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사살 왕의 교만과 멸망(단5:1~7,18~30)
엡5:16~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되어있다.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를 가진 자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 지난 주에 느브갓네살 왕이 어리석어 자기를 과시하다가 하루 아침에 짐승처럼 되는 병에 걸렸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가 언제 치유되었는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 알게 되었을 때 치유되었다. 사람의 잘남에 있지 않다는 것이였다. 세상 권력자들, 지도자들은 자기가 성공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근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신다. 내가 옛적부터 그렇게 정했고 너를 세워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고 하신다. 이걸 알면 가치관이 달라진다. 우리도 자기에게 주신 재능과 영육의 복을 흘러 보내라고 주신 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돈 버는 목적, 일하는 목적, 산업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걸 모르면 안된다. 예를들어 어떤 개인이나 교회에 영육의 축복을 주셨다면 그 이유는 그 개인과 교회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이웃과 지역과 나라를 위해 허락하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런 걸 전혀 몰랐던 벨사살 왕의 교만과 멸망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다.
1. 배경과 교훈
1) 그는 느브갓네살 왕의 아들이고 되어있는데 사실은 그의 후손이다.
그는 선왕 느브갓네살 왕이 교만해서 7년간이나 짐승처럼 되는 병에 걸렸다가 나중에 정신이 돌아오고 복권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지 들었다. 그런데도 그건 남의 얘기고 그는 잔치를 배설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뺏어온 그릇에 술을 따라 먹으면서 자기들의 신들을 찬양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인 것이다. 그 때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다. 이 왕이 얼마나 놀랐는지 안색이 변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잔치하는데 맞은 편 석회벽에 손가락이 나와 글을 쓰는 것이였다. 4~6절을 보자. 다니엘을 불러 그걸 해석하게 했다. 그 의미가 뭐였는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람이 보여(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에 부족하여) 왕의 나라가 메데바사 사람에게 나누어준 바 되었다는 뜻이다.(25~28) 이 해석을 해준 그 날 밤에 바로 메데바사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바벨론은 멸망하고 말았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주신다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2) 교훈
그 당시 바벨론의 최고신은 마르둑이였다. 마르둑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마르둑이 왕들을 저울에 달아 보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한 말처럼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22~23절) 이것은 포로민으로 고생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주시는 메시지였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에게 져서 그들이 포로로 잡혀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과는 비교가 안되는 창조주가 맞으시다는 것이다. 벨사살 왕을 끝으로 바벨론 제국은 멸망당해 버렸다. 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왕이 누군가? 바로 메데 바사의 고레스 왕인 것이다. 그 때 유대인들은 고레스 왕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였다. 다니엘은 당시 80세가 넘는 고령이었다.
2. 절대 주권 신앙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하겠는가?
1) 나는 이런 하나님을 영으로 정말 얼마나 믿는가를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가 세상 역사와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그것을 누구에게 주기도 하시고 뺏기도 하시고국가나 개인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 인생의 가치관은 정말로 달라진다. 돈 때문에 싸우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사람과 시시비비하지 않게 된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게 된다. 결국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분의 뜻을 바로 행하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주관하고 계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설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각 행한대로 받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고후5:10) 그래서 우리는 3,6,11장의 본성과 가치관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광주사태로 인해 광주 사람들은 많은 상처와 한을 갖게 되었다. 만약 이런 절대 주권의 하나님을 모르면 광주사태를 일으킨 사람에게 대한 미움과 증오와 복수심을 평생 갖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창3장의 인간 본성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주권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나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을 성령님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실제 자신이 직접적인 피해와 고통을 당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것이 되었다.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좌익 사상에 빠진 청년을 사형당할 위기에서 구해 주었고 자기 양아들 삼았다.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성령께서 가능케 하신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전기를 보면 손목사님은 그 당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이미 준비된 사람이였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을 죽인 인생들을 자기 아들 삼아주신 것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육신의 본성에 빠져 또 다른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반응케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나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사는 성도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갖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 불신자는 지옥 멸망을 위한 심판대에 서게 된다. 계20:11절부터 보면 사도요한이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서 그 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2) 구약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공의로운 나라,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라 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 통치를 자기들의 삶의 공동체에 실현시킬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에는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고 되어있다. 율법에는 안식년, 희년제도를 비롯해서 삼년에 한 번은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위해서 십일조를 낼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배경과 능력을 믿으면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못믿으니 불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바로 믿고 그의 계명을 실천했다면 공의로운 나라, 거룩한 나라 되면서 보좌배경과 원천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전쟁을 할 수 있으니 대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제사장 나라 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받은 축복을 다 놓치고 전쟁나고 포로되고 유랑민족이 된 것이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최선이 모든 삶을 나로 반응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반응하는 체질 만드는 것이다. 모든 걸 기회로 삼는 것이다. 여러분 현실 한 건, 한 건에 적용 가능하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전에 시급히 자기 백성들을 전인류 가운데 건져내어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리스도께 이 일을 맡기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만 아니라 마음, 생각, 정신, 육신, 가정생활, 사회생활 다 회복하신다. 3,9,3의 축복을 실제 누릴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3,9,3의 3만 제대로 누리면 나머지는 따라 온다. 우리의 창3장의 동기에 안잡혀 살아도 된다. 안전의 동기, 자존심에 대한 동기에 잡히지 않으면 많은 부분에 승리한다. 모든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하나님 소원의 일꾼이 될 수 있다. 영육의 축복을 흘러 보낼 수 있다.
결론
벨사살 왕은 하나님이 그를 제국의 왕으로 세우시고 복을 주셨음에도 전혀 그걸 모르고 산 불신 이방 왕이였다. 그러니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여 하나님이 그 나라를 메데와 바사에게 넘겨 주신 것이였다. 개인의 종말, 국가의 종말, 역사종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니엘서의 나타난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모든 삶을 나로 반응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반응하는 체질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영육의 축복을 흘러 보내는 사람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3,9,3의 축복으로 플랫폼과 파수망대와 안테나의 삶을 살 자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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