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의 진정한 의미 (요 3:1~21)-요한복음 시리즈 3
요한복음(3장)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다. 일년의 절반을 보내는 시점에 자신을 점검하며 전반기를 감사하는 날이 되기 바란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날이 오순절(맥추절)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성령의 임재 역사를 잘 알아야 하겠다. 여러분이 성령의 임재 역사에 대해 잘 모르면 우리의 내적인 확신을 못 갖는다. 우리가 받은 축복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신자가 누릴 축복, 권세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과거 구원의 체험이 감사해도 그리스도성령의 현재적 통치가 없으면 연약하고 무능한 신앙생활이 된다. 오늘 본문에서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온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선생이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여러분이 현장과 시대 살리는 망대가 되려면 이 성령의 통치 인도 역사에 대해 분명히 알고 매일 체험해야 한다.
1. 니고데모의 방문
1) 그의 신분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백성의 관원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최고 통치 기관으로 종교 생활이나 일상생활에 대한 재판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런 신분 노출을 꺼려서 밤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호칭했다.(3:2) 이는 구약의 참 선지자와 같다는 말이다. 니고데모는 상당히 지식과 명철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되어서 독대해서 물어보고자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성이 명철하고 합리적이라도 그것이 성령의 역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도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현세적이고 육신적인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였다. 그런 그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은 아주 생소한 말이었다. 그가 육적으로 이해하자 예수님은 6~7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바람과 성령의 공통점을 말씀하셨다. 두 가지는 다 보이지 않지만 현저히 역사한다. 또 임의대로 행사하므로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2) 거듭남의 비밀
거듭난다는 라는 말의 본 뜻은 원래 위에서 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중생(거듭할 중, 날 생)이라는 단어를 쓴다. 예수님은 5절에 거듭나는 방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물은 뭘까? 겔 36:25~27을 보면 물로 씻어 정결케 한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의미한다. 딛 3:5에도 유사한 말씀이 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되어있다. 그러니 죄 사함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은 십자가 사건이 근거가 된다. 14~25절의 내용을 보면 이 중생의 비밀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했다. 이 말씀은 민 21:4~9절의 불 뱀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원망, 불평해서 불 뱀에게 물렸을 때 하나님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게 하셨다. 그걸 보는 자는 살아났다.(자막) 여기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불 뱀은 마귀, 물린 사람은 원망 불평한 죄인, 놋 뱀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은 예수님의 죽음과 절대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성이 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로(단 7:13 인자 같은 이가 나옴), 독생자로, 아들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속죄를 다 이루셨기에 성령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속죄하시고 영생을 주신 것으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된다. 종교는 반대다. 종교는 행위 구원이라서 선해지고, 깨끗해지고, 공로가 있어야지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아 놓고, 신분 권세를 받아 놓고 신앙생활을 한다. 감사한 일이다.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다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렇다. 영접 순간에 구원과 영생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요3:16절 말씀을 이어서 하셨다. 17~18절에 보면 믿는 자는 구원이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이다. 믿지 않는 자는 왜 그런가? 19~20절 그 이유는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년들이 은혜를 갈망해야 한다. 그래서 은혜받는 자리를 사모하고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한다. 누구든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때 믿음이 자라난다.
2. 여러분은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1) 거듭남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영생을 얻은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가 시작된 것이 거듭남이다.
이때부터는 마귀가 나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현재적으로 나를 통치하시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 주님이 완전한 복음, 충분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거듭나는 순간부터 이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부족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사탄의 현재적 통치하에서 살았던 운명 소속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사탄의 통치체계 속에 살면서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버렸다. 영이 죽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 3,6,11장의 나로 전락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모든 가치가 전도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육신 기준, 사람 기준, 현실 기준으로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이걸 실감나게 느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부가 되고 하나님 나를 위한 직업이 된다. 제가 탈북자 예화를 자주 든다. 북한 정권 통치체제 속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있는 북한 주민은 북한 체제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평생 속고 사는 것이다. 사탄의 현재적 통치하에서 창 3,6,11장의 내가 주인으로 살아온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성령을 받아 영적인 눈이 열리면 아, 이게 진짜 창 3장의 문제에 다 빠졌구나를 느끼게 된다.
2) 이것이 언제 분별 되며 극복되며 뒤집히게 되는가?
여러분이 생명을 얻어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영을 살려서 성령의 통치 인도를 받게 되면서 눈이 열리게 된다. 생각이 바뀌어지게 된다. 통치체제가 바뀐 것을 본인이 확실히 알 때 그렇게 된다.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를 새로운 소속 신분 권세 통치체제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완전히 열어주신 사건이다.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거듭난 것은 마치 탈북자가 대한민국의 국적을 따서 소속과 신분과 권세를 얻은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 결과 보좌에서 만유와 만물과 만민과 만사를 통치 주관 연출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내 안에 성령 통치해 주시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주인으로 통치해 주시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가? 이걸 알고 주객과 체질을 바꾸면 사탄, 귀신의 통치는 완전히 깨지게 된다. 사탄의 함정과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치유되고 회복 된다. 우리가 예전에 갖지 못했던 주의 형상이 회복된다. 주님의 마음과 생각과 관점과 소원을 품고 주의 뜻을 행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끝이 아니고 현재적 통치를 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여러분은 속지만 않으면 된다.
1) 왜 다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에, 다 보장 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은 사탄의 함정인 자신의 창 3,6,11장의 본성을 잘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지만 창 3,6,11장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았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나빠지면 언제든지 눌리고 연약해지고 답답해질 수 있다. 이때 여러분의 느낌이나 상태에 믿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자기 상태에 많이 속는다. 여기에 속지 마라. 눌릴 수 있다. 연약해질 수 있다. 그래도 여러분은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다. 이제까지 이 질그릇 자랑하며 살았고 의지하며 살았다. 이 질그릇이 부족하다고 낙심했다. 이 질그릇을 좀 더 뽐낼려고 애썼다. 이 질그릇에 학력, 자격증을 갖추고 예뻐 보이려고 애썼다. 남편 자랑하고 아파트 자랑하고 살았다. 불신자는 전부 질그릇을 좀 더 멋있게 만들어서 자랑하는데 관심이 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질그릇은 얼마든지 연약해질 수 있고, 눌릴 수 있다. 질그릇 속에 계신 보배 되신 주님은 결코 눌리거나 연약하거나 그런 법이 없으시다. 그분은 전능자시오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다. 그 분이 내 안에 지점을 두고 연락소를 두고 계시다. 이걸 바로 알고 믿고 의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주님이 역사하신다. 모든 진리와 생명과 지혜와 의와 사랑과 능력과 치유와 권능의 성령으로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실 수 있으시다. 여러분 상태를 믿는 게 아니다. 보배 되신 주님을 항상 기뻐하고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소원과 관심에 계속 맞추어 나가야 한다. 이것은 필수적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2) 그리고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계속 믿고 의탁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루 세 번 정시 기도(5,5,10 기도)가 중요하다. 나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느낌, 감정, 생각에 속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이 있으셔” 항상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내 느낌에 속지 말고 내 힘으로 기도가 되게 하려고 애쓴다. 그러니 기도가 힘들고 안 되는 것이다. 아에 나를 인정하고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이 있어 이렇게 고백하기 바란다. 모든 흑암을 이길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어 이렇게 고백하기 바란다. 이렇게 고백하면 집사님들 영적 상태가 바뀌고 영적 성장이 된다. 이것이 체질 되면 영적 상태가 좋아지고 영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영의 생각이 강해지고 점점 기도의 권세, 말씀의 권세, 일과 사역의 권세를 누리고 전도의 권세까지 누리게 된다. 주님은 믿는 자 속에 역사해 주시고 믿고 의탁하는 자에게 언약을 이루어 주신다. 이 언약이란 우리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해주시는 것이다. 신분 권세를 진짜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 언약이다. 아버지 소원 때문에 1:8절의 언약을 주셨다. 흑암세력이 무너져야 하고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니깐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싸워 주시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능력으로 싸워 주셨는데 이제는 영적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권능의 성령으로 싸워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계속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계속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싸워 주시고 여러분을 치유 회복해 주시는지 체험해야 한다. 이 언약을 이루어 주셔서 25시의 능력이 나타난다. 25시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 것이다. 안 믿는 것이 영적 문제다. 이성으로 믿는 게 아니다. 성령으로 믿어지게 하셔서 전도 운동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언약이다. 여러분은 주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의탁해야 한다. 보좌 통치하시는 분이 여러분 속에 자기 생각으로 기도하게 해서 응답받게 하신다. 예수님이 염려하면서 갈등하시는가? 경제 문제 왔다고 예수님이 갈등하시겠는가? 말씀이 생각나게 하셔서 말씀 붙잡게 하신다. 기도가 뚫리게 하신다. 그래서 보좌 응답을 받게 하신다. 보배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므로 25시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능력이 나타나도 여러분은 언제나 자신이 고후 4:7의 질그릇인 것을 알고 고백하게 된다.
결론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소속 신분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느낌, 생각에 속지 않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실제 승리를 맛보게 된다. 이 체질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영의 생각이 강해지면 모든 삶에서 승리한다.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계속 행복해질 수 있다. 돈과 환경과 성공 여부에 기쁨이 좌우되지 않고 오직 여러분 안에 주님 때문에 참 기쁨이 주어진다. 오늘 전반기를 점검하시고 후반기를 인도받도록 기도하자.
'본교회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7월9일 주일예배 - 사마리아 여인 전도 (요 4:3~35) (0) | 2023.07.09 |
---|---|
2023년 7월5일 수요예배 -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2 (요 3:1~21) (0) | 2023.07.05 |
2023년 6월28일 수요예배 - 믿음의 기도(요 2:1~11) (0) | 2023.06.29 |
2023년 6월 25일 주일예배-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 요 2 : 1 ~ 11 ) (0) | 2023.06.25 |
2023년 6월21일 수요예배 - 북한 선교와 우리의 할 일(롬9:1~5) (0) | 2023.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