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를 회복해 주신 주님(요 21:1~25)
여러분 요 13:1에 보면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니라” 하신 말씀이 있다. 자기 사람이란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요 10:29에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셨다. 이런 말씀을 자기 것으로 잡기 바란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시간이다. 저자 요한은 본서를 마치면서 20:30~31절에서 본서의 기록 목적을 밝혔다. 그러므로 오늘 볼 21장은 부록과 같은 내용이다. 이 부분을 덧붙인 이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주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회복시켜 주셨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내용이 없다. 주를 부인한 후 베드로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어떻게 그의 권위와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는지 밝히고 있다. 둘째 당시 사도 요한에 대해 와전된 말도 있었다. 그걸 시정하기 위한 말씀을 본 장에 추가하고 있다.
오늘 제목이 “베드로를 회복해 주신 주님”이다. 주남은 베드로의 인생 전체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처음부터 갖고 계셨다. 비록 그가 주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했지만 그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끝까지 이루시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그렇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1. 자신의 천명 소명 사명을 확인해라.
천명 소명 사명 따라 살아야 한다. 종교식으로 믿고 자기 필요에 따라 믿는 사람은 이런 신앙 생할 못 한다. 주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정말 아는 사람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모르는데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런 관계가 되는 사람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걸 위해 인생을 걸게 된다. 그것이 천명 소명 사명이 된다.
1) 갈릴리로 간 7제자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이 복음서에 나타나신 것은 7번이다. ① 막달라 마리아에게(20:15, 막 16:9) ② 다른 부인에게(마 28:9) ③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눅 24:34) ④ 베드로에게(눅 24:34) ⑤ 열 제자에게(20:19) ⑥ 열한 제자에게(20:216) ⑦ 일곱 제자에게(21:14)다. 그런데 고전 15장에 보면 이것 말고도 많이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천사가 말한 대로 주께서 먼저 갈릴리 가시니 너희가 거기서 뵐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갈릴리로 간 것이다. (마 28:7~10, 막 16:7) 3절에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기다리다가 일단 먹고 살기 위해 고기잡이하러 갔다. 그런데 눅 5장의 베드로가 처음 부름 받았을 때와 거의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와 같이 밤새 수고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했다. 그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다. 거리는 한 오십 칸(90 미터)쯤 되었는데 예수님이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다. 없다고 하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다. 눅 5장에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다. 그런데 눅 5장과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다. 주님은 연출자시다. 베드로가 같은 상황을 경험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순식간 지난날 생각이 났을 것이다.
7절에 사랑하는 제자가 주시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세 번 부인하고 얼마나 마음고생 했을까? 그러나 눅 22:31~32 말씀을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을 때 주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주님과 깊은 인격적인 만남이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아는 관계가 중요하다(딤후 1:12).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체험, 구원하심에 대한 확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대충 안 살게 된다. 자기 천명 소명 사명을 위해서 살게 된다. 그런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 자녀인데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안 사랑하시겠는가? 우리도 개인적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주님께 인생을 걸만한 만남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분명한 부르심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2) 153의 기적
9~10절에 보면 예수님은 숯불을 준비하시고 그 위에 생선과 떡도 준비하셨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셨다. 11절에 보면 가득찬 큰 물고기 153마리가 잡혔는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모나미 회사 창업자 인 고 송삼석 회장(62년 정동제일감리교회 장로)이라고 계시다. 그가 1963년에 볼펜 명을 지을 때, 오늘 본문에서 힌트를 얻어 모나미 153 볼펜 명을 지었다. 이것은 주님이 지시한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다는 말씀에서 영감을 얻었다. 부활의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니깐 이런 축복이 얻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하는 일이 주님의 일이고 주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 고 완전히 맡겨야 한다. 완전히 맡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주님이 응답을 잘 안 하신다. 왜 그런가? 충분히 안 맡겼을 때는 응답이 와도 이것은 진짜 주님이 응답하신 것인 줄 모를 수 있다. 주님은 충분히 맡겼기 때문에 응답이 왔다는 것을 체험시키기 원하신다. 대충 맡겼는데 응답이 오면 주님이 응답하신 것이 맞다, 라는 생각하기보다 이렇게 되는 수도 있어, 라고 생각하기 쉽다. 주님은 50프로, 70프로, 90프로의 의탁을 원하지 않으신다. 100프로 의탁하기를 원하신다. 진짜로 네가 나를 인정하느냐? 나는 문제에만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네 인생의 주인 되길 원한다 하신다.
모나미 153의 의미에는 이런 의미도 있다고 한다. 15는 당시 15원이고, 3은 모나미가 만든 세 번째 제품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제품이 나오면서 대박을 쳤다. 당시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이나 잉크를 넣어 쓰는 만년필밖에 없었다. 최초 볼펜이 나오면서 대 히트를 친 것이다. 그래서 사 명까지 바꿨다. 원래 회사 이름이 광신 화학 공업이었는데 모나미 화학 공업으로 바뀌었다. 후에 주식회사 모나미(프랑스어 내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잠 16:9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였다.
2. 베드로와의 대화 (15~19)
1) 베드로에 대한 유명한 사랑의 문답이다.
주를 세 번 모른다고 한 베드로에게, 주님도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그러면서 그의 참된 고백을 유도하셨다.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면서, 사명까지 다시 주시려는 의도셨다. 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가슴 뜨끔한 질문이었다.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부인했다. 그 질문에 그는 막바로”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했다. 이 사람들 보다, 라는 말은 뺐다. 예수님은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세 번 하셨는데 두 번은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셨고 마지막 한 번은 필레오 사랑으로 물으셨다.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 사랑(친구 간 사랑)으로 대답했다.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시는 주님 앞에 베드로는 단지 필레오 사랑으로 고백하였다. 이걸 주께서 아시나이다 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의 수준을 알았고 그러나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안 그는 우러러나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주님의 참사랑을 바로 안 것이다. 이에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다. 이것은 주님이 치실 양을 그에게 위탁하신 것이었다. 그러면서 19절에 나를 따르라 하셨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2) 베드로와 요한의 미래
18절에 보면 젊을 때 베드로가 자기 원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하셨다. 저자 요한은 이 말에 대한 해석을 19절에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그의 순교에 관한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64년 7월 로마에서 네로 황제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오늘 말씀의 포인트가 무엇이냐? 여러분이 예전에 주님을 아는 것보다 지금 더 알고 믿는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살아주시는 것을 체험하므로 주님이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귐이 될수록 내 소유 보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구나, 이런 고백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 창조주가 되신 내 아버지와 창조주도 되시면서 구속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나를 살리셨고, 창 3, 6, 11장의 본성을 이기게 하시며, 문제를 이기며, 사탄을 이기며, 그분의 열매를 맺게 만드시며, 구원역사에 쓰임 받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진정으로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된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내 진정 소원은 내 구주를 더욱 사랑~”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구원받은 것보다 더 귀한 것은 구원해 주신 주님이 내 안에서 인도하시는 것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는 얼마든지 잊고 약해질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이 나의 모든 삶의 주인이 되셔서 영의 생각과 영의 말씀과 영의 믿음과 영의 사랑과 영의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어지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 된다. 우리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자아애다. 자기 목숨애다. 그런데 이 자아애, 목숨애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여서 자기 목숨을 드리는 게 된다. 초대교회에서, 세계교회사에서, 우리나라 교회사에서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 것이었다.
20~23절은 요한의 미래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는 말씀이 나온다. 요한은 안 죽는다고 와전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자기 필요에 따라, 각 사람의 모양대로, 각양 은혜와 은사를 주셔서 그 필요에 쓰시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절대 주권을 가지고 구원역사를 이루신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항상 내가 잘 났다는 생각을 한다. 나 중심의 사고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세상을 볼 때도 내 중심이요 내 기준으로 본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우리는 내 수준, 조건, 공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 시대, 그 현장에 구원받을 백성을 위해서 자기 종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쓰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다. 베드로를 택하시고, 요한을 택하시고, 바울을 택하셔서 각양의 모양대로 각양 은혜와 은사를 주셔서 쓰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영 육의 능력을 받아 쓰이면 부러워한다. 비교하면서 교만과 열등감에 빠진다. 나 중심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비교하면서 안 좋아한다. 주님의 필요에 따라 쓰신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옵소서, 해야 한다. 그 사람들도 원래 다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전부 다 육신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 쓰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비교의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저 사람이 정말 믿음이 회복되어서 주님의 작품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영광교회 놓고 기도한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는가? “거기도 틀렸어, 거기도 제자 없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주님과 안 맞는 것이다. 나 중심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다. 그 시대, 그 현장에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어떤 사람에게 은혜와 은사를 주신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선교사들을 보내신 것도 캄캄함 가운데 있었던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현장의 고통받고 있는 택한 백성을 위해 선교사들을 택하셨고 소명을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쓰신 것이다. 그 사명 받은 사람들은 충성하므로 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하고 비교하는 거다.
과거 베드로를 쓰셨고 요한을 쓰신 것처럼 조선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쓰셨고 한국 교회사의 여러 인물을 쓰신 것이다. 조용기 목사님은 조용기 목사님대로 쓰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할 때 류목사님을 택하여서 한국 교회에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서, 성경적 전도 운동을 위해서 쓰신 것이다. 류목사님의 공로와 조건 때문이 아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틀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겠는가? 주님이 자기 종들을 택하여 쓰시는 것은 그 시대, 그 현장에 구원받을 자들 때문이구나. 우리는 현장에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기 위해 영 육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구나, 내가 잘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현장에 구원받을 사람과 영 육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를 통해 그 축복이 흘려보내도록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한다.
결론
자신의 천명 소명 사명을 확인해라. 자기 인생을 걸만큼 주님을 만나기 바란다.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을 180도 전환시켜야 한다. 성령의 통치를 안 받으면 이것이 불가능하다. 영의 생각을 못 하기 때문이다. 절대 자기 기준과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못 바꾼다. 자기 종들을 택하셔서 각양의 모양대로 주님의 필요에 따라 각양 은혜와 은사를 주셔서 쓰시는 것이 정말로 고백되기 바란다. 우리는 흘려보내기 위해서 은혜를 구해야 한다. 백프로 믿음과 순종과 충성의 체질로 바꾸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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