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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2년10월5일 성경연구 -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by 현상금 2022. 10. 5.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잇는 중간시대 400여년 동안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알렉산더가 B.C.323년에 죽자 헬라제국은 그의 부하 4명에 의해 분할됐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프톨레미 왕조와 연이어 셀루커스 왕조에 의해 약 250년간 지배를 받았다.

안티오커스 3세에 이은 안티오커스 4(B.C. 175~163)가 통치하던 때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 안티오커스 4세는 자신을에피파네스라고 부르게 했다. B.C.168년에 안티오커스 4세는 애굽을 공격했지만 대패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어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신에게 돼지머리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이것이 마카비 혁명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당시 제사장 맛다디아는 헬라식 제사 요구에 저항하여 셀류쿠스 왕조의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저항운동의 중심에는 하시딤이란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풀고 구원의 날을 내려주도록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맛다디아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B.C l64년에 더렵혀진 성전을 3년만에 탈환하여 정화시켰다. 이것을 가리켜 마카비 혁명 이라고 한다. 성전을 정화한 뒤 8일간의 봉헌 축제를 지냈는데 이것을 빛의 축제 하누카(수전절)라고 한다.

 

유다 마카비가 전사한 후 그를 계승한 막내 5째 요나단이 최고 실권을 가지는 대제사장이 되었지만(B.C.153) 그도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살해되었다.(B.C.142) 요나단이 죽은 후 둘째 시몬은 마침내 B.C.142년에는 유대 지역에 었던 시리아군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실질적인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고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맛다디아의 아버지 이름에서 유래) 맛다디아의 둘째 시몬이 독립 후 B.C 63년에 로마가 점령할 때까지(B.C.142-63년 약 80) 마카비의 후손들이 다스렸는데 이를 하스몬 왕조라고 부른다.

 

하스몬 왕조는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1세 때 전성기를 누렸다. 정치적 자유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시딤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이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만을 중요시하는 힐카누스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종교는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힐카누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바리새파이다. 원래 대제사장 역할은 제사장 가문들이 반차를 따라 맡는데, 하스몬 왕가는 마카비 후손들이 계속 대제사장 역할을 했다. 힐카누스의 이런 정책을 지지한 무리가 바로 사두개파였다. 이래서 힐카누스의 통치에 찬성하는 사두개파와 반대하는 바리새파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겼다. 바리새파는 후대에 탈무드로 대변되는 구전 율법과 성문율법인 모세오경과 예언자들의 가르침도 성경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오직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주의를 주장하면서도 형식주의로 흐르게 되자, 광야 같은 곳에 종교적 공동체를 건설하여 금욕주의와 경건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에세네파였다.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힐카누스 1세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첫 아들의 이름이 유다였다. 개명하여 헬라식으로 아리스토불루스 라고 불렀다. 힐카누스 1세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2년 동안 짧게 유대를 다스리다 병 들어 죽었다.(B.C.104-103) 그 후 유다의 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가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얀네우스는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형의 미망인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결혼을 했다. 현실 정치에 민감했던 사두개파는 얀네우스를 지지했고, 바리새파와 대립하면서 6년간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전이 지속되자 바리새인들은 셀류쿠스의 데메트리오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셀류쿠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대를 공격해 와서 얀네우스를 완패시켰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또 다시 셀류쿠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하스몬 왕가를 지지하였다. 결국 얀네우스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물리쳤는데 그는 바리새인 800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이와 같은 하스몬 통치자들의 행동은 많은 유대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것은 로마로 하여금 유대 지역을 정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B.C.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팔레스틴 지역을 위협했다. 이 때 바리새파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잡고 있었던 아리스토불루 2세와 권력에서 밀려났으나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힐카누스 2세는 서로 폼페이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폼페이우스는 힐카누스 2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권력을 잡고 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폼페이우스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자 폼페이우스는 B.C. 63,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세웠다. 결국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 마카비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의 헬라화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는 반 헬라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외세를 몰아내는 정치적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고 하스몬 왕조라는 독립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하스몬 왕조가 종교적 관심은 없어지고 정치적 성향이 강해지는 것을 불만한 하시딤 세력에서 바리새파가 나왔다. 반면 사두개파는 하스몬 왕조의 정치적 성향을 지지하였다. 하스몬 왕조의 첫 지도자인 시몬이 죽자 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1세가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힐카누스의 통치에 찬성하는 사두개파와 반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겼다. 이것이 예수님 때까지 계속 지속되어 내려온 것이다.

 

 

율법과 바리새파

 

율법에는 성문 율법과 구전 율법이 있다. 구전 율법이란 토라를 해석해서 그걸 말로 전달한 것이다. 이것의 기원은 에스라였다고 한다. 율법의 세부적인 해석이 필요한 예를 들어보겠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 했는데 어떻게 지키라는 말이 두 가지 나와있다. 일하지 말라. 불을 쓰지 말라. 현대 유대인은 엘리베이트 버튼도 못누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누르도록 기다린다. 초인종도 안누르고 똑똑 두드린다. 불을 안쓰기 위해서다. 냉장고도 안식일에 불이 안들어오는 안식일 냉장고를 따로 판다. 율법을 해석하는 이유는 율법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중점이 있었던 것이다.

율법을 해석한 것(할라카)이 나오면 다음 세대로 전달되면서 이걸 구전 율법이라고 한다. 이 구전 율법이 굉장히 권위를 갖게 되었다. 구전 율법이 처음엔 기록지 않은 채 입으로만 전해지니 잊어버릴 염려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며 편집하게 되었다. 편집한 것을 미쉬나 라고 하고 그걸 해석한 것을 게마라 라고 하였다.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쳐서 편집한 것을 탈무드라고 한다. 성경 주석집, 해석집은 미드라쉬라고 한다.

 

포로귀환 후 유대교에서는 서기관, 바리새인 중심이였다. 서기관이란 복음서에서는 율법사, 율법학자라고 한다. 이들을 존중해서 선생님이라고 해서 부른 것이 랍비이다. 서기관은 바벨론 포로 전에도 있었다. 대표적 서기관이 예레미야의 비서인 바룩이였다. 글 쓰는 사람이였다. 왕궁에도 있었고 주요 행정관들의 서기관도 있었다. 글을 해석하는 것도 이 서기관이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서기관이 율법학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세 파가 있었다. 사두개파(성문 율법만 믿음, 대제사장과 고급 제사장과 부유한 상인, 지주들), 바리새파(성문율법에다 구전율법도 믿음), 헷센파이다. 서기관들이 사실상 바리새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사람들은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1성전 시대는 회당은 없었고 바벨론 포로시부터 회당이 생겼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자연히 형성된 것이다. 귀환에서도 이것이 이어졌다. 율법을 연구하는 장소 곧 학교 기능을 하였다. 서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주후 70년에 성전이 파괴 되었다.(133,135년 또 독립운동하다 완전히 예루살렘에서 추출됨) 동물 제사도, 제사장도 없어졌다. 사두개파, 엣센파도 사라졌다. 서기관이 중심이 된 바리새파와 회당과 랍비만 남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유대교의 뿌리가 된다.

주후 70년에 유대교가 완전히 사라질뻔 하였다. 그 때 유대교를 되살린 사람이 요하난 벤 자카이다. 68년에 황제가 네로(54~68)이다. 그 때 예루살렘은 베스파시안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그 때 성 안에는 열심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열심당은 바리새파의 수정주의자이다. 바리새파는 메시야가 와서 초자연적 힘을 발휘해서 모든 외세 물리치고 다윗제국을 건설한다고 생각했다. 열심당은 기다리지만 말고 액션을 취하여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후 66년에 로마에 독립전쟁을 했다. 바리새파도 성 안에 갇혀있었다. 바리새파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죽었다는 소문을 낸다. 성 안에 주검을 둘 수 없기 때문에 소문내서 밤에 숨어서 성밖으로 빠져 나간다. 그가 베스파시안 황제를 만나 당신이 차기 황제가 될 것이다. 성 안 야후네에 있는 회당을 남겨 달라고 부탁한다. 얼마 후 네로가 자살로 죽고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된다. 그리고는 후임 사령간인 아들 디도(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약속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나라는 망했지만 야후네와 회당은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벤자카이는 야브네에서 랍비를 길러내어 유럽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 마을에 보내고 회당을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치게 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유대교와 유대전통이 전승 되기만 한다면 유대 민족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야브네에서 시작한 유대교육을 통하여 그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도 유대인의 명맥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바리새파 랍비 유대교 모습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