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의 자세 (눅 12:32~48)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보좌 배경을 누리면서 동시에 자기 속에 성령님을 누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러면서 하나님 대리통치자로서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존재였다. 부족함이 없었다. 이 축복을 창 3장 사건 이전까지는 잘 누렸다. 그러나 창 3장의 사건으로 어떻게 되었는가? 이 축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보좌 배경을 누리며 성령님을 누리며 산다는 말자체를 모른다. 오직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인생으로 전락하여 인본주의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머리와 내 능력과 내 노력으로만 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등진 채 만물의 척도와 기준이 인간 이성이 되고 자신이 주인으로 사는 인생 되었다. 그러니 자신이 주인이 된 채 자기 의를 갖고 자기 의를 세우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북한이나, 조폭 집단이 악하면서도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과 종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종교는 인간의 의를 쌓아 구원받는 것이고 복음은 거짓된 의를 가진 인간이 가면을 벗어 버리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받은 후에도 인간의 의를 쌓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치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영이 죽은 인간이 자신이 기준이 되고 척도가 되어 인본주의의 의를 갖고 자기 방법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강하게 심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딴 사람보다 내가 좀 더 잘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세상 모습이 되었다. 그러니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오히려 우리를 근본부터 치유 회복시켜 주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말을 정말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은혜는 백프로 성령님을 통해서 받게 된다. 우리가 오랫동안 착각했던 것이 뭐냐면 우리가 깨달았다고 내가 힘써서 죄를 안 지으려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면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애를 쓰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러분 속에 창 3,6,11장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좀 더 애쓰면 생활을 바로 하고 착한 일도 좀 더 하고 좀 더 노력하고 조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타고난 창 3,6,11장을 극복하고 능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로 계속 삶의 주체와 체질을 바꾸어 가야 한다. 내가 주인 되지 말고 성령께서 실제 주인 되시도록 주체와 체질을 바꾸어 가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살게 하신 것만이 진짜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 제목이 청지기의 자세이다. 지난주에는 너희 보물이 어디 있느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하늘에 다함이 없는 배낭을 만들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은 이어서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가 나온다. 그 내용은 인자가 올 때 준비하고 깨어있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1. 우리는 종말의 시간표를 알고 있어야 한다.
세계는 정보, 통신, 과학의 발달로 글로벌 시스템들이 자꾸 만들어진다. 종교 통합운동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서 지구상에 일어나는 각종 문제나 대형사건을 놓고 공조 체제를 갖추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기후문제나, 이산화탄소 문제나,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지구적 재난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런 시대가 올수록 인자의 재림의 때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두 흐름이 있는데 한 편에서는 전 인류 복음화가 일어나고 한 편에서는 반기독교적인 문화가 자꾸 형성이 되어 기독교 배척과 핍박의 역사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두 계열의 싸움이 막판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단 메시지처럼 무한한 보좌의 능력을 누려야 한다. 무한한 영적 세계를 누려야 한다. 3 단체 보다, 종교 단체보다 능가하는 보좌의 능력을 누려야 한다. 이걸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걸 놓고 기도하고 이걸 누리는 체질로 만들어야 한다. 이미 보장되어있지만 이제까지 살아왔던 육신적인 체질로는 안된다. 예수님은 전 인류 구원역사를 마치시면 반드시 재림 주로 오신다. 그때 전 세계가 볼 것이고 신자들의 휴거가 먼저 일어난다. 이 땅에 남은 불신자들에게는 예수님 진노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마치 홍해를 건넜었을 때 한 편에서는 구원받아 감사의 찬송을 했고 한 편에서는 빠져 죽어갔던 것처럼 된다. 그 후 예수님은 이 땅으로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불신자도 부활해서 두 번째 사망인 영원한 유황불 못에 떨어진다. 우리는 이런 종말의 시간표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핑계 대지 말고 보장되어있는 권세를 못 누리게 하는 사탄의 통로가 되는 삶의 규모나 체질을 깨뜨려 나가야 하겠다. 여러분은 이 시대에 70인 제자로, 플랫폼과 파수 망대와 안테나의 삶을 살 자로 부름을 받았다.
2.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
33, 34절의 말씀에 이어 종말적 비유를 하셨다. 세 가지 비유를 하셨다.
1) 첫 번째는 혼인 잔치에 간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에 대한 비유다.
이스라엘에서 혼인 잔치는 주로 밤에 진행된다. 주인이 다녀오면 늦은 밤이 된다. 2경이나 3경이라 했는데 밤 9~12시, 12~3시를 말한다. 이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있다가 주인이 오면 곧 문을 열어주는 종과 같이 되라고 하신다. 이때 깨어있는 종은 주인이 기뻐서 오히려 섬겨준다는 것이다. 그만큼 주인이 기뻐한다는 뜻이 되겠다.
2) 두 번째 비유는 도둑을 지키는 집 주인 비유이다.
39절에 보면, 집 주인이 도둑이 들어 올 때를 알고 있으면 도적 맞을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앞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나 도둑 비유나 다 인자가 올 때 준비하고 있으라는 비유다. 베드로가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인지 물었다. 그때 예수님은 대답 대신에 세 번째 비유를 하셨다.
3) 세 번째 비유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비유이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하셨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나 자녀, 종들까지 관장하는 직무를 맡은 자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제 본분을 잊고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때에 주인이 와서 그를 벌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47~48절의 말씀을 하셨다. 특히 48절 중반에,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지난번에 1억 이상 기부하는 아너스 클럽 얘기하면서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말한 적이 있다. 불신자는 자기 것으로 하며, 자기 의로움으로 했다는 의를 가진다. 반면 신자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하고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기에 그 만큼 자기 의를 안 갖게 된다. 이들은 다만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 대한 상을 받을 사람이다. 불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반면 신자는 청지기 자세를 가져야 하는 사람이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은혜나 물질이나 달란트를 주셨는지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그것은 덜 받은 사람이나 없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것이다. 전부 흘려보내라고 주신 것이다. 고전 12장에 보면 몸에 여러 지체를 주셨으니 아름답고 강한 지체를 허락하신 것은 약하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를 감싸주라고 그렇게 허락하신 거라고 한다. 이걸 우리는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또 47절에,“주인의 뜻을 알고 행치 않는 자는 더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행치 않은 자는 덜 맞게 된다”고 하셨다. 이것도 맞는 말씀이다. 이유는 우리가 주인과 계산해야 할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청지기의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은 자이기에 많이 받았을수록 더 많이 충성해야 한다. 많이 받았다는 것만 기뻐하고 자기만족, 자기과시 하기 쉽다. 창 3장 본성은 그러한데 그러면 안 된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든, 경제든, 기능이든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딴 사람 무시하지 말고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없고 약하고 부족한 사람 도우라고 내게 많이 허락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3. 적용할 메시지
1) 이 원리는 개인만 아니라 교회나, 단체나, 국가에도 적용된다.
이 원리를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많은 은혜 받았던 한국교회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우리 교단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청지기는 받은 것이 많을수록 더 충성하고 주인에게 더 많은 것을 돌려야 한다. 우리 교단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살릴 사명이 있다.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타적 오직이 되면 안 되고 살리는 오직 이 되어야 한다. 오직을 주장하다 보면 배타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우리 가슴은 배타성이 아닌 모든 사람을 살리는 가슴이 되어야 한다.
초창기 때 류 목사님이 워낙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끌렸다. 그러나 이게 다락방만 복음이고 한국교회는 복음이 없다고 들렸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 다락방을 배척하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를 보면 충성된 자도 많고 좀 더 복음적인 교회도 있고, 율법적 교회도 있고, 신비주의 교회도 있고, 자유주의 신학으로 넘어간 교회도 있다. 그래서 가장 복음의 균형을 갖추고 성경적 전도 운동을 할 모델이 필요했다. 그래서 주님은 다락방 전도 운동을 허락하셨고 류목사님을 거기에 세우셨다. 류 목사님의 본뜻은 그런 게 아니고, 좀 더 오직을 강조하신 것인데 지금까지 수많은 배척과 어려움을 당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성을 알고 사탄이 그걸 이용하지 못하도록 그 부분에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섬겨주는 것은 다 좋아한다. 섬겨주면서 오직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류 목사님과 교단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진짜 성경적 전도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를 섬기라고 허락하신 원래 취지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
2) 롬 9:1~3 - 사도바울의 중심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가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배척과 어려움을 당했는가? 육신의 본성으로 하면 원수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연거푸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창 3장의 본성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영의 생각으로, 육신 본성의 감정과 생각을 다 뛰어넘었다. 성령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셨다. 오늘 이게 왜 필요한가? 이게 무한한 보좌 배경을 누리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살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영 육의 축복을 흘려보내야 한다.
결론
우리는 청지기 중심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인자가 오실 때를 깨어 준비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지난 주 경제에 대한 비유와 연결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바울 사도의 중심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와 모든 사람을 향해 가져야 한다. 우리 본성과는 안 맞는 말씀이다. 항상 내가 잘 아는 사람, 나랑 잘 맞는 사람, 내 새끼, 내 식구, 내 교회, 내 편 중심이다. 우리 중심이 주님과 통할 때 무한한 보좌의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쓰임 받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다. 그러나 내 동기로 주님을 끌어당기려고 하면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하신다. 내가 내 욕구를 가지고,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성취욕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 이 보좌의 능력을 줄 수가 없으시다. 그래서 진짜 올해는 창 3,6,11장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할 나고, 죽었음을 인정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창 3,6,11장의 나를 주인으로 받아드리지 말아야 한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창 3,6,11장의 욕구가 있고 동기와 생각이 있다. 우리가 영적 생활이 안 되고 성령의 통치를 못 받게 되면 거반 거기에 속해서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을 밑바닥에 깔고 있으면서 나는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애쓴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것을 틀렸다는 게 아니라 아직 더 작업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주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않으셨고 최고 죄인들조차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오늘 그분의 성령님이 여러분을 통치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무한한 영적 세계를 누리며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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