요. 오히려 사단의 통로가 되는 거예요. 사단의 통로로 빠져나왔던 그 체질로 다시 빠지게 되는 거예요. 거기서 빠져나와야 되거든요.

 

1. 전도자로 한 사람이 세워지려면 준비 단계와 기긴이 있다.

1) 사도 바울은 다메섹 체험 후 막바로 사역자가 된 게 아니에요.

그가 안디옥 교회 사역을 시작하고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이 되잖아요. 그전 기간이 그에게 있었다 이 말이에요.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기까지 12~13년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앞의 자막을 보면 바울의 여정에서 여기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잖아요. 그게 29~ 30세인데 그러고 막바로 선교 여행을 간 게 아니고 아라비아에서 한 1년 이상 머물렀고 한 번 예루살렘을 잠시 방문했다가 다시 다소로 내려갑니다. 자기 고향 다소로 내려가서 여기서 한 7~8년간, 길게는 10년 동안 이 현장에 있었던 거예요.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로 구약을 보는 눈이 다 열린 거예요. 그리고 이때까지 그 삶의 체질은 율법 체질이잖아요. 종교 체질 아닙니까? 얼마나 열심히 있는 사람이에요. 핍박도 막 열심히 내서 했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 기간 동안 복음도 정립되고 체질도 바뀌고 그리스도의 깊은 계시 속으로 들어갔던 기간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복음 전도자로 준비되었던 기간입니다. 이때 시간표를 딱 맞춰서 바나바가 다소까지 찾아오잖아요. 그리고 데리고 가서 안디옥 교회를 맡아서 같이 동역하잖아요. 안디옥 교회에서 한 1년 머물렀다 그래요. 1년 머문 다음에 성령께서 내가 시키는 일을 위해 두 사람을 따로 세우라이렇게 명령하셨어요. 여러분 성령님이 명령하시는 거 어떻게 들었을까요? 내면의 음성으로 들어요. 실제로 귀로는 안 들려도 선명하게 내 생각이 아닌 성령의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런 거 체험하셔야 돼요. 물론 귀로도 직접 말씀할 수 있어요. 바울은 그런 체험이 있잖아요. 주께서 밤중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27:24) 직접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이 기간을 합쳐서 한 12~13년 정도가 준비 기간이에요. 이 대사도도 하나님이 그렇게 준비시킨 거예요.

 

2) 전도자로 준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생 전환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옛날 체질대로 못 쓰임 받는 거예요. 어떤 전환이 필요합니까? 일단 인생 방향 전환이 되잖아요. 인본주의 인생으로 살았고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요. 그럼 인생 방향 자체가 바뀌게 돼요. 그다음에 뭐가 바뀝니까? 가치관이 바뀌어요. 가치관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옛날에는 돈 따라갔잖아요. 옛날에는 명예 따라갔잖아요. 근데 그게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게 체질이 바뀌어요. 옛날 기도 안 하던 체질이잖아요. 이제 기도 체질이 되는 거예요. 옛날에 내가 주인이었잖아요. 이제는 그리스도가 주인 되는 체질로 바뀌는 거예요. 이런 삶이 가능한 거란 말이에요. 우리 안에 생명이 없다면 불가능하죠. 근데 내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셔요.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만드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기도를 종교식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주시도록 그거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일 처리가 하나님 소원에 방향 맞추어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 처리하는 쪽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 당연히 있어야 될 게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겁니다. 이 체험을 하셔야 됩니다. 예의 주체가 자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영적 문제를 바닥까지 보게 되면 삶의 주체가 바뀝니다. 머리로 많이 알잖아요. “목사님 메시지 제가 다 알아요.”해도 아는 거랑 실제 믿어지는 거랑 달라요. 실제 그만한 삶의 역량이 주어지는 거랑 달라요. 만약에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면그리스도가 주시는 행복을 못 느껴요.

 

저는 기존 교회에서 부 교역자 생활을 한 6년 했어요. 기존 교회에서만 한 6년을 했어요. 그때는 제 자신을 영적으로 볼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그런 메시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열심 내는데 내 힘으로 안 되니까 기도 많이 해라. 성령 충만 받아라그거 강조하잖아요. 근데 여전히 주체는 누구예요? 여전히 자신이에요. 우리 교단에서 영적 메시지를 들으면서 제가 종교 생활했다는 게 깨달아지는 거예요. 그렇다고 거듭나지 않았습니까? 내 안에 성령의 은혜가 없었습니까? 있었어요. 그랬는데도 나는 종교 체질이었구나! 이렇게 깨달아진 거예요. 저는 이 과정이 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2. 내 힘으로 주님을 잘 믿어보려는 종교 체제를 버려야 됩니다.

1) 이게 중요한 전환입니다.

이 종교 체제를 버리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실제 성령의 임재 통치 인도 역사를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가 주객과 체질을 바꿔야 하는데 사실 잘 안 바뀌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문제를 통해서 자기를 깊게 보게 만드시는 거예요. 깊게 보도록 문제를 붙여서 기도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래서 언제 바뀌는지 아십니까? 문제가 주어져서 그것이 선용 될 때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성도들에게 문제가 주어지는 게 나쁜 게 아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믿음의 사람한테 어떤 센 문제가 오는 거는 굉장히 중요한 기회예요.

 

저희 교회에 최 장로님 내외가 나갈 때가 벌써 그게 2018년도인가 그랬어요. 최 장로님 내외 아시죠? 그때 교회가 참 힘들었죠. 저는 기도는 했지만, 그 내외 분을 위해서 기도했죠.

근데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분히 기도가 안 되었어요. 제가 한다고 해서 그게 딱 뚫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때 하나님, 왜 제게 이들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그 성령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은데 왜 그게 안 되죠?”이제 나간 후에 저희 교회가 집중 훈련을 계속하게 됐어요. 그때 그 부분을 놓고 하나님께 제가 깊게 기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벌써 몇 번 그런 부분을 설교했는데 그때 주님은 성령으로 기도가 되게 하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깊게 묵상하게 해 주셨어요. “왜 나는 그 사랑이 안 되죠?” 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게 만드셨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그걸 감당하셨는지 그거 감당하시려면 우리를 사랑하셔야 되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해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세밀하게 묵상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십자가 전 과정을 기도 속에서 묵상하면서 주님이 당한 고통을 기억하면서 기도가 막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깊게 고뇌하셨잖아요. 절대로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실제 그 문제 앞에서도 예수님이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게 육신의 본능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진짜 뼈와 힘줄과 혈관과 신경이 못 박히면서 으스러지잖아요.

그리고 그게 당겨지잖아요. 그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나중에 부르짖잖아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 따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외치시잖아요. 절규죠.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가 그 절규하는 아들을 외면하시거든요. 모른 척하세요. 왜 그렇게 하시냐 말이에요. 그렇게 외면하셔서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시면 공의의 심판을 우리가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로 하여금 그 공의의 진노의 심판, 그 영원한 형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들을 희생하신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 아가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성령님이 가르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는 그 사랑이 눈곱만큼도 없어요라고 고백하는 거죠. 그럴 때 그래서 니가 하는 게 아니고 아가페 하는 나의 영을 너에게 넣어줬다는 거예요.

 

사실 제가 보니까 그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성령님이 인도하여 주신 것 외에는 사실은 전부 인본주의 체질이었다는 게 보여요. 그래서 실제 제가 신앙 생활하면서 성령님이 되게 하신 것만 되어졌지 내가 되게 한 게 없어요. 영을 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영이 회복되고 이 영이 은혜를 받고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것이 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에요. 이거에 따라서 내 인본주의 체질이 보이고 이게 어떻게 잘못됐구나! 하는 게 보이고 그래서 그 인본주의 체질을 내려놓게 된다고요. 그래서 사실은 나의 변화는 성령님이 변화시키시는 거지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더라 이 말이에요. 그리고 내가 전도해서 딴 사람을 생명 얻게 만들고 그 사람을 치유 회복시키는 것도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저는요. 제 동기부터 잘못됐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제 동기가 아가페 사랑이 아니잖아요. 내가 인정받고 내 동기 채우려고 하는 거에요. 제가 종종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사역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전부 다 내 동기에 주님도 끌어당기고 다른 사람도 끌어당기더라는 거예요. 성도도 내 동기에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했어요. 이런 게 안 보이면 안 고쳐져요. 이제는 제가 사역하는 거나 전도하는 거나 내 동기나 내 욕구를 위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동기, 주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는 영혼들을 주님이 살리는 그 일에 제가 통로 되는 겁니다. 분명히 이제 이렇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동기 만족이 안 됐다. 그래서 사역에 낙심하거나 전도에 낙심하거나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동기 하나가 제대로 보이게 되니까 나머지가 보여요. 내가 가지고 있었던 기준도 철저히 인본주의 기준이었구나. 3, 6, 11장의 기준이었구나.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의 현주소도 철저히 눈에 보이는 환경과 물질과 눈에 보이는 의지 대상이었구나. 저의 믿음이 삼위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런 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내 인생에 이제까지 삶의 방법은 철저히 인본주의 방법으로 내가 염려하면서 내가 긴장하면서 내가 이루려고 하는 그런 인본주의 방법이 어릴 때부터 불안했고, 염려했으니까 안간힘 쓴 겁니다. 제가 그때 성령의 인도 받는 법을 알았습니까? 그러니까 막 자존심으로 되게 하려고 막 그런 거죠. 저는 그러니까 동기, 기준, 믿음의 현주소, 삶의 방법이 다 인본주의적이에요. 목적도 사실은 내 욕구 성취예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내 인생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위해서 내 자신이 드려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 전환이 된 이후부터 그거 한꺼번에 안 되지만 계속 기도가 되면서 전환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는 겁니다. 치유 회복되는 거에요.

 

2)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는 이런 체질이 안 바뀌었어요.

3, 6, 11장의 본성에 입각한 체질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를 따르는 동기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 있어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16:24) 여기서 십자가는 자기 죽음이에요. 이 제자들은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지금 로마 타도가 이들이 갖고 있었던 희망 사항 아니었습니까?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자기들의 동기, 기준, 체질 그대로 갖고 따라왔던 거예요. 베드로가 신앙 고백했잖아요. 그 신앙 고백한 다음에 막바로 예수님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니까 항변하면서 예수님이 죽지 말라고 말렸다 이렇게 나와요. 근데 이게 예수님을 위해서 만류한 겁니까? 아니에요. 자기 동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한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위하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자기 내면의 동기는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쫓아가서 로마를 예수님이 무너뜨리고 나라를 세울 때 우리도 한 자리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동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제자로 서려고 한다면은 반드시 그 인생의 뒤집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게 돼야 참 신앙생활이에요. 일반 종교에서는 우리 양심적인 죄만 지적하잖아요. 기독교에서는 양심적인 죄만 지적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포지션을 떠난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은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주인 되고 자기 영광 받으려고 하고 자기가 자기 기준의 의를 세우면서 딴 사람은 판단 비판 정죄 심판까지 다 해버려요. 이게 뭐가 잘못됐는지 잘 몰라요.

 

이런 걸 모르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내면 그 종교 신앙이에요. 인생 180도 전환과 24 체질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여러분을 위해서 제일 많이 기도했던 게 이거예요. “여러분의 주객이 바뀌고 진짜 체질이 바뀌어서 24 제자 되게 해주옵소서그래야 여러분 속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계속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삶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 사람마다 이것이 되어지는 시간표는 달라요. 그렇지만 공통점은 주님이 절대 이정표를 두고 여러분과 저를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절대 이정표를 딱 놓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우리가 서는 것을 골인 지점으로 삼아놓으시고 그 앞에서 우리가 흠 없고 점 없고 주름 잡힌 것이 없고 그리스도의 회복된 형상이 되고 그러면서 그 인생 사명과 천명을 완수하다가 그 앞에 서도록 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삶을 맛보게 될 때, 주님이 내 인생을 참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이런 게 계속 확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이 전부 다 자기 의와 자기 교만을 갖고 있거든요. 근데 진짜 겸손한 사람이 돼요. 내가 얼마만큼 뒤틀려져 있고 왜곡된 인생을 살았는지를 알게 되니까 이제 자기 의가 안 남아요. 그래도 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능력 있게 쓰이면 본성은 여전히 살아서 교만이 또 올라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를 완전히 내려놓도록 만들기를 원하세요.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기를 원하시냐 하면 이제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게 되는데, 은혜받을수록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인생으로 들어가게 하셔요. 그게 뭐예요? 그리스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잖아요. 자기가 섬김을 받지 않고 은혜받을수록 오히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쪽으로 들어가게 만드셔요.

목사님들이 성공했다가 넘어지는 이유는 뭘까요? 그런 목사님들 많거든요. 진짜 큰 목회를 하시고 그랬는데 말년에 퇴직금 때문에 싸우고, “뭐 너무 돈을 좋아하신다니뭐 이런 소리 들리거든요. 왜 그래요? 쓰이긴 쓰였는데 자기를 그만큼 못 본 거예요. 목사님들도 주님이 보여주셔야 보여요. 이게 아까 얘기했잖아요. 우리가 성령으로 행한 것 외에는 전부 다 인본주의 체질이에요. 이번에 원단 메시지가 뭐예요? 아침, , 밤 기도를 최고의 축복이다. 최대의 축복이다. 최대의 시간이다이런 표현을 써가시면서 메시지를 했단 말이에요.

근데 사실 이런 부분에 눈이 열려야 실제 기도 삶이 들어갑니다. 정말 올해 진정한 전환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성실로 예수님 열심히 믿을 수 있어요. 자기 근면성으로 또 남 앞에 보이려고 할 수도 있어요. 또 어떤 일에 대한 성취욕으로 열심 낼 수도 있어요. 그런 게 다 아니다 이 말이에요.

 

3. 오늘 본문

절대 이정표를 따라갔던 바울이 결승점을 앞두고 아들 같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이에요.

 

디모데는 이때 어디서 목회하고 있었다고요?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다시 체포돼서 투옥됐다는 얘기를 들은 거예요. 이제 중죄인으로 사형 당할 상황이다. 이 소식이 들리는 거예요. 그때 디모데가 힘이 났겠어요? 의기소침했겠어요? 영적 상태 안 좋으면 쉽게 의기소침 돼요. 여러분도 뭐가 막 될 때는 막 힘이 나잖아요. 근데 뭐가 잘 안되면 의기소침해지잖아요. 똑같아요. 본성은 똑같아요.

바울 사도는 편지를 쓰면서 이런 의기소침하고 있는 디모데를 격려할 필요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먼저 67절의 말씀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니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뭘 생각하게 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그랬어요. 이게 나의 안수함으로 니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한다그랬어요. 안수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뭘까요? 목회 은사예요. 디모데에게 메시지 은사, 가르치는 은사, 교회를 다스리는 은사 이런 게 있어야 되잖아요. 이런 것들을 다시 너에게 불 듯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너에게 생각나게 하노니,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라는 거에요.

 

여러분도 의기소침하기 쉬워요. 환경 보면서 사람 보면서 낙심하기 쉽다고요. 근데 여러분 절대 성령님은 그런 마음을 안 줘요. 성령님은 어떤 마음을 줘요? 능력과 사랑과 절를 줘요. 절제는 자기 컨트롤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지금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먼저 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얘기하는데 여러분 본성과 성향에서 올라오는 느낌, 감정이 있어요. 그거랑 성령님이 주시는 거랑 분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성향이 약한 사람은 사실 대범하지 않잖아요. 사람 앞에 서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잖아요. 근데 그게 본성 플러스 성향이란 말이에요.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님은 굉장히 담대함을 줄 수 있어요. 성령님은 능력을 줘요. 사랑하는 마음을 줘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 속에서 자기 본성과 분리되면서 성령님이 나를 통치하시면 담력을 얻고 오히려 주님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 8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지금 사도 바울이 중죄인 취급받고 사형수로 간주 되는 상황에 있잖아요. 사실 로마 사회는 명예를 중요시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사람은 되게 위신 따지잖아요. 체면 명예 이런 거 굉장히 예민하잖아요. 지금 바울이 중죄인 취급받는 거는 부끄러워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말이에요. 근데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히려 네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계속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하다가 사람 의식 많이 하잖아요. 부끄러움 오잖아요. 근데 여기에 대입하면 어떤 말씀이에요?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히려 여러분에게도 복음과 함께 고난받으라는 거야. 딴 사람이 뭐라 그러는 거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사실 불쌍한 사람이지 내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공대에 가서 제가 복음 전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항상 음료수를 하나 사서 주면서 말을 붙이는데, “됐어요하는 사람 있어요.

안 먹어요. “이거 몸에 그냥 주는 거야.”이상하게 딱 째려봐요. 그러면서 그냥 탁 가버리거든요. 그러면 , 저게 뭐야?” 그런 생각 들잖아요. 근데 제가 어떤 생각 갖는 줄 아세요? 하나님. “이 친구는 오늘 아니네요.”제가 이렇게 생각을 한다니까요. “오늘 하나님이 예배한 사람 아닙니다. 오히려 예비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확인시켜줘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만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만나지 말아야 될 사람을 만나지 말게 해 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안 만나게 하면 나 오늘 집에 그냥 갑니다. 하나님이 안 만나게 하시면 나 오늘 가요.”근데 하나님이 항상 만나게 하시는 거예요. 이런 게 전부 다 영의 생각이잖아요? 내 생각이 안 잡히는 거잖아요?

 

9~11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오.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일단 거기까지 보면 뭐라고 돼 있어요?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대요. 우리를 소명하신 거예요. 소명 찬양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소명하셨는데 그 소명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조건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오.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이게 영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신 거죠.

 

그래서 10절에 보면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뭐가 나타났을까요? 구원이 나타난 거예요.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난 거예요.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이제 우리가 영벌이 아니라 영생을 누리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복음으로 나타내신 거거든요.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지금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 말하는 것처럼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자기가 영원한 생명과 유업을 얻게 된다는 확신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노라그랬는데 이게 뭐예요? 정체성! 전도자라는 정체성이죠. 또 이 속에는 삶의 방향이 들어 있어요.

그렇죠. 하나님의 소원에 자기 인생에 딱 방향 맞추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사명이 분명히 여기 들어가 있어요. 여러분, 이 세 가지가 나와야 돼요. 내가 적당히 살다가 갈 사람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면서 세상 살리는 전도자다! 하는 정체성이 나와야 돼요. 또 한 가지는 뭐예요? 하나님 나라 이게 나의 인생 방향이 돼야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럼 사명이 뭐예요? 불신자처럼 여러분이 성공하는 게 사명입니까? 아니죠. 여러분에게 사명이 있잖아요. 여러분의 주신 직분과 여러분의 포지션에 따라서 여러분은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서 세상 살리는 그게 사명이잖아요. 전도자의 삶과 하나님의 나라 통치 실현시키는 게 사명 아닙니까?

 

11~12절 같이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여기 중요한 말씀이 있어요.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거예요. 이유는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는 거예요. 내가 믿는 자가 누구예요? 하나님 의 그리스도잖아요? 그분을 내가 너무나 잘 안다는 거예요. 그분의 신실하심, 그분의 전능하심! 이런 걸 내가 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절대 이정표를 따라 지금까지 인도받았어요. 주님이 어떻게 자기를 쓰셨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사실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 벌써 거기서 결박이 기다린다는 예언을 받았잖아요.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 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에서 헌금 거둔 거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올라온다고요. 근데 자꾸 예언을 하잖아요. 올라가지 말라고 환란이 기다린다고 그때 여러분 아시잖아요. 20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 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벌써 이미 그때 순교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갔던 거예요. 근데 체포 당해서 2년 동안 가이샤라에서 구류 당하다가 그러고 로마로 가잖아요. 로마에 배 타고 가다가 풍랑 만났을 때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는 그 말씀하잖아요. 주님이 직접 옆에 서서 말씀하잖아요.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이 배에 있는 사람을 너에게 다 주었노라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의 인생 전체가 정말 주님께 잡혀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리고 정말 주님이 나타내시는 기적과 표적과 그 능력을 수없이 체험했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일반 믿음이 아니거든요. 지금 완숙한 믿음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여러분도 이런 고백할 수 있어야 되겠죠. 내가 믿는 자를 나는 안다 얼마나 신실한지, 얼마나 능력이 있으신지. 그분에게 내 인생을 얼마든지 걸 수 있는 분인지를 내가 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뭘 의탁했을까요?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런 고백하잖아요. 자기의 잡힌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 그러잖아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의의 면류관을 예비되어 있다는 거를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하고 순교를 잘 감당하도록 의탁한 거예요.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이 지키실 줄을 확신한 거예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미 빌립보서에서 여러 번 이런 고백을 해요. 120~21절 이런 고백을 해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이라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벌써 빌립보서에서 이런 고백을 하거든요. 또 이런 고백도 있죠. 2:17~18, “만일 너희 믿음의 재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리라전제로 드린다는 거 설명 많이 했잖아요. 제물 위에 마지막으로 포도주 붓는 거를 전제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자기 순교의 피를 바치겠다는 얘기예요. 근데 기뻐하래요. 나와 함께 기뻐하래요. 미쳤지, 그냥 미친 게 아니죠.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거예요. 고난이 그것을 빼앗지 못했어요. 본성으로 하면 난리 치겠죠.

하나님 제발 좀 안 죽게 해주세요. 이거 기도했겠죠.

 

마지막으로 빌 3:10~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례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표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실 사도 바울은 이즈음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기를 원했던 거예요. 전도자로서 최고의 삶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겁니다.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180도 인생 전환이 필요합니다. 정말 신앙생활에 그 전환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정체성과 사명과 방향성을 확실히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절대 이정표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게 아침, , 밤 기도입니다. 그거 안 되는 사람은 또 안 돼죠. 이게요. 여러분이 계속 그리스도의 힘입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역량이 길러져야 되는 거죠. 올해 저와 이 삶을 삽시다.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봅시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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