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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회메세지

2024년 9월 29일 주일예배 - 바울의 결단 (행 20:13~24)

by 현상금 2024. 9. 29.

바울의 결단 (20:13~24)

 

 

 

 

지난주에 바울과 동행한 제자들이란 말씀을 전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사는 자들이라고 했다. 1,3,8 언약이 확고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들 중에는 바울이 죽을 때까지 따랐던 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이 생명 건 제자들이었다. 제자의 특징이 문제와 갈등과 위기를 다 기회로 삼는 것이다. 오늘 초등부에서도 우리는 넘어질 수 있어요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수제자 베드로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해놓고 넘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셨다. 하나님 자녀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넘어지는 것도 기회가 된다. 넘어질 때 우리의 약한 부분이 보이게 된다. 그래서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기회가 된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넘어질 때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통치해 주시는 삶을 배워나가고 있다. 이전에는 우리가 3,6,11장의 본성과 인본주의 이성으로 거의 살았다. 거듭나서 영이 살아나게 되니깐 성령의 교훈과 가르침과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불신자와 다르다. 불신자는 주 안에서 행하는 삶이 없이 애쓰고 노력하는 삶을 산다. 우리는 주 안에서 사는 삶을 배우는 것이고 불신자는 주 밖에서 자기 노력과 애씀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께서 임재 통치 인도 역사하시는 삶을 배제한 상태에서, 주님과 상관없이 자기가 주인인 인생을 사는 것이다. 불신자는 어릴 때부터 공부한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른다. 그 결과 정상에 오른다. 그런데 주 밖에서의 삶이다. 영적으로 보면 마귀가 빠뜨려 놓은 함정에서 애쓰는 인생을 산다. 여러분은 이제 그런 인생이 아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며 주의 뜻을 행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 사탄의 망대가 무너지고 진정한 하나님의 망대로 서게 된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 사도가 3차 선교여행 귀로에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고별 설교한 내용이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과 만남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1. 우리는 7 망대, 7 여정, 7 이정표를 가고 있다.

1) 우리는 시간표가 보여야 한다.

성령께서 나를 통치 인도 역사하시는 그 시간표가 보여야 한다. 메시지가 실제 자기 것으로 체험되고 응답 되는 시간표를 봐야 한다. 이것이 성령님이 인도 통치 역사하시는 실제 시간표다. 그게 보여야 계속해서 7 망대, 7 여정, 7 이정표를 따라 가게 된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지만, 구약 성도는 어떻게 인도받았을까? 구약에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라 하는 말이 없다. 우리에겐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축복을 주신 것이다. 율법도 성령께서 내면적으로 지키게 만드시고 말씀 따라 가게 만드신다. 9장에 보면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방법이 나온다. 9:15~23에 보면 그들이 구름 기둥, 불 기둥을 신호 삼아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기도 하고 진을 걷고 행진하기도 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라는 말이 8번 반복해서 나온다. 광야 길을 가는데 한 번도 회의해서 방향과 길과 시간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름 기동,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했다. 어떨 때는 하루 만에, 어떨 때는 한 달, 또 어떨 때는 일 년을 머물다가 떠났다. 이는 애굽에서 살아왔던 체질 곧 인본주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전적으로 요구되었다. 환경과 이성에 근거한 계산을 의지했던 그들을 광야라는 특수 상황에서 전적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배우게 하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인본주의 체질을 바꾸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가나안 정복도 가능하고 들어가서 윤택하고 부요해져도 율법을 준수하며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삶을 배우기 위해서는 광야가 적격이었다. 사실 우리는 3,6,11장의 본성이고 인본주의 이성으로 환경과 내 능력을 의지한다. 살만하면 하나님 의지 안 하게 된다. 위기 상황 오면 말씀을 믿고 따르지 못한다. 이 훈련을 철저히 광야에서 시키시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여호와의 명령 따라 행하게 하셨다. 가나안 땅 들어가서는 율법이 이미 주어졌고 율법이 통치 수단이었기에 율법대로 살도록 하셨다. 그 계명대로 사는 것이 인도받는 방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사실 대단한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세상의 흐름 대로, 세상의 가치관대로 사는 것이 쉽겠는가? 말씀의 가치관대로 사는 쉽겠는가? 태어날 때부터 인본주의 교육을 받아왔다. 끊임없이 여러분의 능력으로 경쟁하는 체질이 되어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잡히지 않으면 크게 겁내는 체질이다. 광야에서 영적인 눈이 확실히 열리는 게 최고 중요한 것이다. 이런 삶을 배우기에 광야가 적격이라고 했다. 여러분이 나름대로 광야를 거친다. 영적으로 보면 이 광야 기간이 중요한 계획이 있는 거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2) 신약의 하나님 자녀는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구약 백성과 똑같이 말씀으로 인도받는 것인데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영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영의 말씀으로 교훈과 깨달음을 주시면서 말씀 따라 가게 하신다. 그 말씀이 있어야 문제가 와도 답을 얻게 하신다. 하나님의 이런 계획이 있구나, 하는 이런 답을 얻게 된다. 그러면 실족하지 않는다. 문제에 승리하게 된다. 성도에겐 성령께서 자기 내면에 주시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의 흐름을 타야 한다. 강단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최고의 축복이다. 본부의 강단도 흐름을 타야 한다. 내면적으로 흐름을 타야 한다. 저는 확신한다. 본부의 흐름을 탄다면 여러분은 어떤 흐름도 탈 수 있다. 성령이 주시는 말씀은 육신의 생각과는 안 맞다. 인본주의 계산과는 안 맞다. 영의 말씀 따라 인도받고 육신의 생각이 극복되면 인본 체질이 치유 회복되고 승리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주시는 말씀의 인도를 받을 때만 인본주의 체질이 치유 갱신 회복된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구하고, 받으라고, 문제 사건을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 사건이 선용된다. 그 사람이 사탄의 망대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망대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주 밖의 삶과 주 안에서의 삶이 극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영이 죽었을 때, 인본주의 체질로 살았을 때 내가 어떻게 주인 되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았는지가 보인다. 그런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고 지금 나를 어떻게 치유 갱신하셔서 속에서부터 되게 하시는 지가 보인다. 하나님은 자녀가 중요하기에 항상 자녀를 치유 회복하는 일을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쓰임 받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삼 저주를 해결하셨고 보좌 배경을 보장하셨다. 삼 저주를 삼 축복으로 바꾸셨기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너희가 당할 것을 내가 당했다. 너희가 당할 징계를 내가 당했고 너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내가 맞았으니 이제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내가 시행하겠다.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약속이다. 그런데 어떨 때는 기도 응답이 늦을 수도 있다. 어떨 때는 안 들어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것은 백 프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거다.

저와 여러분도 신 8:3을 체득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광야 훈련의 핵심이다. 여러분이 부자가 되어도 신 8:3을 체득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불신자는 떡으로만, 환경으로만, 돈으로만 사는 줄로 알고 있다. 거듭난 우리는 돈도, 떡도, 환경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전환인지 모른다. 이 전환이 된 사람이 말씀대로 살 수 있다. 청지기의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며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삶이 터득되지 않은 사람은 그런 삶을 못 산다. 내가 돈이 많이 생겼기에 편안하고 이제는 응답 받았으니 감사하다. 이 정도로 살아간다. 그건 종교 수준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신 8:3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가나안 땅 들어가서 거기서 전쟁도 그치고 그 땅을 누리게 될 때 거룩한 백성, 의로운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다. 8:3을 체득하게 되면 영적 가나안 정복의 시간표 속으로 다 들어가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께서는 3,6,11장의 본성과 불신자 체질을 근본 뿌리로부터 고쳐 말씀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길 원하신다. 문제와 갈등과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문제가 굉장히 유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삼 응답을 받게 되고 베드로에게 주셨던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천국 열쇠를 주겠노라 하신 말씀이 실제화 된다.

전도라는 것이 내가 이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고 그분이 나의 왕이고 그분의 사랑을 내가 받았고 그분이 모든 것이고 그분이 나의 삶의 원리요 방법이라고 할 때, 이 그리스도가 보배로워서 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다. 이게 진정한 전도 동기가 된다. 구원의 감격이 커서 전도하는 사람, 병 기적인 치유와 능력으로 체험했기에 전도하는 사람도 많다.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누렸던 그리스도를 실제 알고 체험하므로, 모든 개인과 전 세상이 오직 그리스도 만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알므로 전해야 한다.

 

2. 삼 응답을 누리면 삼 셋팅이 된다.

1) 그 사람이 진짜로 7 망대, 7 여정, 7 이정표를 가게 된다.

우리가 과거의 체질로 반응하면 문제와 갈등과 위기를 낙심하거나 불신앙하거나 원망하는 재료로 쓰게 된다. 문제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명예 지존심의 동기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저는 참 죄인이라는 것이 인정된다. 이런 인생을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셨고 성령으로 나의 모든 삶에 주인 되어 주셨다. 그래서 제가 이런 고백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과 방향에 우리 인생을 맞추었다면 이 일이 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이 책임자요 해결자이오니. 내 안에서 성령으로 통치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럴 때 영의 생각으로 인도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승리하는 사람은 플랫폼, 파수 망대, 안테나로 세워진다.

2) 여러분은 보좌 배경과 여러분 속의 성령님을 의지하여 모든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자기 하는 일에 승리할 수 있다. 게으르지 않는다. 문제를 감당해내는 사람이된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자기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을 기도하며 기도 응답으로 처리하게 된다. 그러니깐 불신자에게 그리스도로 답을 줄 수 있고 기존 신자를 제자 삼을 수 있다. 불신자가 영접하면 그에게 말씀 운동해서 제자 삼는 다락방을 할 수 있다.

18~19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모든 겸손과 눈물로 이 일을 했다고 했다. 유대인의 간계와 시험을 겪으면서도 이 일을 했다. 21절에 보니깐 그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다. 3년 동안 에베소 전도 사역을 하면서 이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이다.

 

3. 바울이 예루살렘에 굳이 가고자 결단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성령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 그런데 왜 굳이 가고자 했을까? 21장에 보면 여러 사람이 같은 예언을 하면서 만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굳이 가고자 했다. 그 답이 24절에 나온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이다.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하지만, 그는 성령께 매인 바 되어 그보다 더 귀중한 사명을 감당하길 원하였다. 예루살렘교회에 구제금을 전달하는 일과 자기를 통해서 주께서 하신 일을 교회에 보고하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럴 때 예루살렘교회가 큰 유익과 힘을 얻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 후에 로마로 가는 것이었다. 육신으로는 불안과 눌림이 있었지만, 이 생각을 하니 성령께서 기쁨과 감동을 주신 것이었다. 여기에 무슨 자기 동기나 자기 욕구 관철의 의도가 있는가? 그런 것은 전혀 없다.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잡은 것이다.

2) 그는 주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수단으로 드리고자 했다.

목회도 주님을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교회가 부흥해야 돼, 하면서 주님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길 수 있다. 부흥 안 되면 낙심하며, 내 인생이 왜 이래, 할 수 있다. 이건 주님을 나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결박과 환란을 당해도 주님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자기를 수단으로 드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신앙이 가능하겠는가? 그리스도로 답만 난 게 아니고, 실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라는 것이 체험될 때 가능하다. 이론, 지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삶이다.

주객과 체질이 180도 바뀐 사람은 이런 삶이 가능하게 된다. 자기 동기가 아닌 주님의 동기로 살게 된다. 이런 사람이 제자다. 원래 12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자기 동기 갖고 따라다녔다.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도 누가 크냐, 하며 다투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관도 틀렸고, 주님을 따른다는 면목 하에 사실은 자기 동기를 가지고 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고 1,3,8의 언약이 확고한 사람은 자기를 수단으로 드리고자 한다. 많은 사람은 지금도 자기 동기 때문에 산다. 그것 때문에 다투고 원망한다. 그것은 믿기는 믿어도, 은혜를 받았어도 아직 주객이 안 바뀌어서 그렇다. 주객이 바뀌면 주님이 온전히 주인이 되셔서 비록 우리가 3,6,11장의 본성이 있지만, 믿음의 전도, 믿음의 일, 믿음의 사역, 믿음의 경제, 믿음의 대인관계, 믿음의 모든 삶을 살 수 있다. 주님이 주인 되고 성령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게 된다. 자기 동기 때문에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내 동기에 안 맞으면 보통 그 사람이 싫은 거다.

저도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성령님이 각 사람이 어떻게 사탄의 함정에 빠졌고 그 속에서 체질이 형성되었는지를 알게 하셨다. 그래서 주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세우시는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니깐 성령님의 통치를 더 받게 되고 아버지 소원에 쓰임 받게 하신다.

제가 하는 말에 용어가 어려운 말이 없다. 근데 이 삶을 실제적으로 살게 되면 굉장히 기뻐진다. 이 삶이 발전하면 결코 신앙생활이 정체되어 있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변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진정으로 역량 있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성령께서 정말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게 만드신다. 그래서 자기 일도 자기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이 된다. 하나님 소원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일이 된다. 그래서 주님이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는 것을 늘 기도해서 응답받을 수 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렇게 들어가면 계속 인도 받을 수 있다. 여러분이 정확하게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사람은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산업인으로 성공만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 통해 전도 문, 다락방 문, 제자의 문, 성경적 전도 선교 운동의 문이 열리게 된다. 내가 충분히 답을 줄 수 있고 제자를 세울 수 있는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그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

 

결론

오늘 제목이 바울의 결단이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할 수 있는가?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는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주객이 바뀌니 이런 삶이 가능했다. 내가 사는 삶이 아니니 이것이 가능했다. 내가 살면 내 동기로 살아야 한다. 내가 안 살고 믿음의 인생을 사니깐 나를 수단으로 드리게 된다. 산업인이나 직장인이 사도 바울과 같이 완전 전도에만 올인할 수 없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 직업 소명을 가지고 성령의 통치를 받으면서 그 일을 제대로 이루어 내는 것이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이다. 여러분은 전도에만 올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삶 속에서 주객은 바꿔야 한다. 보좌 배경과 여러분 속의 성령님을 믿으니 자신이 주인 되지 말고 주님이 주인 되어야 한다. 주님이 주인이시니깐 주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 능력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일 한 다음에 아, 내가 죽을뻔 했다. 내가 너무 힘들었다 하는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이 일도 주님이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이 사시면 낙심도 없고 교만도 없다. 내가 살면 항상 낙심 아니면 교만이다. 원망 아니면 자기 자랑이다.

이번 16차 집중훈련 때 2013년도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했던 조인주 장로님 간증을 다시 보도록 할 것이다. 성령께서 문제, 사건 통해 그의 뿌리 깊은 영적 문제를 뒤집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의 경제를 축복하셔서 교회와 주의 종을 위해 헌신하며 전도 제자의 삶을 사는 내용이 나온다. 주객을 바꾸기 바란다. 자신을 수단으로 드리는 사람이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지난 신앙 기간이 어떻게 성령의 통치 받는 사람으로 바뀌었는지 점거되고 누려지는 정도가 달라지기 바란다. 삶의 역량이 달라지기 바란다.