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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4년 9월 8일 주일예배 - 생명 건 제자의 특징(행 18:24~28)

by 현상금 2024. 9. 8.

생명 건 제자의 특징(18:24~28)

 

 

 

 

지난주에는 렘넌트 헌신예배였다. 우리 교회 렘넌트의 사명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원색 복음 회복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기 위해 첫째 창 3장의 문제와 그로 말미암아 초래되고 나타난 결과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둘째로 이것의 해결책인 오직 그리스도를 확실히 알고 누려야 한다고 했다. 체험해야 한다. 성령으로 알고 믿고 체험하는 게 되어야 한다. 셋째는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서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 제목은 생명 건 제자이다. 어디에 생명 거는 것인가? 복음 되신 그리스도께 건다. 누가 생명 걸겠는가?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이 너무너무 귀하고 자기 생명보다도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건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고 그렇게 된 사람들이다. 바울 안에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그들도 체험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함부로 생명 걸었다는 말을 안 쓴다. 그러나 우리 속에 생명 걸 가치가 있는 분을 발견할 때 이것이 가능해진다.

 

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1) 그들은 어떤 부부였는가?

그들이 로마에서 이미 복음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과의 만남은 벤츠 한대 얻는 축복보다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누리게 되면 이런 마음을 당연히 갖게 된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운명과 소속과 신분을 바꾸어 주신 것을 감사 감격하게 된다. 배경과 자녀 권세 주신 것을 감사 감격하게 된다. 브리스길라는 로마 명문 집안의 딸인 것 같고 아굴라는 소아시아의 본도에서 난 유대인이다. 이 둘이 로마에서 만나 결혼했고 로마에서 추방되면서 고린도로 왔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16개월 동안 사역을 함께 했다. 그리고 바울이 떠날 때 같이 떠나 에베소로 간 것이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잠시 머물다가 갔지만 이들 부부는 에베소 교회에 남아 있었다.

2) 이들이 에베소에서 남아서 한 일은 무엇인가?

에베소 교회를 돌보는 핵심 사역자 역할을 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볼로와 만남과 그를 팀 사역한 내용이 나온다. 24~25절 보면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되어있다. 요한의 세례만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는 모른다는 말이다.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감지한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를 따로 만나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히 풀어 증거했다. 주님의 부활과 40일 동안 하신 말씀과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전했을 것이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이런 점에서는 아볼로를 돕고 세우는 일에 쓰인 평신도다. 마치 목사님을 집사님이 팀 사역한 것과 같다. 그 후 아볼로는 아가야(고린도)로 가서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브리스길라 내외는 계속 남아서 사역하다가 3차 선교 여행을 하는 바울과 재회하게 된다. 그것이 19장 내용이다. 그리고 함께 동역하며 3년간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보필하였다. 그들은 복음에 생명 건 제자였다. 16:4에 보면 이들은 바울을 위하여 자기 목까지도 내놓았다고 하였다.

 

2. 복음에 생명 건 제자의 특징

1) 하나님 소원을 위해 사는 자다.

누구든 생업이 있다. 그런데 생업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다. 체험 신앙을 갖고 목적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든 생업이 목적이 된다. 그걸 기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결산 될 때 상급이 진정한 축복이다. 영성이 약하면 우리의 생각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유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정말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어딜 가든지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그랬다. 사람이 모이면 계급이 생기고 계급 간의 갈등과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계급 간의 갈등이 있으니깐 미움과 시기와 욕심과 살인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창 3장에 빠진 세상이다. 6장 때(노아 1054)는 이미 세상은 완전히 타락했고 그래서 물로 심판받았다. 그 후 창 11장의 바벨탑 사건 때는 하나님 없이 인간끼리 단결하여 높아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바벨탑을 세웠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도모를 그치게 하기 위해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흩어진 자들이 세계 각처로 나가 나라와 문명을 건설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회도 계층이 생기고 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가 형성되었다. 만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엄하고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전 세계가 12가지 운명에 빠져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요일 5:19에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이 악한 자에게 처했다고 하였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그 일 전에 하나님 백성부터 회복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다. 하나님 백성을 성전 삼으셔서 통치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길 원하신다. 배경과 권세가 주어졌으므로 이 삶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인본주의 이성으로는 이걸 못 믿는다. 기도 생활이 안 되면 영의 생각을 못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인본주의 이성으로 계산한다. 불안이 세게 들어오기 때문에 말씀 따라 살지 못 한다.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시고 하나님 백성을 세우는 방법이 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 세상 구원 역사를 다 이루신 후 재림주로 오실 때 하늘과 땅이 통일된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40일간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과 장차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사명과 언약을 주셨다.

나의 업에 대한 염려에 빠지면 그게 목적이 된다. 그 업의 주인이 그리스도가 되시고 그 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직장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니, 인간관계를 바로 한다. 복음 없는 사람은 구원받을 대상이고 복음이 약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세워야 할 대상으로 본다. 교단과 상관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 왜 우리 교단이 있는가? 우리 렘넌트와 우리 교단만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하나님의 관심사다. 다 한 몸이다. 다 세우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제일 좋은 자세는 우리 교단이 참된 영성을 가지고 7 망대가 되고 7 여정, 7 이정표를 가면서 237 5쳔 종족 살리는 것이 대 목적이면서 그러면서 가능한 모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영향력을 미치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역량이 있어야 한다. 역량이 없으면 우리 자체도 주체하기 힘들다. 그런 사람은 내 집안 단속하기 바쁘다. 우리가 처음에 믿음의 포석을 어떻게 깔고 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 신앙관을 어떻게 가지고 들어가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복음을 위해 생명 건 제자는 하나님 소원을 위해 사는 자다. 초신자 때는 내 소원을 위해 기도한다. 그래도 하나님 체험하라고 들어 주신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도 북한 주민에게 응답하고 계시다.

 

2) 1,3,8의 언약 신앙이 확고한 자다.

언약 신앙이 확실히 확고해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다. 여러분 점검해 봐라. 내가 지금 뭘 더 의지하고 있는지, 뭘 더 붙잡고 있는지 점검해 봐라. 진짜 제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50프로, 60프로 붙잡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건드려서 진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제일 관심 있으신 부분은 여러분 자신이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세계 복음화를 못 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심판하실 수도 있으시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에 전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 앞에 전 세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 찬양한다. 유대인, 이방인이 다 함께 찬양한다. 하나님이 우릴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가 못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도 재능과 돈과 탑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여러분을 찔찔하게 살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회복되고 여러분의 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계명을 지키고 지상 명령을 감당하도록 하길 원하신다. 그런 후대를 키우기를 원하신다. 거기에 제일 중요한 것이 진짜 이런 영성을 가지고 있는 부모와 교사와 교회이다. 그들의 중보기도를 통해 후대를 기르는 것이다.

세상 부모도 자식을 위해 최고로 좋은 것을 줄 줄 안다. 최고 자식으로 키워 부모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길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여러분을 자기의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신다. 주님의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로 쓰신다. 이렇게 주님이 인도하시고 세울 것을 믿는 자가 언약 신앙이 정립된 자다. 그런 사람은 베드로에게 선언해 주셨던 세 가지 축복을 받는다(16:18~19).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다.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시다. 제가 구원한 적이 없고 제가 피 값으로 산 적이 없고 생명 준 적이 없고 양육한 적이 없다. 다만 사역자일 뿐이다. 주님이 오직 여러분의 주인이요 책임자요 언약 성취자시다. 음부(지옥, 사탄)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고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했다. 기도 응답권이 맞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 된 것이 맞다. 그래서 믿음이 회복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제가 이런 눈이 안 열린 상태에서 교회가 부흥하고 커진다면 지금까지 연단 받아 유익을 얻었던 것처럼 그렇게 유익을 얻었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사람은 자기가 좀 잘되면 반드시 의시 된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굉장히 정금같이 훈련하시게 되고, 광야에서 훈련하는 것이지, 가나안 들어가 버리면 거기서 훈련 안 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은금이 증식되고 배부르거든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 하노라 하셨다(8:13~14). 이게 인간 본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여정은 정확하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렌즈가 사탄에게 속게 만든다. 여러분의 부르심에 따른 천명 사명을 각각 이루게 하신다. 어떤 직업을 가져도 상관없다. 자기 직업의 의미를 모르고 불평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다. 직장에서도 소명 천명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높여 주신다.

언약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이루신다. 거기에 우리가 쓰임 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지금까지 최고 중요한 것이 주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고, 주님이 교회를 세우고, 전도 선교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과 의탁과 순종밖에 없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일꾼으로, 손발로 쓰시는 것이다. 믿음과 의탁과 순종이 잘 안되는 것은 자기 이성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에 그렇다. 사탄의 함정과 그 속에서 형성된 체질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이것은 그리스도밖에는 해결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체질을 치유 회복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도 주님께 붙들림을 받는 일이 되게 만드시고, 쓰임 받는 일이 되게 만드신다. 여러분이 이런 영성 훈련을 안 받고 성공한다고 생각해 봐라. 내가 이렇게 애쓰고 노력해서 성공했으니 내가 이제 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내가 이제 좀 많이 누리려고 한다. 바울처럼 전도자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산다고 못 한다. 세상 부모 자식을 위해 최고로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3. 생명 건 제자의 실천 사항

1) 평상시(24) 주님이 내 안에 행하시는 영적 상태를 만들어라

내 생각이 아닌 주님의 생각으로 행하는 상태가 된다. 내 생각으로 하면 남편이 미우나, 주님의 생각으로 하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된다. 육신의 생각으로 하자면, 일이 부담스럽고 문제 앞에서 염려하고 긴장하면서 짜내려고 한다. 주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바뀌면 주님이 하실 것이 믿어진다. 주님이 내게 능력 주실 것이 믿어진다. 평상시 주님이 내 안에 행하시는 영적 상태를 만들기 위해 24시 주님의 관심과 생각에 맞추어라.

직장이 그렇게 바쁜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래도 해야 한다. 여러분이 바쁜데도 기도 먼저 하고 영적 상태를 바꾸어서 주님이 붙잡아 주시는 영성을 가지고 일하겠다고 하면 성령께서 임재, 통치, 인도 역사하심을 날마다 누리게 된다. 우리 본성은 주님의 관심과 생각에 맞추는 것을 자꾸 놓친다. 육신의 소욕과 관심과 생각에 빠진다. 청년들은 놀고 싶어 한다. 충분히 이해된다. 저도 청년 때 그랬다. 그러다 보니 자꾸 영성을 놓친다. 그래서 성령님 인도 역사하심이 소멸된다. 기도 시간은 나의 관심과 생각을 바꾸는 시간이다. 티비 집중이 아니고 주님께 집중하는 거다.

이미 구원받은 자녀는 창조주 하나님이 실제 아버지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셨다. 우리 무리의 죄악과 저주와 질병을 이미 담당하셨다. 그가 죄악을 담당하므로 우리가 영적 생명과 축복을 누리고, 그가 우리의 저주를 위해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보좌 배경과 기도 권세)를 누리고, 우리의 병을 위하여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하셨다. 기도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세를 얻은 것이다.

2) 하나님 소원을 위해 주어진 기도 권세를 사용해라.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하나님 소원을 위해서 살도록 하시는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합법적 기도 권세를 가졌으니 우리가 하나님 소원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기도 응답 받을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이 된다. 필요 충분 조건에 맞추어서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 계획이 있는 거다. 기도도 대충하고 또 안 들어주셨다고 낙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삼 저주를 끝내신 것이다. 삼 저주 대신 합법적인 권세를 주신 것이다. 예전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주권자 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분명히 그 관계가 된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가지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와 나의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자꾸 3,6,11장의 본성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 본성에서 만들어진 체질로 자꾸 반응하는 것이다. 믿음의 체질이 아니고 내가 체질이다. 비판하고 죽이는 체질이다. 그러니 성령님과 안 맞는다. 성령님이 소멸 된다. 3,6,11장의 본성으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으로 반응해야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으로 반응해야 한다. 3,6,11장의 본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3,6,11장 본성에서 느낌과 생각이 올라온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일단 그걸 인정하라고 했다. 난 그럴 수 있어 인정해라. 그러면서 받아들이지 말고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과 생각을 받아들여라. 이거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계속 갱신하면서 합법적 기도 권세를 사용할 수 있다. 성령의 인도 역사를 못 체험하면 이제까지 메시지를 머리로 다 받은 것이다. 실제 변화가 없다. 작년이나 지금이나 같다. 감사 없고 판단만 잘한다.

 

결론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생명 건 제자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너무너무 감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삶의 원리요 방법이 된다. 그분이 성령님으로 기도의 권세를 사용하게 하신다. 육신의 본성으로는 기도가 안 된다. 성령의 통치를 받기 원해야 기도가 된다. 그래서 주님의 열매를 맺게 된다. 주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는다. 언약 신앙은 더 확실히 정립되고 24시 주님이 내 안에 행하시는 영적 상태를 만들어라. 그게 행복이다. 최고 행복이다. 주님 때문에 희열이 온다. 주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 안다 하실 때 기쁨이 온다. 3,6,11장의 본성으로 반응하지 말고 성령으로 반응하고 기도의 권세를 계속 사용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