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참된 전환(왕하6:24~7:7,15~20)
우리는 계속 삶의 참된 전환이 되어야 하겠다. 그동안 의식도 못하고 창3,6,11장의 나로 반응하며 살 때가 참 많았다. 거의 내 생각으로 산다. 이걸 그리스도로, 성령으로 반응하는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로 반응하는 것이 사탄의 함정에 빠진 것이기 때문이다. 3,6,11장에 빠진 나는 나 중심일 수 밖에 없고 육신중심일 수 밖에 없고 보이는 것 중심일 수 밖에 없다. 이걸 분별못하고 육신의 체질대로 우리는 오랫동안 살아왔다. 사탄이 인간을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빠뜨려 놓고 그러면서도 나를 높이고 싶은 동기를 갖고 살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3,6,11장의 나로 반응하는 것에서 모든 문제가 일어난다. 염려하고 갈등하고 마음 상하고 상처받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다 나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게 어느날 성령으로 인식이 되면 그 때부터 갈2:20의 참된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걸 먼저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몇 주째 갑절의 성령을 받은 엘리사가 행한 기적을 보고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겪은 최악의 상황이 나온다. 아람군대에 의해 사마리아성이 포위되었는데 자식까지 잡아 먹는 일이 벌어졌다. 신명기에서 경고한 최악의 저주 상태에 빠진 것이다.(신28:53~55) 이것이 우연이 생긴 일이겠는가? 이때 상황은 이스라엘이 완전 영적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존폐의 귀로에 선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 미스바에서 했던 것처럼 왕이든 백성이든 전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감각을 잃어버리면 그런 일도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시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그 일에 엘리사가 쓰임받는 것이다.
1. 원인을 모르는 이스라엘 왕
1) 엘리사에게 탓을 돌린다.
이스라엘 왕은 이 저주의 원인을 모른다. 오히려 아람군대를 살려 보내 주었던 엘리사를 미워하고 잡아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었다. 엘리사는 자기를 잡으려 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기근에서 구원해 주실 것도 알았던 것이였다. 내일 이 맘 때면 이 기근이 해결된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였다. 한 장관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믿지 아니하고 이런 말을 했다. 7:2절에 보면‘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그 날 저녁에 막바로 역사하셨다. 아람군대가 큰 군대 소리를 듣고 착각해서 다 도망가버렸다. 문둥병자들이 이 사실을 발견하고 사마리아성에 알렸다. 그래서 굶어 죽지 않게 되었고 엘리사의 말이 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신앙의 말을 한 그 군대장관은 먹지도 못하고 성문에서 백성들에 의해 밟혀 죽어 버렸다.
2) 말의 중요성을 잘 알아야 한다.
말이 씨가 된다. 말은 씨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 말은 생각하는 것을 확증하는 꼴이 된다. 그 말이 자기에게 돌아온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불신앙한 장관의 말이 하나님께 들린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4가지 요소인 믿음과 생각과 꿈과 말은 창조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왜냐면 이것이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4가지 요소는 성령의 통치를 받을 수도 있고 악령의 통치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이나 고백을 항상 바로 해야 한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침략을 해 왔다. 그때 앗수르 왕의 군대장관이 와서 이런 말을 전달한다. 어느 신이 자기 백성을 앗수르 손에서 건져냈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하는데 여호와인들 앗수르왕의 손에서 건져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의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본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왕하19:7)하셨다. 그 말씀대로 성취되었다. 말의 중요성을 잘 알아야 하는 거다. 지금 이스라엘은 최고 저주 상황이였다고 했다. 신명기 저주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여호수아 때 축복이 어디로 갔는가? 그 능력의 하나님은 돌아가셨는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문제는 전혀 영적으로 살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이 문제다. 참된 전환이 안되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이 되려면 참된 전환이 계속 되어야 한다.
2. 우리는 어떻게 참된 전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1) 그리스도께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성도라도 이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왜냐?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서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참 이스라엘로, 언약의 중보자로, 참 기름부음 받은 자로, 교회의 머리로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 속에 성령의 통치를 통해 영적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되시는 것이다. 믿음과 순종으로 집중하면 우리를 제자 삼으시고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동참시키신다. 전 인류 가운데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면 재림주로 오셔서 이 땅에 장소적으로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이다. 이 일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이 일을 쉬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2) 인생 방향을 하나님 소원에 맞추고 24시 우리 관심과 생각을 주님께 맞추라는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로 결론 안나면 안되는 거다. 결론나서 방향 맞추면 우리 모든 문제, 모든 일, 모든 사역은 우리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고민해서 내 머리로, 내 방법으로 안깐힘 써서 이룰 일이 아닌 것이다. 주님이 주인, 책임자 되셔서 아버지 소원을 위해 성령으로 우리 속에서 역사해 주실 일이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지혜와 통찰력과 판단력과 아이디어와 말씀의 영감과 감동을 주신다. 주의 사랑의 마음과 은사와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 속에 역사하셔서 내 일이 아버지 소원을 이루시거나 그것의 일환이 되게 하신다. 더 그리스도께 뿌리내리는 기회로 선용하기도 하신다. 그러니 모든 문제, 일, 사역이 내가 고민할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치유, 일치유받고 여러분의 동기까지 주님의 동기로 바꾼다면 따봉이다. 모든 사람을 아버지 관점으로 보고 중보기도 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 소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손발로 쓰임받게 된다.
3) 그리스도는 완전한 방법과 충분한 방법인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가나안 정복을 수1장의 언약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 주셨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정복케 해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신다. 지금 이 세상의 문제의 원인은 육신의 문제, 물질의 문제, 현상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결과적 문제다. 진정한 원인은 영적문제요 사탄이 원인이다. 그래서 요일3:8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하심이라 했다. 행10:38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게 하셨음이라‘ 하셨다. 주님만이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문제에 빠진 인간 구원이 가능하시다. 이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시다. 그 일에 우리를 쓰고자 부르셨기 때문에 참된 전환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주님의 대행자로 쓰시는 것이다. 3,6,11장의 내가 주인되고 나로 반응하고 내 본성으로 반응하는 체질을 바꾸라는 것이다. 24시 믿음과 순종으로 행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구원역사에 저와 여러분을 쓰시게 된다. 성경적 전도방법으로 제자 삼고 재생산해서 전 인류 구원역사 이루시는 일에 손발로 쓰임받게 되는 것이다.
결론
오늘 이스라엘의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 드렸다. 거기에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대행자로 쓰임받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이 씨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한 장관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했다. 그는 그 불신앙의 말로 인해 밟혀 죽었다. 말이 중요하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 정체성과 사명에 걸맞는 말을 하고 고백을 해야 한다. 여러분은 현장 파수꾼이요, 영적 대사요, 영적 치유 의사다. 여러분 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일로 주님이 역사해 주실 일이다. 그러니 참된 전환을 하라는 것이다. 지난 주 아가페 사랑의 실천이 안되는 4가지 이유를 말씀 드렸다. 나로 반응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반응하는 체질이 되면 이것도 되어진다. 서론에 염려하고 갈등하고 마음 상하고 상처받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다 나로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어느날 성령으로 인식이 되면 그 때부터 갈2:20의 참된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고 했다. 저를 전환시켜 주시는 주님이 여러분도 날마다 전환시켜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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