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요 17:1~26)
오늘 우리는 1년에 한 번 있는 건축헌신예배를 드리고 있다. 앞으로 교회를 새로 짓게 된다면 건축에 대한 구체적 메세지를 주실 것이다. 오늘은 순서대로 요 17장 말씀을 보고자 한다. 16장에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세상에 대해 세 가지를 책망하신다는 말씀을 받았다.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 세상은 지금 자기 기준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죄 인지, 의 인지, 무엇이 심판의 대상인지 모르며 살고 있다. 이 세상 임금이 누구인 줄도 모르고 그가 왜 심판받았는지 모르고 여전히 거기에 종노릇하고 있다. 그러니 세상이 책망받아야 한다. 계속 종노릇하고 있으면 세상은 같이 심판당하게 된다. 우리도 사실 불신자 상태에 있을 때는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살았다. 이제 생명 얻었기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불신자가 어떻게 사탄에게 잡혀서 12가지 운명 속에 살고 있는지 사실적으로 보여 한다. 그러면 실제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내가 전했는데 잘 안 믿더라. 그것과는 상관없다. 사탄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서 속이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정말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셨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눈이 제대로 열린 사람은 왜 복음이 다이고, 전도가 다인 줄 알게 된다. 밥 먹어도, 직장 생활해도, 어디 놀러 가도 나의 본론적인 삶은 전도자의 삶이 된다. 그렇게 안 살 수가 없다.
오늘 본문에는 다락방 강화에 이어서 예수님의 기도문이 나온다. 일명하여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한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백성을 대표해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하는 일을 감당했다. 이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지실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전 백성을 대표해서 기도하신 것이다. 이 기도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대제사장적 기도를 하셨는지 중요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이 깨닫고 심령에 꽂히기를 바란다.
1. 첫째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 (1~5)
1절을 보라. 여기서 때란 십자가 지실 때이다. 그의 순종으로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될 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일을 바로 감당하므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하신다. 여러분도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된다. 사명 따라 사는 사람이 극히 적다. 보통 육신 따라 살고 세상 따라 산다. 제자들은 다 사명 따라 살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기준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푯대를 좇아 살았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살았다.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다. 아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일을 하도록 만민을 다스리는 전권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께서 구원하는 권세, 심판하는 권세 모두 갖고 계시다. (요 5:26~27) 그리고 3절에 영생 얻는 조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을 바로 알고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권세를 알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하셨다.
2. 둘째 예수님은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6~19)
12 제자, 70인 제자, 여인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남아 세계복음화 할 사람들이다. 주님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본론적인 기도다. 6절을 보면 제자들을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 하셨다. 세상이란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을 말한다. 사탄에게 세상이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 아버지가 주신 자가 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라는 말을 본문의 기도 중에 5번이나 나온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중요한 사상이다. 저와 여러분이 아버지께 주신 사람이다. 7~8절을 보자.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셨던 핵심 사역이었다. 그때 아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이고,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오신 것을 알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올바른 신앙 고백했을 때 주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11절, 15절, 17절이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중심 내용이다. 11절에 보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니 아버지 이름으로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우리와 같이 하나 된다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이 믿음과 사랑의 연합을 이룬 것 같이 제자들도 믿음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고 창 3, 6, 11장에 빠진 사람들이 가장 못 하는 것이 이 연합이다. 기독교 교회사에서 보면 이것을 못하는 일이 무수히 많았다. 초대교회만 하더라도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는 너희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다. 고린도 교회가 4개 당파로 나누어졌다. 그래서 은사 사용하는 최고의 길이 사랑이라는 것을 고전 13장에서 안내해 주었다.
15절에는,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라고 기도하셨다. 여기서 악이란 사탄에게 빠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16~19절까지 읽자.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세상은 사탄의 12가지 운명 속에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그 영이 죽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못 받는다. 그래서 사탄의 운명에서 빠져나온 제자들이 하나 되고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 방법이 17절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요 8:31~32절에 보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탄, 죄, 저주, 지옥 운명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마치 두려워하는 종처럼 살고 있다(롬 8:15).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담대해졌다. 성령께서 진리와 사랑과 능력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20~26)
1) 이건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성도와 전 교회를 위한 기도다.
우리 교회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교단 교회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국 교회만 말하는 게 아니다. 전 우주적 교회를 말한다. 20~23절을 읽어 보자. 이 기도의 핵심이 무엇이겠는가? 21절에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했다.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 속에 있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과 순종을 본받도록 하길 원하신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이 오시므로 가능케 된다. 그러면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진리와 사랑과 능력으로 온전케 되고 하나 될 수 있다. 새 계명을 주신 주님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셨다. 죄를 용서하고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지도록 섬기라는 것이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까지 자라나도록 지체 간에 그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도 새 계명의 사랑으로 중보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도 이 사랑을 하는 것이 맞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사탄에게 잡혀서 그래서 이유도 모른 채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다. 주님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겠는가? 주님은 세상을 향해 자기 생명을 주시고 세상 최고 범죄자까지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 모든 사람을 위해 죽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되어있다. 핍박하는 자를 미워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너희가 친히 원수 갚지 말라고 하셨다. 육신의 본성으로 우린 사랑할 수 없다. 창 3장의 본성을 한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사랑 못 한다. 자기 아내나 남편 하나 제대로 못 사랑한다. 우리는 사람을 내 관점, 내 중심으로 보지 말고 원래 하나님 형상인데 사탄이 파괴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탄이 사람의 영을 죽여서 눈에 보이는 것에만 꽂혀 살고 인본주의 이성으로만 살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불신자가 된 것이다. 완전 창 3, 6, 11장에 빠져서 상처도 생겨 사회 범죄자까지 생긴다. 이것을 아버지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창조주께서 애타 하시는 관점으로 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탄의 피해자로 봐라. 그래야 중보기도가 된다. 십자가를 근거로 봐야 중보기도가 된다. 내 수준으로 기도하려고 하면 안 된다. 누가 나를 괴롭히면 못 참고, 정의감을 갖고 다 죽여야 해 하는 것이, 사실은 창 3장이다. “하나님, 사탄이 저 사람을 저렇게 되도록 만들었어요”, 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그 사람 놓고 중보기도가 된다. 내 감정이 딱 들어가면 중보기도 안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중보기도 하셨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하나나이다. 한 강도는 같이 못 박혀 죽다가 덤으로 구원받았다. 우리가 볼 때는 최고 범죄자인데도 그 중에서도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계명을 따르는 제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아가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지간에 발을 씻길 수 있고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세상을 12가지 운명에서 건지는 주님의 도구도 될 수 있다. 그 아가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걸 놓고 교회를 위해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세상이 이걸 보는 것이다. “제네들 뭐야? 그러면서 예수 사랑을 저렇게 한데! 그러면 예수가 누군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래!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도 사랑 한데! 그래서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바뀌었데!” 세상이 교회를 보고 아버지를 알고 그리스도를 알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 23절 교회는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어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된다. 세상이 교회를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고 하나님이 또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출 19:5~6에 하셨던 말씀이 교회를 통해 성취된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라고 했는데 여기서 내 말이란 레마이다. 신 8:3에 나오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도 레마이다. 레마로 살게 되면 진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거룩한 민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된다. 신 28장의 축복이 주어진다. 인본주의 이성은 이 말씀을 못 믿는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된다. 출 19:5~6의 말씀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교회를 놓고 기도하신 내용과 연결이 된다. 진리로 인도받으면 거룩해지고 제사장 나라가 된다. 주님의 계명인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하셨다. 서로 발을 씻기고 교회를 세우면서 세상에 대해 전도자의 삶을 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하셨다.
2) 모델적인 교회가 나와야 한다.
우리 노회에 구미 안디옥 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전도력이 있는 교회다. 매주 전도 캠프하러 수십 명이 나간다. 지난 9일(한글날)에 그 교회에서 김성우 목사님 둘째 아들 목사 임직식을 했다. 임직식을 마치고 교회 마당에서 축하행사가 있었다. 그때 김성우 목사님 나오셔서 둘째 아들에게 권면하는 말이, 너는 목사가 되어 말씀, 복음, 기도, 전도에 완전히 빠져라, 완전히 빠져라, 하시더라. 부서별로 나와서 축하행사를 하는데 유치부 아이들이 율동하고 제창하기를 사랑하고 충성하고 동역하겠습니다, 하더라. 그 교회 분위기다. 이렇게 됨은 그 교회가 전도를 통해서 제자화가 되어서 그렇다. 목사님 사모님이 그 모범을 보여주셔서 제자를 낳고 제자를 낳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말씀 따라가는 교회가 되면 이렇게 된다. 그런데 이 말씀이 레마의 말씀이어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가 그렇게 하면 교회를 기초부터 든든히 세워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다. 레마로 말씀을 받으면 사람이 바뀐다. 사랑 못 하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섬기지 못하던 사람이 섬기는 사람으로 바뀐다. 성도가 성도지간에, 목사님에 대하여 섬김이 달라진다.
결론
오늘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세 가지 부분을 말씀드렸다. 진짜 주님이 살아계시다. 주님은 창조주신데 자녀는 졸부나, 재벌이나, 군왕의 자녀보다 못하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졸부 자녀는 돈 걱정은 안 한다. 근데 하나님 자녀가 돈 걱정을 맨 날 하고 있다. 그러면 창조주의 권세 있는 자녀가 아니다. 오늘 말씀으로 다시 자신이 점검되는 여러분 되기 바란다.
'본교회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11월5일 주일예배 -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 (요 18:1~27) -요한복음시리즈 18 (0) | 2023.11.05 |
---|---|
2023년 11월1일 수요예배 - 대제사장적 기도 2 (요 17:1~26) (0) | 2023.11.01 |
2023년 10월25일 수요예배 - 세상과 제자와의 관계 2 (요 15:18~19, 16:1~15) (1) | 2023.10.25 |
2023년 10월22일 주일예배 - 세상과 제자와의 관계(요 15:18~19, 16:1~15) (0) | 2023.10.22 |
2023년 10월18일 수요예배 - 포도나무 비유 2 (요 15:1~17) (0) | 2023.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