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승리할 수 있는 이유 (벧전 1:3~7)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셔서 오늘 밤 비행기로 선교 사역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전 선교사님이 여러분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화목교회 성도들이 생각나고 감사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빌립보 교회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가장 힘들 때마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던 빌립보 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선교사님들께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타까운 소식은, 성민 형제가 지난주 갑작스러운 일로 고향인 영주에 내려갔습니다. 미장원을 하며 혼자 살고 계신 어머니께서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갑상선 암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는데 이번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성민이가 가정에 대한 부분에 염려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배경이 있겠지요. 지금 어머니가 혼자 계시기 때문에 성민이가 곁에서 돌봐야 해서, 이번 선교에 함께 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본인도 무척 가고 싶어 했는데 참 애석합니다. 여러분, 이런 일 속에서도 성민이가 흔들리지 않고 잘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장로님, 내년에는 꼭 같이 선교 현장에 갑시다. 지금 시간이 있으니, 기도하다가 현장에 같이 다녀오면 굉장히 유익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도 모두 가능합니다.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집중 기도로 동역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사단과의 치열한 영적 싸움입니다.
이번 사역에서는 보홀섬 목회자와 사역자 대상으로 제가 이틀간 1차 합숙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 단독으로 강의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삼중 통역을 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영성이가 영어로 통역하면, 그 영어를 듣고 현지 언어로 또 한 번 통역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 배정과 메시지의 정확도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의 입장에서는 정확한 영적 메시지와 복음 메시지가 전달되어 제자들이 세워지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겠습니까? 사단은 지금도 교회가 전도를 못 하게 막습니다. 교회에 전도할 수 있는 제자가 세워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오직 자기 하나만 믿고, 자기 현실의 응답만 받는 것에만 신경 쓰기를 원합니다. 물론 현실의 응답을 구하는 것도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성도들이 딱 그 수준의 응답에만 머물기를 원합니다. 분명히 이 세상의 임금은 사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나안을 정복하지 않으면, 도리어 우리가 정복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못하니까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영적으로 보면,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세상에서 아무 일 없이 편안하고, 일 잘 풀리고, 자식들 잘 되게 해달라는 식으로만 기도합니다. 그렇게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영적인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번 집중 훈련의 목표는 여러분 각자가 개인 전도와 다락방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주 한 번씩 현장에 가셔야 합니다. 현장이 없으면 이 훈련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현장에 들어가면 영적 싸움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단은 여러분 육신의 본성을 타고 연약해지도록 방해하여 전도를 막습니다. 그 현장의 세력을 느끼면서 영적인 힘으로 꺾고 전도할 수 있다면, 영적 성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매주 한 번씩 꼭 현장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실제 현장에서 사단의 세력과 창세기 3장, 6장, 11장의 본성에지지 말고 이기는 전도자로 세움 받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성도가 승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본질을 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말 '전도'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실현하고 청지기의 삶을 사는 제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으로 사람의 운명부터 바꿔야 합니다. 전도란 단순히 생명을 얻는 것(영접)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양육되고 제자화 되는 과정 전체를 포함합니다. 시급히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아야 하고, 그들이 복음의 말씀으로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1. 베드로 전서의 시대 상황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당시가 AD 62~63년경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기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머물며 이 서신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로마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났을 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는 말씀을 듣습니다(행 27:24). 이때 가이사가 바로 로마 황제 네로였습니다. 베드로 전서를 썼을 당시가 네로 황제 통치 중반을 조금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64년에 로마 대화재가 일어났고, 네로는 그 방화범이 기독교인이라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바울의 1차 투옥이 AD 60~62년경이었습니다. 그는 풀려나 스페인까지 선교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리고 2차 투옥은 로마 화재 이후 기독교 지도자로 체포당했을 때입니다. 이 기간(64~67년경)에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다 순교하게 됩니다. 네로 황제가 54년부터 68년까지 통치했고, 로마 대화재가 64년에 났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박해 직전의 상황 속에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베드로 전서를 쓴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전역에는 이미 기독교인을 향한 혐오가 퍼져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처음에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했지만, 점점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전통과 질서에 맞지 않는 불온한 종교로 간주했습니다. 이것이 핍박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신전의 우상숭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신들을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또 기독교인들이 모여 성찬식을 하는 것을 두고, "저들은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이다"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말씀도 왜곡시켜 "저들은 근친상간한다"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러한 오해들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고발당하고 괴롭힘을 겪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나"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배경입니다.
2, 성도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극심한 핍박과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 과연 성도들은 어떻게 위축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베드로 전·후서를 보는 핵심 포인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가 승리할 수 있는 이유가 3절부터 5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1) 첫 번째 이유는 3절에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는 환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이 편지의 본론을 시작합니다. 성도가 시련을 극복하는 첫 번째 조건은 '확신 있는 믿음'입니다. 이 확신 있으면 자연스럽게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직접 목격했고,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강력한 성령 체험을 했으며, 교회 지도자로서 수많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니 고난 중에서도 찬송하며 서신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지금 내게 어떤 축복을 누리게 하시는지 매일매일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깊이 기도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내 영혼에 리마인드(상기) 시켜주셔서 확신이 임하게 하십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확신 있는 믿음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복음의 핵심을 삶에서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려면 복음을 머리가 아닌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 있는 인생으로 삼으셨으며,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2) 이 '산 소망'에 대한 설명이 4절에 나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것은 세상의 유한한 것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에 간직해 두신 산 소망입니다. 이어서 5절을 보면,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에 방향 맞추어 살게 되면, 그 능력으로 보호받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환란이나 문제가 터졌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기회가 됩니다. 여기서 "말세에 얻기로 한 구원"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단순히 죽어서 우리 영혼만 가는 '천당' 정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이 땅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로서 세상의 체질이 녹아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될 것을 말씀합니다. 거기에 우리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간증한 '제임스 투어'라는 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나노(Nano) 과학자입니다. 실증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최고 권위의 과학자이면서도, 영적인 사실에 대한 깊은 체험과 확신을 가진 전도자입니다. 그는 과학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과학을 어설프게 알면 하나님을 부정하지만, 나노의 미시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그 정교함에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는 학계에서 굳건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다 보니 진화론자나 무신론자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당하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낙심하고 눌리겠지만, 그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조롱을 당하면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주님을 전하다 조롱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제임스 투어에게 축복을 더 부어줘야겠다. 누군가 그를 내 이름으로 비난했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상을 더 줄 것이다.'" 그는 이것이 자기 인생의 정체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영적 메시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현상이나 겉으로 드러난, 문제의 결과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의 영적 원인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이며 본질적인 메시지가 여러분의 신앙을 올바로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세상을 이기는 것은 돈도, 배경도, 권력도 아닌 오직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세상의 환란이 닥쳐오면, 하나님은 비상적인 사역을 하십니다.
3) 우리는 잠깐 근심할 수 있습니다.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성도도 육신을 입고 있기에 시험이 오면 본성적으로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환란 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오기도 합니다. 전도할 때도 마음의 부담과 눌림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안의 성령께서 이런 육신의 본성을 극복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본성은 육신의 느낌과 생각을 갖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느낌과 영의 생각'을 주십니다. 영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이 영이 살아나고 감동을 받으며 확신이 차오르면, 그 사람의 전 인격이 살아납니다. 육신의 본성은 환경과 사단의 공격에 쉽게 좌우되지만, 우리 안의 영은 성령님이 직접 교감하시는 통로입니다. 성령께서 그 영에 힘을 주시고, 확신과 평안, 충만함을 주실 때 우리는 사단도 이기고 어떤 현실 문제도 이기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육신의 본성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영적으로 분별하게 하시고 극복하게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대박해는 네로 황제 시절인 6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약 2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열 명의 황제 중 일곱 명은 부분적인 핍박을 가했지만, 나머지 황제들은 제국 전체에 걸쳐 가혹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씨가 완전히 말라버려야 맞지 않습니까? 하지만 역사는 달랐습니다. 이 250년 동안 기독교는 괄목할 만한 대부흥을 이루었습니다.
통계를 보십시오. AD 40년경 로마 제국 내 기독교인은 약 1천 명 미만(인구 대비 0.0017%)이었습니다. 그러나 100년경에는 약 7,500명이 되었고, 200년경에는 약 22만 명이 되었습니다. 250년경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고, 300년경에는 무려 600만 명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인구가 약 6천만 명이었는데, 기독교인이 그 10%를 넘어선 것입니다. 기독교가 매 10년마다 약 40%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께서 박해를 압도하고 능가하는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증거입니다. 다음 주에는 기독교가 이런 환란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흥할 수 있었는지 그 사례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삼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와도 이제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는 주님의 문제입니다. 질병도 주님의 문제이고, 경제 어려움도 주님의 문제이며, 환란과 박해도 주님의 문제입니다. 절대 내 인본주의적인 체질로 들어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어떤 환란과 박해 앞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내가 육신의 본성으로 돌아가서 대응하려 하면 공포에 질리게 됩니다. 주님의 성령님은 공포에 질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믿음입니다.
4) 왜 베드로가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라는 말을 썼을까요?
현실적으로는 꽤 긴 고난의 시간이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길어도 '잠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고난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죽는 그 순간만 힘들 뿐 곧바로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잠깐 근심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육신의 본성을 뒤집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창세기 3장의 결과를 뒤집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안에 육신의 본성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나의 전 인격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은 각종 문제에 승리와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환란과 박해, 죽임을 당하는 중에도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두 종류의 믿음이 다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이 다 가능합니다.
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을 얻기 위해 뜨거운 불로 제련하듯,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합니다. 사실 순금조차도 이 땅의 물질이기에 언젠가는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환란 속에서 연단 된 믿음은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성도에게 이런 불같은 시험을 허락하실까요?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 심판의 근거가 되고, 성도에게는 축복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성도가 겪는 어떤 고난도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거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선용 될 축복의 통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엄청난 것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 성도 안의 영적인 불순물들이 철저히 제거됩니다. 세상을 즐기고 따라가던 세상의 욕망이 제거됩니다. 내가 이만큼 교회를 세우고 헌신했다는 자기 의와 교만도 시련 앞에서는 다 날아가 버립니다. 신앙의 불순물들이 제거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에 집착하던 마음, 내 힘으로 살아보려던 인본주의 체질도 제거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령, 오직 하나님 나라"만 남게 됩니다. 그동안 머리로만 들었던 메시지가 성령의 역사로 심령적인 것이 됩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본질에 대해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너희 소속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핍박 속에서 오히려 언약을 더욱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을 향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세상의 본질을 영적인 눈으로, 전도자의 눈으로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창세기 3장(나 중심), 6장(물질 중심), 11장(성공 중심)의 본질을 그대로 좇아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자나 실패자나, 양심가나 범죄자나 영적 근본 문제는 똑같습니다. 오직 안전에 대한 욕구와 명예, 성공이라는 기본 욕구를 위해 눈앞의 현실적 이익만을 쫓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이 이익을 중심으로 집단화되고 국가화될 때, 그 이익에 반대되는 대상을 철저히 핍박합니다. 그런데 이익이 눈앞에 보여도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기독교가 자신들의 집단 이익에 위배 되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시대마다 있어 왔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계획과 절대 목적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절대 목표'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베드로 전서 시대와 같은 환란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육신적인 평안함에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세상의 영적 본질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의 소원에 내 삶의 방향을 맞추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은 사명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방향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세계 복음화'입니다. 앞으로 환란의 시대가 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사명은 변함없는 '전도'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참된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와 그 영원한 운명이 바뀌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절대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전도를 정말 그 정도로 가치 있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재산보다 전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목적도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애착을 가지는 것과 전도의 비중을 정직하게 비교해 보십시오. 전도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시간이 많고 여유 있는 사람만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직장에서 '전도자'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로 돈을 벌고, 사람을 살리고 제자로 길러내는 일에 헌신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소원과 내 인생의 방향이 맞게 됩니다. 개인적인 응답도 받아야 하지만, 내게 '사람을 구원하고 길러내는 영적 역량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사람 관계에서 조금만 부딪혀도 상처받고 삐칩니다. 자기 명예와 자존심이 상했다고 교회를 흔듭니다. 그것은 전도자의 마인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
성도가 환란 속에서도 당당히 승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듭난 자의 굳건한 믿음과 하늘에 쌓아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련 속에서도 성령께서 완벽하게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20차 집중 훈련 기도 제목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1.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대로, 삶의 주객과 체질을 180도 바꾸십시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소원에 내 삶의 방향을 맞추어 청지기, 하나님 나라 통치 실현자, 전도자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3. 지속할 현장, 지속할 방법, 지속할 시간을 정하여, 지속할 전도 제자로 세워지기 바랍니다.
'본교회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년 10월 18일 주일예베 -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하는 복음 (벧전 1:8~12) (0) | 2026.10.18 |
|---|---|
| 2026년 10월 7일 수요예배 -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2 (벧전 1:1~2) (1) | 2026.10.07 |
| 2026년 10월 4일 주일예배 -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벧전1:1~2) (0) | 2026.10.04 |
| 2026년 9월 30일 수요예배 - 창세기 3장의 결과를 뒤집어라2 (야고보서 5:12~20) (0) | 2026.09.30 |
| 2026년 9월 27일 주일예배 - 창 3장의 결과를 뒤집어라 (야고보서 5:12~20) (0) | 2026.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