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붙잡힌 바울 사도(행 18:1~17)
제가 늘 갈망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말씀을 확신하는 것과 함께 실제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삶이다. 매주 점검할 것이, 같은 문제를 겪을 때 똑같이 반응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것이 발전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성령님께 모든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과 의탁과 순종의 삶을 잘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밝히 전하였다고 되어있다. 하나님 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은 성령께 잡힌 것을 말한다. 주님은 여러분과 제가 믿음과 의탁과 순종하면 성령께서 말씀에 잡히게 하신다. 집힌 사람의 특징은 충성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만 있고 이해만 하고 있고 실제 의탁과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인도를 못 받는다. 실제 주객과 체질을 바꾸어야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발전을 체험하게 된다. 믿음 의탁 순종 이 세 가지 단어가 여러분의 인생을 바꾼다.
1. 먼저 알 것은 우리는 이긴 싸움을 하도록 보장되어 있다.
1) 가나안 전쟁은 이긴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싸워주시겠다는 말씀에 붙잡혀 믿음의 전쟁을 했다. 실제 가나안 전쟁을 직면했을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겠는가? 보이는 것에서부터 오는 두려움 무시 못 한다. 인본주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계산이 들어가고 창 3,6,11장 본성에서부터 올라오는 느낌과 감정과 생각에 잡히게 된다. 현장에서 현실과 이론은 크게 다르다. 그래서 자꾸 성령의 능력을 누려야 한다는 것은 그동안 밀렸던 현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누리는 것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실제 문제의 현장을 당하면 영성이 없으면 믿음과 의탁과 순종이 안 된다. 인본주의 이성과 눈에 보이는 것과 3,6,11장의 본성에 빠지니 이긴 싸움을 못 하게 된다. 밀리고 문제를 만나면 눌린다. 두렵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 하면서 안전과 염려의 동기로 들어가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가 고민하고 애쓰는 방법으로 들어간다. 그게 너무나 체질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긴 싸움을 못 하고 밀리게 된다.
오늘 본문에 보니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잡혔다고 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이성의 판단보다, 3,6,11장의 본성에서 올라오는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잡힌 것이다. 성령께서 이것이 가능케 하신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인본주의 이성과 눈에 보이는 것과 3,6,11장의 본성에서부터 올라오는 생각에 잡히느냐, 아니면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과 확신에 잡히느냐의 싸움이다.
그래서 제가 성령께 이끌리는 기도의 3단계를 말씀드렸다. 구분하는 단계, 극복하는 단계, 주객을 바꾸어 24시 나가는 단계를 말씀드렸다. 구분하는 단계는 3,6,11장의 본성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성령께서 주시는 느낌, 생각과 구분하는 단계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은 불안이 아니라 평안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은 나 중심의 동기에 잡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배경과 능력을 믿는 생각이다. 이것이 구분이 안 되면 육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그냥 잡히게 된다. 그래서 감정대로 말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행하게 된다. 이게 보여야 한다. 첫째가 구분하는 단계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이 더 강해지면 극복하는 단계가 된다. 이게 두 번째 단계다. 세 번째는 내가 주인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주객을 바꾸어 24시로 발전시키는 단계이다. 여호수아나 갈렙, 다윗이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 싸움에서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말씀에 잡힌 것이다.
2) 대부분 이 싸움이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불신앙, 불순종하길 밥 먹듯이 했다. 이 사람들이 10가지 재앙을 체험했었다. 홍해 사건을 체험했다. 광야에서 만나 내리는 것도 체험했다. 그런데도 왜 불신앙, 불순종하는 일을 밥 먹듯 했겠는가? 구분, 극복, 주객이 바뀌는 단계로 못 나갔기 때문에 그렇다. 성령이 안 계시면 이 삶이 안 된다. 그 수준으로는 이긴 싸움 못 한다. 가나안 정복 못 한다. 왜 그런가? 이것이 영적 상태와 관계가 있다. 아담의 모든 자손은 사탄에게 지배받는 상태가 되었다. 아담이 사탄에게 문을 열어준 것과 같기 때문에 그때부터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질 못하고 마귀가 3,6,11장의 본성을 따라가는 세상을 만들었다. 결국 창 6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게 되었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영이 죽은 인본주의 이성이 되어버렸다. 이성이 성령께 잡혀야 한다. 성령님은 합리성을 가지고 공부나 일 잘하게 만드신다. 영성이 받쳐주니 공부하는데 안 지친다. 그런데 영이 죽은 이성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창 3,6,11장의 본성에 빠져 눈에 보이는 것에만 꽂혀 산다. 맨날 현실, 현실 하며 산다. 현실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배경과 능력이 믿어지면 인본주의 이성이 극복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꽂혀 사는 사람은 맨날 현실 타령만 한다. 그 체질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없다. 하나님 자녀니깐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은 있는데 더 발전은 안 된다. 그러다 문제 오면 문제에 확 잡히게 된다.
영이 죽은 이 세상이, 얼마나 이성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 문명은 굉장히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나 성령님이 아니시면 하나님과 그 말씀은 못 믿는다. 창조의 세계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구원, 심판 이런 것들을 못 믿는다.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고 따를 수도 없다. 이걸 인정하기 바란다. 신자라도 오랫동안 빠져있었던 인본주의 체질을 극복하지 못하면 현실 앞에서 진다. 말씀 따라가며 말씀 응답을 못 받는다. 항상 문제가 더 크게 보인다. 저 사람 때문에 라는 소리 맨날 한다. 인본주의 체질이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불신앙하고 있고 인본주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못 믿고 있는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기도의 사람들은 자꾸 성령의 터치를 받게 된다. 자꾸 눈이 열린다. 나를 보는 눈도 열리고 세상의 문제가 뭔지도 보는 눈이 자꾸 열린다. 사탄이 어떻게 모든 사람을 하나님 떠나게 만들어서 인본주의 체질을 형성시켜 놓았는지가 보여야 한다. 그래야 빠져나올 수 있다.
저의 메시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렇게 삽시다 라고 당위성만 말하고 있지 않고 원리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다. 원리적인 부분을 제대로 통찰할 수 있어야지 실제 승리할 수 있다. 머리로만 알고 이해하는 것으로만 안 된다. 실제 여러분을 바꾸는 것은 성령께서 바꾸신다. 현실을 직면했을 때 들은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심령에 부딪히게 만드시고 적용승리하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님을 의지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
2.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성령께 잡힌 것이고 주님의 관심과 생각에 맞추는 것이 24시로 발전하는 것이다.
1) 성령께서는 인본주의 이성에 갇히고 눈에 보이는 것에 꽂히고 3,6,11장 본성에서부터 올라오는 느낌과 생각에 빠지는 것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신다.
창조주의 말씀에 잡히는 것에 사실 아담도 실패했고 이스라엘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승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셨고 여러분 속에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을 모신 사람은 이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근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제까지 인본주의로 형성된 체질이 문제이다. 계속 인본주의 계산과 3,6,11장의 본성으로 사는 것이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면 이기는 힘을 발전시켜 주신다. 여러분이 믿음과 의탁과 순종만 잘하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여러분도 말씀에 잡힐 수 있다.
2) 말씀에 붙잡힌 바울 사도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했고 대적하고 비방하는 자들 앞에서도 눌리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다.
7~8절에 보니깐 유대인들은 핍박했으나 디도 유스도가 믿게 되었고 회당장 그리스보와 온 집안이 믿었다.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말씀에 잡혀 복음을 전하니깐 대적자는 대적하지만 믿을 자는 믿고 많이 돌아왔다. 9절에 보니깐 말씀에 잡힌 바울에게 주님이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주셨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한때 심히 떨었다는 표현을 한 적도 있다(고전 2:3). 그런데 오늘 본문 9,10절에 보니깐,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셨다. 전도 운동의 주체가 그리스도시다. 내 백성이 많다는 것은 주께서 누가 구원받을 자인 줄 아신다는 뜻이 된다. 주님은 전도자에게 충만함을 주시고 전도 받을 자에게도 역사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말씀에 더욱 붙잡혀 1년 6개월간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1) 계속 주객을 바꾸어서 믿음의 전도, 믿음의 직장 일, 믿음의 사역을 해야 한다.
인본주의 체질을 버려라. 여러분 속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이 죽으면 인본주의 이성과 눈에 보이는 것과 창 3,6,11장의 본성에 입각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배경과 능력 믿을 수 없다. 문제 앞에서 내 수준과 능력으로 힘들 것 같으면 눌림과 염려가 딱 들어온다. 자신의 동기에 잡히면서 자기가 해결하려고 뛰쳐나간다. 기도 보다는 빨리 내가 해결하려고 들어간다. 그러니 기도를 놓치는 것이다. 형상이에게 “늘 기도 먼저하고 일을 해야 한다. 밤에도 기도를 해서 눌리고 피곤한 것을 영적으로 다시 뒤집어야 한다. 그러면 다시 새로워진다”. 이렇게 말해 준다. 기도를 제대로 못하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지쳐서 밤에 들어오면 티비 보고 유투브 보고 소일하다가 잔다. 이렇게 되면 영적 상태는 회복이 안 된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한 삶이 적용이 안 된다. 항상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뚫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회복되고, 눌렸을 때의 상태와 회복되었을 때의 상태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기도가 되니깐 상태가 달라진다, 내가 여유가 생기면 다른 사람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된다. 인본주의 체질을 버려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싸워주시는 이긴 싸움을 해야 한다. 자기 동기로, 자기 방법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 창 3,6,11장의 본성을 가지고 열심 내지 말아라.
2) 전도는 마치 영적 가나안 정복과 같다.
구약의 가나안 정복은 땅을 정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래야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땅을 정복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영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땅을 차지했는데도 하나님 백성이 개판을 쳤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도, 통치를 실현시키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징계받아 그 땅에 내쫓긴 것이었다. 지금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고 사탄에게 장악된 사람을 건져내는 싸움이다. 그래서 영적 가나안 정복이라는 말을 쓰는 거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마귀에게 장악되어 있으면 죄의 종 노릇 하는 거다. 사람들이 흑암에 잡혀 영이 죽었기 때문에 불신앙, 불순종하는 거다. 그래서 전도란 사탄, 죄, 저주, 지옥 운명에 빠져있는 자를 건져내는 일이다. 이 일을 인력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만이 죄를 사하시고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건져내신다. 그 일에 여러분을 쓰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전도다. 성령께서 전도자를 붙잡고 전도자 속에서 능력과 확신과 충만함을 주셔서 복음 전하게 하신다. 동시에 복음 받을 자에게도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완전한 계획과 방법과 전략과 능력으로 전 인류 가운데 하나님 백성을 건지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다. 그러니 육신의 일을 하듯이 사람의 동기와 방법과 열심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
3) 여러분은 현장에서 믿음의 체질로 계속 바꾸어야 한다.
여러분 하는 직장 일, 만나는 문제 다 믿음으로 처리해라. 내 동기, 내 힘을 빼는 기도를 해라. 여러분 속의 그리스도가 믿어질수록 동기와 힘을 빼게 된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서 성령으로 인도 역사해 주시는 영감과 지혜와 힘으로 하라는 말이다. 이것을 먼저 여러분 하는 일에서 체험해야 한다. “주님, 오늘도 내가 하는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능력이 있으십니다. 모든 진리와 능력과 지혜의 성령께서 내 영과 혼과 육신에 임재 통치 인도 역사해 주옵소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말씀 주시는 자 안에서, 아가페 사랑 주시는 자 안에서 행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이 역량이 길러져야 한다. 먼저 하는 일에서 이 역량을 체험해야 한다. 그러면 전도할 마음이 생긴다. 믿음의 전도를 하게 된다.
4) 구약에서 믿음과 순종하는 종들만 나오면 하나님은 자기 소원을 위하여 싸워주셨다.
아무리 강한 대적이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싸워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지는 것이 문제였지, 하나님은 모든 능력이 있으셨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필요 없게 된 것이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은 유효하다. 사사 시대도, 왕정 시대도, 심지어 포로 시대에도 믿음과 순종의 종들만 나오면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 주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워주셨다. 기도란 나를 부인하는 시간이다. 내 동기, 내 힘 빼는 시간이다.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인정하는 시간이다. 그분이 모든 능력으로 내 영과 혼과 육신에 임재 통치 인도 역사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시간이다. 믿음과 의탁과 순종하는 종들만 나오면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 주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싸워주신 것이다.
5) 지금은 영적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싸워주신다.
여러분 속에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발전시켜 줄 수 있다. 사탄에게 속아 인본주의 이성과 눈에 보이는 것에 꽂혀 살고, 3,6,11장의 본성에 빠져 살지 말고 구분하고 극복하고 승리하길 바란다. 이것 안 되면 하나님 자녀가 재미없는 인생 살게 된다. 계명은 지켜야 하니깐 날마다 정죄 의식만 느낀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주님이 행 1:8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믿음과 의탁과 순종하는 사람이 되면 충성하게 된다. 이에 충성하는 종이 나오면 성경적 전도 운동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러분을 숫자로 보지 않는다. 여러분의 상태를 본다. 여러분이 믿음과 의탁과 순종하는 종이 되면 얼마든지 재생산할 수 있다. 한 명이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결론
여러분은 하는 직장 일과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믿음으로 처리하는 것부터 배워라. 기도로 처리하는 법을 배워라. 이것을 매주 점검, 그 역량을 발전시켜라. 그러면 24로 발전하게 되되고 25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여러분 하는 일에서 일단 체험된다. 그러면 이런 걸 체험 못하는 불신자가 영적으로 보인다. 생명 없는 상사가 보인다. 영적으로 통찰이 된다. 서로 숫자로 보지 말고 상태를 보기 바란다. 여러분 하는 일에도 25시의 축복을 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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