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제자 스데반(행 7:1~8, 46~60)
식당 갔다가 신문을 보니깐 그리스가 15일 동성결혼 합법화되었다고 하더라. 국민이 그리스 정교회가 대다수인데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는 통과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통과되었다고 한다. 지금 유럽에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16개 나라가 합법화 되었고 미국 캐나다 호주 등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동성 결혼 합법화가 되고 있다. 이것은 가정 해체와 교회 해체를 도모하는 사탄의 강력한 전략이다. 2001년부터 네덜란드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36개국이 합법화하였다. 선진국들이 왜 이럴까? 예전에 기독교가 융성했던 나라들이 왜 그럴까? 가나안 문화를 정복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다 정복당하는 것이다. 창 3,6,11장의 문화로 다 빠지는 것이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니다. 어항이 흐려지면 삽시간에 다 흐려진다. 우리도 육신으로 하자면 이런 세상 문화 못 이긴다. 육신으로는 다 따라간다. 고난이 와야 우리 육신은 깨어 기도한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깨어 살아야 하고 여러분의 관심은 오직 1,3,8이 되어야 한다. 교회도 영적 힘이 있어, 영적 정복하는 교회가 있고 영적인 힘이 없어, 현상 유지하다가 문 닫는 교회가 있다. 영적으로 세계를 보는 눈을 갖지 못하고 전도자의 삶을 살지 않으면 세상 문화 흐름을 극복 못 한다. 성령님과 동행하고 성령님의 체험으로 살지 않으면 영적인 눈이 다 감기는 시대이다. 영적인 힘이 없으면 핑계 대지만, 영적인 힘이 있으면 주님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문화감상은 잘 하면서 피곤해서 예배 빠지고 기도회 빠지고 하면 안 된다. 메시지 이해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메시지대로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과 같은 절대 제자기 필요한 시대다. 스데반을 통해서 영적 각성이 되기 바란다.
1. 스데반은 두 가지 믿음이 가능했다
지난주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은 이어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죽음에 대해 나온다. 그는 히 11장의 인물들처럼 두 가지 믿음이 다 가능했다. 능력을 행하는 믿음도 가능했고 핍박과 죽음도 감당하는 믿음도 가능했다. 그 비결이 성령 충만의 역사였다. 누구든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면 믿음이 자라나게 된다.
1) 스데반의 설교의 요지
여러분 집에 돌아가셔서 천천히 7장 설교 전체를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러면 스데반의 설교의 요지가 뭔지 알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사를 설교했다. 아브라함 때부터 솔로몬의 성전 건립까지 거론하면서 하나님이 그 조상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증거하였다. 성전 건립까지 거론하고 나서, 그를 잡으러 온 성전 교권자들의 죄를 지적하였다. 이들은 이 성전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처하고 있으면서도 메시아를 죽인 자들이었다. 스데반은 그들이 바로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후예라고 지적하였다. 조상들이 범한 죄를 물려받아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한 그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책망하였다. 51~53절을 보기 바란다.
이것은 스데반이 말한 것 같지만 성령께서 스데반을 강력히 붙잡고 말씀하신 것이다. 스데반은 성령께 잡힌 상태에서 주신 말씀을 전한 것이다. 사람 의식하고 말하였다면 아마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권자들은 자기들의 죄가 지적당하자 분노하며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했는데 창 3장의 본성이 자극되니깐 견디질 못한 것이었다. 일제히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던 조상들과 같이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의 전조였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그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들은 1900년간 유랑 민족이 된 것이었다.
2) 스데반은 7 집사 중 한 사람으로서 첫 순교자의 면류관을 쓴 사람이다.
실패한 자가 아니라 최고 승리한 자이다. 그동안 탈북자 간증을 우리가 많이 들었다. 중국에서 통독반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북송된 사람 중에 순교자가 여럿 나왔다. 김성근 목사님, 김권능 목사님 같은 분은 북송 직전에 구출되어 나오게 되었다. 누구는 북송되고 누구는 구출되고 이건 누가 하시는 일인가? 김성근 목사님이 개척교회 하기 싫어하다가 떠밀려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물었다. 제가 개척교회를 하면 잘 되겠습니까? 미리 확인하고 개척교회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때 무슨 대답을 주셨다고 했는가? “영광도 내가 주고 고난도 내가 준다. 너는 내가 주는 대로 받아라”. 그때 김성근 목사님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아, 영광 받는 것도, 고난받는 것도 사람의 조건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구나. 주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받는 것이구나” 이렇게 깨달았다고 한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선지자들처럼 교권자들의 죄를 지적하는 일에 쓰임 받고 죽은 것이었다.
3) 우리도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의 사고 체계는 인본주의 사고 체제다.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하지 않고 인간 중심의 생각을 한다. 사탄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선악을 분별할 줄 아심이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인데, 네가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 만물의 척도와 선악의 기준이 인간 이성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공 실패의 기준도 육신 중심이고 세상 중심이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 중심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스데반은 실패자다. 이런 사고 체제가 언제 바뀔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사고 체제가 사탄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는 사실을 참으로 알 때 가능하다. 그래야 시대를 분별하고 세상 문화의 흐름에 빠지지 않고 스데반과 같은 절대 제자가 된다. 영의 생각과 영의 말씀으로 집중할 때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정말 반대다. 여러분은 여전히 주님을 향한 집중의 시간이 절대 필요하다.
2.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7:54~60을 다시 읽자)
1) 성령 충만한 스데반
55~56절을 보면 상대가 이를 갈 정도로 직선적으로 죄를 지적했는데 스데반이 성령 충만했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스데반이 자기 죄의 본성으로 지적한 것이 아니다. 성령께 잡혀 쓰였다고 했다. 그는 죽을 판이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및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 56절 그가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였다. 스데반의 순교를 격려하고 환영하기 위해서 주님이 서신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위협이 그를 사로잡을 여지가 없었다. 59~60절에 보면 스데반의 최후의 기도가 나온다.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와 흡사하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했다.
2) 스데반은 죄를 책망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는 관점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탄에게 잡힌 것을 책망하는 것이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창기와 세리들과 어울리자, 유대 교권자들은 죄의 본성으로 바라보면서 비난했다. 예수님은 그때 뭐라고 하셨는가?“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2~13) 하셨다. 스데반은 죄를 책망하면서도 사람을 죄의 본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뉴스 볼 때나, 여당 야당 정치인들을 볼 때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 편, 니 편이 아니라 창 3장 보는 눈과 복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딤전 2장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되어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전도자의 관점으로 보라는 말이다. 예수님 제대로 믿는 것은 주객과 체질이 180도 전환되는 것이다.
8:1~3절에 사울에 대해 나온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으로 본명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다. 그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 사울은 이 일 이후에 교회를 잔멸하기로 작정하고 각 집에 들어가 잡아 옥에 넘기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9장에 보면 그의 회심이 나온다. 주님의 사랑은 이런 자까지도 구원하여 사명자로 쓰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육신의 관점으로 보면 불가능하다. 죄인을 위해 아들을 죽게 하신 아버지 관점으로 봐야 한다. 불신자 상태를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갖는 것이 전도의 동기가 된다. 전도는 방법이 아니라 전도자의 마인드를 갖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권세를 받았다. 속지 않고 관점을 올바로 가지면 자녀 권세를 누릴 수 있다. 이 권세를 누리면 계속 전도 동기가 생기게 된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 하기를, 전도하러 들어갈 때 벤츠 한 대 선물하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을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결론
여러분은 스데반과 같이 절대 제자로 두 가지 믿음을 갖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사탄이 지금 동성애로 세상 전체를 바꾸려고 한다. 성인식 준비할 때 예성이와 민규를 데리고 기독교 현장 탐방차 경기도 양지에 있는 기독교 백주년 기념 순교관에 갔었다. 그 현장에 왜 갔느냐 하면 제가 전도사 때 그곳에 가서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들어가면 방 벽 전체에 순교자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순교 약력이 다 적혀있었다. 그 사람들이 한 알의 밀알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이 민족에게 영육의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제가 밖에 나와서 혼자 기도했던 것이 있었다. “주님, 정말 제가 순교해야 한다면 너무 기뻐서 너무 감사해서 자원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다. 스데반은 절대 제자의 모델이다. 티비 보는 시간, 유투브 보는 시간, 넷플릭스 보는 시간은 정보 얻는 시간 말고는 끊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이미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에 누구든지 집중하면 영적으로 살아난다. 여러분 두 가지 믿음이 있기를 바란다. 절대 제자 되기 바란다.
'본교회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년 2월25일 주일예배 - 기도와 전도 (행 8:1~8) (0) | 2024.02.25 |
---|---|
2024년 2월21일 수요예배 - 절대 제자 된 중직자, 교사 (행 7:1~8, 46~60) (0) | 2024.02.21 |
2024년 2월14일 수요예배 - 전도는 주님이 주인이시다(행 6:8~15) (0) | 2024.02.14 |
2024년 2월11일 주일예배 - 개인 전도와 다락방 운동 (행 6:8~15) (0) | 2024.02.12 |
2024년 2월7일 수요예배 - 중직자 제자 2 (행 6:1~7) (1) | 2024.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